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과 사건을 바라보는 화자의 정서와 시각이 틀어져 있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희박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왜곡된 행동을 가부장제와 결혼 제도의 불합리로 정당화하는 흐름 때문에 이입이 어렵다. 아니 에르노처럼 처절하게 솔직하지도 않다. 늦어도 2000년대에 결혼 생활을 한 여성들이라면 모를까, 지금 같은 때엔 ‘본인이 결혼해놓고 거기다 이혼도 안 할 거면서 왜 그러세요‘ 소리만 나오는 피해의식과 수동적 궤변들이 있다. 다만 그 덕분에 ˝습관적 거짓말˝을 하는 자들의 사고 흐름을 체험할 순 있다. 만성적인 무력감과 공허함, 우울감으로 점철된 수동적 인생의 자기 변론. 물론 이것까지 의도되어 쓰인 것 같진 않고. 소설 내내 나이브하게 쓰여진 문장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아주 가끔 와닿는 문장들이 있다. (25. 2. 18)
이러한 무서운 변화는 그가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남을 믿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믿지 않고 남을 신뢰하게 된 것은 자기를 믿고 삶을 개척해 나간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었다. 우선 자기를 믿는다면, 모든 문제는 언제나 안이한 쾌락만을 찾는 동물적인 자아가 아닌, 이와는 반대의 측면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타인을 믿는다면 그가 해결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다 해결되어 있었다. 대개 정신적 자아에 반(反)하여 동물적 자아가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을 믿으면 항상 사람들의 비난이 따랐으나 일단 남을 믿자 주위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가 있었다.이를테면 네홀류도프가 신이라든가 진리, 부(富), 가난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읽거나 말하면 주위 사람들은 이를당찮게, 사리에 맞지 않은 웃음거리로 여겼다. 심지어 어머니와 고모들까지도 이를 점잖게 놀리며 그를 우리 철학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소설을 읽거나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하거나 프랑스 극장의 우스꽝스러운 희극을 보고 그 얘기를 재미나게 들려주면 모두들 그를 칭찬하고 추켜주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낡은 외투를 입거나 술을 마시지 않을 때면 모두들 이를 의아스럽게 여기고 일종의 허영이라고들 여겼다. 하지만 그가 사냥을 하거나 사치스러운 서재를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큰 비용을 들였을 때는 모두들 칭찬하며 값진 물건들을 선사하기도 했다. (86-87) - P86
우리 사이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미신의 하나는 인간은 각기 다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선인이라든가 악인, 현인, 어리석은 사람, 근면한 사람, 게으른 사람 등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그렇게 구분해 단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저 사람은 악인일 때보다 선인일 때가 더 많다든가, 게으를 때보다 부지런할 때가 더 많다든가, 어리석을 때보다 똑똑할 때가 더 많다든가,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인간을 두고서 당신은 성인이라든가 분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선 당신은 악인이라든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인간을 그런 식으로 구분 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이다.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물은 어느 강에서든 흐른다는 데는 변함이 없으나 강 하나만 생각해 보더라도 어느 지점은 좁고 물살이 빠른 반면, 넓고 물살이 느린 곳도 있다. 또 여기서는 맑기도 저기서는 탁하기도 하고, 차기도 따스하기도 하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누구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격의 온갖 요소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어 어느 경우 그중의 하나가 돌출하면 똑같은 한 사람이라고 해도 평소의 그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사람에 따라 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네흘류도프는 이런 유형의 인간에 속했다. 그에게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육체와 정신 모두에 있었다. 지금도 그의 마음속에서 이런 변화가일 어나고 있었다. (341-342) - P341
이유미는 그 요란스러운 청혼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윤노인의 재산이 탐이 났는지도 모르고, 혼자 살아가는 삶에 외로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를 정말로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이마저도 추측일 뿐이다. 결혼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개입된다. 사랑은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자체가 결혼의 동인이 되지는 않는다. 결국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결혼한다. 그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낯선 사람과 함께 평생 살아가는 일조차 감수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148) - P148
나와 똑닮은 아들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아이와 나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 그런데 또 너무나 같다는 것. 내가 밀어낸 나 자신이 그 자국 그대로 튀어나와 순수와 무구의 얼굴로 나를 보는 것. 그 기분을 아십니까. 네, 그게 이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156) - P156
그 여자는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사랑에 빠진 여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젊은 시절 한때의 달콤함에 빠져 내게 주저앉은 아내를 봐도, 쉽게 알 수 있지요.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 여자를 붙잡기 위해 수없이 많은 거짓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해 더욱 크게 발을 구르고, 목소리를 높였지요. 온 세상이 나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어요. 속는 자와 속이는 자는 함께 쾌락에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후자의 것보다 전자의 것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요. (197) - P197
65년 뒤 동갑내기 구보를 만났다. 그처럼 서울에 살고, 종로를 거니는 것을 좋아하는 독신인 채로. 구보와 내가 더 겹쳐지게 만든 2024년 말 계엄령은 덤. 아무쪼록 구보와 함께할 수 있어 좋았다. 매일매일 그의 사유를 기대하며 책을 들었다. 그 시절의 지식인이 읽는 서울, 한국. 그 안의 사람들. 그의 눈과 머릿속에 들어 앉은 느낌. 최인훈은 천재라는 엄마의 말에 아무 이견이 없다. 중년에 다시 한 번 읽을 때를 기다리며. 구보라면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하는 질문을 오랫동안 즐겨할 것 같다. (2025.1.3)
알프리드 더글라스를 향해 거듭되는 헛된 미련, 사랑, 증오, 희망, 호소, 분노들. 가끔씩 비치는 자신과 예술에 대한 성찰만이 빛난다. 다 읽고 나면 출소 후 다시 유사한 문제적 삶을 살았다는 게 놀랍지 않다. 다만, 자신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24.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