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는 그 요란스러운 청혼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윤노인의 재산이 탐이 났는지도 모르고, 혼자 살아가는 삶에 외로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를 정말로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이마저도 추측일 뿐이다. 결혼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개입된다. 사랑은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자체가 결혼의 동인이 되지는 않는다. 결국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결혼한다. 그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낯선 사람과 함께 평생 살아가는 일조차 감수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148) - P148

나와 똑닮은 아들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아이와 나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 그런데 또 너무나 같다는 것. 내가 밀어낸 나 자신이 그 자국 그대로 튀어나와 순수와 무구의 얼굴로 나를 보는 것. 그 기분을 아십니까. 네, 그게 이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156) - P156

그 여자는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사랑에 빠진 여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젊은 시절 한때의 달콤함에 빠져 내게 주저앉은 아내를 봐도, 쉽게 알 수 있지요.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 여자를 붙잡기 위해 수없이 많은 거짓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해 더욱 크게 발을 구르고, 목소리를 높였지요. 온 세상이 나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어요. 속는 자와 속이는 자는 함께 쾌락에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후자의 것보다 전자의 것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요. (197)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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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최인훈 전집 4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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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뒤 동갑내기 구보를 만났다. 그처럼 서울에 살고, 종로를 거니는 것을 좋아하는 독신인 채로. 구보와 내가 더 겹쳐지게 만든 2024년 말 계엄령은 덤. 아무쪼록 구보와 함께할 수 있어 좋았다. 매일매일 그의 사유를 기대하며 책을 들었다. 그 시절의 지식인이 읽는 서울, 한국. 그 안의 사람들. 그의 눈과 머릿속에 들어 앉은 느낌. 최인훈은 천재라는 엄마의 말에 아무 이견이 없다. 중년에 다시 한 번 읽을 때를 기다리며. 구보라면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하는 질문을 오랫동안 즐겨할 것 같다. (20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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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리드 더글라스를 향해 거듭되는 헛된 미련, 사랑, 증오, 희망, 호소, 분노들. 가끔씩 비치는 자신과 예술에 대한 성찰만이 빛난다. 다 읽고 나면 출소 후 다시 유사한 문제적 삶을 살았다는 게 놀랍지 않다. 다만, 자신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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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신들의 눈에 비친 바보와 인간의 눈에 비친 바보는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예술 양식이나 진보하는 사상의 양상, 라틴어 시구의 장엄함이나 그리스어 모음의 한층 풍부한 음악성, 토스카나의 조각이나 엘리자베스 시대의 노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감미로운 지혜를 지닐 수 있어. 신들이 조롱하거나 가혹하게 다루는 진정한 바보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 내가 바로 아주 오랫동안 그런 사람이었지. 당신도 아주 오랫동안 그런 사람이었고. 이제 더이상은 그렇게 살지 말도록 해.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어. 피상적인 것은 최고의 악덕이야. (45) - P45

최고의 악덕은 피상적인 것이기 때문이지. 무엇이든 깨닫는 것은 옳은 거야. (99) - P99

나를 파멸시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며, 위대하거나 하찮은 누구라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에 의해 파멸에 이를 수는 없는 거라고. 나는 이 말을 마음에 깊이 새길 준비가 되어 있고, 지금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지금으로서는 내 말을 믿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내가 당신을 가차없이 비난한 게 사실이라면,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가혹한 비난을 가했는지를 생각해봐. 당신이 내게 한 짓이 잔인했다면, 내가 나 자신에게 한 짓은 훨씬 더 잔인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135) - P135

난 점차 다른 이들의 삶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삶을 계속 이어갔어. 평범한 날의 사소한 모든 행위들이 한 인간을 형성할 수도 해체할 수도 있고, 비밀스러운 방에서 행한 것을 언젠가는 지붕 꼭대기에서 큰 소리로 외쳐야 할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지. 한마디로, 난 나 자신의 주인이기를 그만둔 거야. (137) - P137

겸손은 내게 남은 마지막이자 최고의 것이었어. 내가 도달한 지고의 발견이자, 새롭게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었지. 그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따라서 난 그것이 적절한 시기에 내게 왔음을 알았어.
그것은 더 일찍도 더 늦게도 나를 찾아올 수 없었던 거야. 누군가가 내게 그것에 대해 말했다면, 난 그것을 거부했을 거야. 누군가가 내게 그것을 가져다주었다면, 난 그것을 내쳤을 거야. 나 자신이 발견했기 때문에 난 그것을 간직하려 했던 것이지. 난 그래야만 해. 그것은 나를 위해 그 안에 삶의 요소들, 새로운 삶, 비타 누오바‘의 요소들을 품고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서 그것보다 이상한 것은 없을 거야. 누군가에게 그것을 줄 수도 없고, 누군가가 그것을 줄 수도 없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도 없어. 우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지. (138-139) - P138

그것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달은 지금 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실제로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아주 잘 알 것 같아.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어떤 외부의 제재나 지시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난 그런 것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 난 지금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한 개인주의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야. 자기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어. 나의 본질은 자기실현의 새로운 방식을 찾고 있어. 난 지금 오직 그 생각뿐이야. 그러기 위해 내가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은, 당신에 대한 모든 씁쓸한 감정으로부터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거야. (139) - P139

