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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ㅣ 우리 시대의 고전 1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평점 :
몇 장 읽다가 책장에 고이 모셔둔 책인데,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습기 때문에 페이지 곳곳이 우글쭈글해져 있고 누렇게 변색된 곳이 한둘이 아니다. 그간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어서인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가락 끝에 남는다.
호이징가는 중세를 흐릿한 거울의 시대로 보고 있다. 세계 속에는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상징, 알레고리는 논리적, 객관적 사고를 압도한다. "쇠퇴 일로의 중세적 사고는 이미지들의 범람 속에 와해될 지경이었고, 이미지들의 범람은 거대한 상징 체계 속에 각 형상들에 제 위치를 차지하도록 모든 것을 포괄하지 않는 한 한낱 무질서한 환각에 불과했을 것이다." (p. 247) 중세인들은 사물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거대한 상징체계에 대입하여 이해하려 했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논리는 성경, 전례, 관습적인 명제로 시작하여 엉뚱한 결론으로 끝나기 일쑤였고, 상징으로 이루어진 사물간의 연결고리는 그 자체로 무한한 관계망을 생성했다. 반대로, 성자의 유골들은 광신을 불러일으키고, 죽음과 행운 등은 의인화 되어 묘사되었다. 이처럼 구체적인 어떤 것들이 이미지화 되는 과정을 겪은 것과는 달리, 신, 혹은 신성한 것들은 사물화, 일상화 되어 이해되었다.
고통과 열망, 참회와 분노, 눈물과 웃음이 빛과 어둠처럼 극단적으로 채색된 사회, 한편으로는 가난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축제와 희극을 몸으로 실천한 인간들, 또 신비주의가 치닫는 광포한 질주를 막는 최후의 보루로서의 교회, 이런 것들이 중세를 이해하는 단편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흥미로운 구절 발견; 교회는 왜 늘 과도한 신비주의를 두려워했는가?
"그것은 교회의 모든 개념과 교리들과 성사들이 형식 및 이미지들과 더불어 엑스타시의 불길에 타버릴 위험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비적 열광의 본성 자체가 교회에 대해서는 일종의 비호를 함축하고 있었다. 엑스타시의 명정에 도달하고 형식과 이미지들이 없는 높고 고독한 명상의 경지를 배회하며, 유일하고 절대적인 원칙과의 합일을 맛보는 것, 그것은 신비론자에게 있어서는 단지 일순간의 은총에 불과했다. 높은 곳으로부터 다시 내려와야 했다. 극단주의자들이 몇몇 길 잃은 자녀들을 데리고 범신론과 지나친 괴벽 속을 방황했는 것은 사실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 그들 가운데는 대신비론자들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늘 예전 속에 슬기롭게 배합한 신비 체계들을 가지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교회를 되찾았다. 교회는 늘 신비적인 영혼들에게 안전하게 개인적인 과도함의 위험 없이, 주어진 순간에 신성한 원칙과의 접촉에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교회는 신비적인 힘을 비축해두었고, 바로 그 점이 왜 교회가 교회를 위협하던 신비주의의 위험들을 이길 수 있었는가 하는 이유이다." (p. 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