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출판사, 서치헌 번역, 1993년 4월 30일 발행본.
블로와 경위보다 교수님이 훌륭한 점은,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이 침묵을 위해 쓰여진 책을 소리내서 읽는다는, 분명히 비난받아야 할 행위, 미리 예상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빚어진 것이다, 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 것일까? (p.164)
여기에 나는 한 가지 점만 더 지적하고 싶다. 개인이 계산된 비의도성을 내보이려 시도해도, 그것을 꿰뚫어 보는 능력은 우리 자신의 행동을 조작하는 능력보다 더 발달되어 있다. 정보 게임이 몇 단계에 걸쳐 이루어지든, 목격자는 행위자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므로 의사소통 과정 초기의 비대칭성이 유지된다. (p.20)
일상 공연을 냉소적으로 보는 관점은 공연자가 조성하는 관점만큼이나 일면적이다. 공연자가 조성한 인상과 관객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인상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참된 실체인지 가려낼 필요조차 없는 사회학적 쟁점이 많다. 가장 중요한 사회학적 쟁점은, 적어도 이 책에서는, 일상의 공연에서 조성된 인상은 무너지기 쉽다는 사실뿐이다. 우리의 관심은 어떤 종류의 실체가 조성된 인상을 깨뜨리는지 알려는 데 있다. 어느 쪽이 참된 실체인지의 문제는 다른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우리가 묻고 싶은 질문은 "주어진 인상이 어떻게 무너지는가?"이다. 이 질문은 "거짓 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는 다른 질문이다. (p.89)
아이들은 부모 중 한쪽의 애정을 포기한 대가로 나머지 한쪽의 배타적 애정을 얻어낸다. 이런 수법은 아이가 부모를 대립하게 만들어서 가족 상황을 통제하는 수단이지만, 이것은 아이에게 상대적 안정감만 줄 뿐이다. 이런 수법을 써서 성공을 거두건 했던 아이는 이후 양가 감정이 없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 특별히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오이디푸스 상황을 재형성하면서 교직원의 다양한 성향에 따라 각기 긍정적, 부정적 양면적 애착 관계를 형성한다. (p.254)
절대적 합리화와 유일신이 종결된 사회에서 잃어버린 절대성에 대한 향수로 예언자로서의 학자, 교수자가 되지 말 것. 부유하는 근대사회에서 학자가 가져야 할 유일한 믿음과 태도.
시대의 이러한 운명을 당당하게 견디어 낼 수 없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이 충고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즉 그는 흔히 그러하듯이 전향자임을 공공연하게 떠들지 말고, 차라리 소박하고 조용하게, 옛 교회의 넓고 자비로운 품 안으로 돌아가라고 말입니다. 교회 또한 그의 이러한 전향을 위해 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그는 이 경우 어떻든 지성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불가피합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를 이 희생 때문에 나무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조건적인 종교적 헌신을 위한 그러한 지성의 희생은 소박한 지적 성실성 의무를 회피하는 것과는 도덕적으로 여하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회피는 자신의 궁극적 입장에 대해 명료해질 용기를 지니지 못하고, 이 지적 성실성의 의무를 나약한 상대화를 통해 벗어버리려고 할 때 나타납니다. (p. 86)
우리는 이 운명에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즉 갈망하고 고대라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그것과는 다른 길을 택해야만 한다는 교훈, 우리의 일에 착수하여 `일상의 요구`를ㅡ인간적으로나 직업상으로나ㅡ완수해야 한다는 교훈 말입니다. (p. 87)
돌이켜보면, 그날 밤 이후 내가 우울증에 빠졌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나는 서서히 형성되어가고 있던 내 삶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p.119)
나는 분자물리학 관련 서적을 읽고 아무도 알지 못할 이론들을 만들면서 나의 나날들을 보낼 수도 있었다. 나는 그때에도 콜린이 내게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러다 보니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