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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좀 들어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내 말 좀 들어봐>에는 딱히 서술자라 할 사람이 없다.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정신없이 제 생각을 떠들어내며 이야기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형국이다. 따라서 어떤 중립적인 서술이라는 건 이 소설에서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세 사람은 제각기 자신이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며, 제 말에 동조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바싹 마른 진흙 덩어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한 줌의 거짓말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독자는 가끔씩 엇갈리고, 간섭하고, 충돌하는 세 사람, 또는 주변인물의 '말'들을 통해 대충의 스토리를 '눈치' 채고 사건이 돌아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한 명의 서술자가 비교적 중립적인 위치에서 사건을 진술하는 것보다 훨씬 다각적이고 사실적인 효과를 준다.
"모든 상황이 특수하고, 또한 모든 사건이 평범합니다" 또는 "드러나길 기다리며 밑에 숨어 있는 '진짜' 그림 같은 건 없어요"와 같은 구절들은, 이 소설이 전통적인 플롯이나 주제의식을 거부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 보인다. 이 소설은 여러 방식으로 읽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프로이트에 근거하여 (바람난 아버지를 둔 질리언의 정신세계를 해석해 보라), 또는 경제학에 근거하여 (사랑을 화폐로 저울질하는 올리버와 스튜어트를 보라), 그렇지 않다면 등장인물 간 욕망에 근거하여 (질리언은 스튜어트와 올리버 간의 사랑을 매개하고 있다!)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읽고 난 후 안개 속을 헤매다 나온 양 뚜렷한 느낌이 남지 않는 건, "드러나길 기다리며 밑에 숨어 있는 '진짜' 그림 같은 건 없"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