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을 보러간 건 아니었다. <캐리비안의 해적3>이나 볼까 하고 갔다가 매진되어 표가 없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본 게 <밀양>이다. 영화표를 끊고 들어가며 아내가 말했다. "슬픈 영화는 싫은데."

  전도연의 연기를 좋아하진 않지만, 아들의 유괴 후 당황하여 길거리를 방황하는 그녀의 연기는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녀가 길 위에 토해놓는 신음 혹은 꺽꺽거림을 듣는 내내 괴로웠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송강호는 요즘 들어 언제나 최고다. 능청스러운 눈빛, 인간미 가득한 표정, 참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내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비교하자면, 전도연 보다 송강호가 더 좋았다. <밀양>에서는.

  '용서'는 <밀양>의 가장 큰 테마인 것 같다. 아들을 살해한 자에 대한 신애의 용서는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매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즉, 신애는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지, '하나님'이 살인자를 용서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때문에 신애는 "하나님이 저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라는 살인자의 증언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신애는 살인자를 용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살인자는 그녀가 용서하기 전 '하나님'에게 이미 용서를 받았으므로. 그녀는 '하나님'에게 불평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유혹하여 그들을 타락시키고, 그러함으로써 '하나님'과 경쟁한다. 특히, 교회 장로와 교외에서 정사를 갖는 모습은 기독교도들의 위선과 타락상이 아닌, '하나님'을 질시하고 그와 경쟁하려는 한 여자의 내면을 보여준다. 성교 중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잘 보이나요?" 신애는 '하나님'에게 "절대 안 진다"고 다짐하며 교회 모임을 방해하거나 주변인물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애의 행동에 응답하지 않아서일까, 그녀는 결국 칼을 들고 자해함으로써 제 병든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과연 신애에게 살인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었을까? 죽은 아들이 그럴 권리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누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개에 물려죽은 아이의 일화를 통해 이반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그런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면 개한테 아이를 물어뜯게 한 폭군을 그 아이의 어머니가 포옹하기를 나는 바라지 않아! 아이의 어머니라 해서 그 폭군을 용서할 권리는 없는 거야! 굳이 용서하기를 바란다면 자기 몫만은 용서해 주어도 좋아. 아이의 어머니로서 한없이 괴로워한데 대해서만 용서해 주란 말이야. 그러나 갈가리 찢겨진 그 아이의 고통을 용서해 줄 권리는 어머니에겐 없어. 설혹 아이 자신이 용서해 주겠다고 해도 어머니는 감히 그 폭군을 용서해 줄 수 없는 거야! 만약에 그렇다면, 만약에 아무도 감히 용서해 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조화가 이루어진단 말인가? 도대체 이 세상에 원수를 용서해 줄 수 있고 또 용서해 줄 권리를 가진 자가 있을까?"

  2시간 20분이 훌쩍 지나가고, 영화관을 나오며 마치 좋은 소설 한 편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신애는 결국 살인자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살인자의 딸을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영화의 시작과 끝의 따스한 볕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그놈 목소리>랑 <밀양>이랑 어떤 게 더 좋아?"  "<밀양>."  "나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