정말 중요한 것,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내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불구가 되거나 망가지거나 불완전한 존재로 남게 되지만 않는다면-내게 일어난 모든 것을 나의 기질 속으로 빨아들여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되게 하고, 아무런 불평이나 두려움이나 저항감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거야. 피상적인 것은 최고의 악덕이야. 뭐든지 깨닫는 것은 옳은 것이고. (144) - P144

자신의 경험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야. 자신의 경험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입술에 거짓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우리의 육체는 온갖 종류의 것들-천하고 더러운 것들과, 사제나 우리의 환상이정화시킨 것들을 포함한-을 모두 빨아들여서, 그것들을 유연성이나 힘, 멋진 근육의 움직임이나 잘 다듬어진 몸의 형태, 또는 머리카락과 입술, 눈의 곡선과 색깔로 변화시키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그만의 유익한 기능을 갖고 있어서, 본래는 비루하고 잔인하고 비천한 것들을 고귀한 생각이나 수준 높은 열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런 것들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가장 위엄 있는 방식을 발견하거나, 본래 망가뜨리거나 파괴하도록 되어 있는 것들을 통해 종종 가장 완벽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하지. (145) - P145

고통은 사실 하나의 계시인데 말이지. 고통으로 인해 예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거든. 모든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고, 또한 예전에는 예술에 대해 본능적으로 모호하게 느꼈던 것을, 더없이 명료한 통찰력과 강력하고 완전한 이해력으로 지적이고 감정적으로 깨달을 수도 있고 말이지. (153) - P153

즐거움과 웃음 뒤에는 거칠고 엄혹하고 냉담한 기질이 있을 수 있어. 하지만 고통 뒤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을 뿐이지. 기쁨과는 달리 고통은 가면을 쓰지 않아. (...) 예술에서 진실은 어떤 것이 자신과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지, 내면을 표현하는 외형. 인간의 모습을 한 영혼. 정신이 충만한 육체. 이런 이유로 고통에 비견할 수 있는 진실은 세상에 없어. 때로는 고통만이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어쩌면 우리를 눈멀게 하거나 물리게 하기 위한, 눈이나 욕구에서 비롯된 환상일 수도 있지만, 세상은 고통으로부터 만들어졌고, 어린아이나 별의 탄생에도 고통이 함께하지. (153-154) - P153

죽기 전에 자신의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것은 진정한 비극이야. 에머슨은 언젠가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행위보다 귀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지.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아.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 그들의 생각은 다른 누군가의 의견이고, 그들의 삶은 모방이며, 그들의 열정은 인용일 뿐이지. (167) - P167

그의 교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확고하고 의식적인 목표로 삼고 살라는 것이 아니었어. 그것은 그가 설파하는 교리의 근본이 아니었지. 그가 "너의 적들을 용서하라"고 한 것은 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어. 사랑이 증오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이지. 그가 보자마자 사랑한 젊은이에게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라"고 간청했을 때, 그는 가난한 이들의 상태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젊은이의 영혼, 부가 망치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염려했던 거야. 그리스도의 인생관을 살펴보면, 그는 자기 완성의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시인은 노래해야만 하고, 조각가는 청동으로만 생각하고, 화가는 자신의 기분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세상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아는-산사나무가 봄에 꽃을 피우고, 수확기의 곡식이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규칙적인 운행 속에서 달이 방패에서 낫으로, 낫에서 방패로 그 모습을 바꾸는 것만큼이나-확실하고 분명하게 예술가와 하나인 거야. (168) - P168

내가 당신이라면, 누군가가 가식적인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걸 원치 않았을 거야. 누구라도 자신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줘야 할 이유는 없어. 세상은 어차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하고는 얘기가 달라지지. 예전에 언젠가 나와 아주 가까운 친구 10년 동안 알고 지낸 친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자기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하는 나쁜 말들을 한마디도 믿지 않으며, 나를 완전히 결백한 사람으로, 당신 아버지가 꾸민 비열한 흉계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내가 알기를 바란다고 말이지. 나는 그의 말에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했어. 당신 아버지의 결정적인 비난 가운데는 거짓된 것들과 역겨운 적의에 의해 내게 전가된 것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내 삶이 비뚤어진 쾌락들과 기이한 열정들로 가득했던 것 또한 사실이라고. 그러니 그가 그 사실을 나에 관한 기지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이상 그의 친구가 될 수 없고, 그와 어울릴 수도 없다고 말했지. (217-218)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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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잘생긴 두 남자는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으며, 죽은 아버지와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거리가 있었던 만큼 서로는 긴밀하게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동생인 로니가 먼저 무덤으로 나섰다. 손에 흙을 한 줌 쥐자 그의 몸 전체가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거세게 토해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를 향한 감정에 사로잡혔지만, 그 감정은 적대감이 아니라 적대감 때문에 빠져나올 수단을 찾지 못했던 다른 감정이었다. 입을 열었지만, 일련의 괴상한 헐떡거림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지 몰라도, 그 스스로는 절대 그것을 끝내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21-22)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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