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 같은 내용을 예상했지만 많이 다르다.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는 홀로 존재하는 시간에 대해 매거진 에디터가 ‘잡지스럽게‘ 쓴 에세이 같다면, 〈고독의 위로〉는 정신의학계의 큰 손이 고독, 그리고 ‘단일한 개인‘에 대해 학문적으로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책이다. 한국판은 ‘고독의 위로‘라는 감성적 제목을 갖고 있지만, 사실 원제는 명료하고도 무거운 단어다. ‘Solitude‘. 책의 원제만 알았어도 잘못된 준비 자세로 책을 읽기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독자 낚시를 성공한 것에는 국내 출판사의 공이 크다. 제목뿐만 아니라 챕터별 이름도 국내 편집자가 다시 지었으리라 추측한다. 국내판 챕터 제목들은 다소 낯부끄러울 정도로 트렌디하다. ‘사는 게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비밀‘, ‘절실하게 그립지만 절박하게 두려운‘, ‘지금 우리가 고독해야 하는 이유‘. 본문은 프로이트와 융을 지나 사회학에도 손을 담그며 ‘개인‘이 탄생한 역사까지 읊고 있는데 말이다. (그 내용의 챕터 제목은 ‘절실하게 그립지만 절박하게 두려운‘이었다. 추가 예, ‘사는 게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비밀‘이라는 챕터에선 공상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해 반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꼭 챕터 제목이 내용을 건조하게 요약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건 뭐 비유도 아니고 다분히 낚시지 않나.

2. 앤서니 스토가 가장 굵직하게 하고 싶어하는 말은 정신의학계에서 ‘인간관계‘에 비해 ‘고독‘의 중요성과 순기능을 조명하는 담론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삶에서 유일무이하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 ‘인간관계‘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행복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 속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탐구하고 즐기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각종 심리학적 이론과 역사적 사례들로 그 명제를 옹호하고 뒷받침한다. 산발적으로 나열될 수 있는 이론과 사례들이 단정하게 정리되고 취합되고 연결되어 있다.

3. 챕터 제목 경악 버전 투. 독방에 감금되어 타의에 의해 고독을 강요받는 상황이 인간에게 끼치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챕터 제목이… ‘나와의 대화‘다. 제목만 보면 템플 스테이하면서 작업한 수필 같은 게 써있을 것 같지 않나.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 문구는 자의로 택한 고독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 뉘앙스지 독방에 감금된 상황, 강요된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어울리는 문구냐, 나는 전혀 모르겠다.

4. 국내 출판사에서 챕터 구성과 이름을 억지스럽게 바꾸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바로 찾아보았다. 역시나. 원판의 챕터 제목들은 간결하고 직관적이다. ‘나와의 대화‘라는 챕터의 원제는 ‘Enforced Solitude‘인데다가, 본래 네 번째인 챕터가 한국판에선 아홉 번째 자리로 옮겨와 있다. 책 구성까지 뒤죽박죽으로 만들다니 자의적 챕터 작명부터 과하다 느꼈지만 여기까지 오면 이건 분명 편집자의 월권이다. 이러니 흐름이 부자연스럽고 생뚱맞지. 한국판 챕터 8과 10이 본래 연달아 이어져야하는데, 중간에 뜬금없는 챕터를 끼워넣은 셈. 내가 왜 이 책을 봐야한다고 생각했더라. 누가 추천한 걸 기억하고 있었나, 서점을 누비다 제목에 낚여 책을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하고 깐깐하게 되짚어보게 되는 순간이다.

5. 물론 이건 책 자체보다 국내 출판사 때문이다. 오히려 책은 두텁고 신중한 목소리를 갖고 있어 좋다. 나에 대해 위로받는 느낌도 든다. 다만 출판사가 책을 좀 망쳐놓았을 뿐이다.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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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습성이다. 사랑-그것이 정말 사랑이라면-은 끝없는 역동성과 첫 만남의 충실성이 어우러진 형태이다. 사랑은 역동성(끊임없는 재-발명)과 충실성(숙명적이면서도 예기치 못했던, 세계 균열이라는 사건에 대한 충실함) 사이의 긴장 상태, 혹은 일종의 변증법이다. 혁명도 이와 마찬가지다. 혁명이 인간적, 사회적 관계의 재발명뿐만 아니라 혁명 자체의 이론적 전제들의 재발명을 멈추는 순간이면 대개 반동(re-action)과 퇴보로 이어지고 만다. / 진정한 혁명적 순간은 사랑과도 같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 범상한 일상,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생겨날 수 없게끔 사방에 켜켜이 쌓인 먼지의 단층에 하나의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다. (12)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교도, 유대인,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 띠를 만드는 행위는 아름다운 연대의 사례라고 할 수는 있지만, 사랑에까지 이르려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 의식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은 때에도 사랑을 행하는 것이다. 극히 이례적인 세계 균열의 경험에서(만) 촉발된 것이 아닌 사랑, 지루해 보이는 일상의 활동들, 반복들 또는 재발명 속에서 드러나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16)

빛나던 길에 먼지가 쌓이고, 열정이 최악의 절망으로 (또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좌파 멜랑콜리’로) 변하며, 혁명적 순간을 향한 마지막 해방의 잠재력들까지 반혁명에 의해 삼켜지고 마는 시절은 기어이 찾아온다. 그러나 가장 큰 패배는 무자비한 현실에 꺾여버린 또 한 번의 패배가 아니라 유토피아적 욕망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맞는 패배다. (17)

위험은 ‘사랑에 빠지는 것‘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일체의 위험을 기피하려는 세계적인 조류가 형성되고 있다. 서구의 퇴폐적인 자유방임적 사회로부터 이슬람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일치단결해 욕망에 대적하고 있는 중이다. 서구에서 새롭게 창안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소셜 데이팅 애플리케이션 그라인더, 틴더 등)처럼 욕망을 찬양하든, 아니면 ISIS(이슬람국가)나 이란의 근본주의가들처럼 욕망을 금기시하든, 그들의 공통된 목표는 우리가 진정으로 무언가에 빠져버리고, 좌표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렇지만 실제로는 어느 때보다 더 우리가 나아갈 길을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순간, 그 기회를 근결시키는 데 있다. (19)

성애적 관계에 치중하는 이 새로운 애플리케이션들 중 대다수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의 핵심 요소들을 결여하고 있다. 텅 빈 해변에서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어떤 신비도, 진실한 만남도 없었다. 다른 숨겨진 의도라고는 전혀 없이, 노골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성적 욕구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애니 홀>의 표면적 대화는 생략된 채 속 생각을 나타내는 자막만 남겨진 상황과 같다. 그라인더나 틴더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솔한 대화를 이끌어가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실제로는 훨씬 더 표면적인 대화("섹스하자")에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44)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L‘Anti-Oedipe>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욕망이 억압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욕망이라도 사회의 기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비사회적이기 때문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나 욕망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욕망 기계는 사회의 전 부문을 폭파시키지 않은 채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부 혁명가들이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욕망은 축제가 아니다! 어떤 사회든 착취, 예속, 계급 구조를 위태롭게 하지 않은 채로 진정한 욕망의 지위를 용인할 수는 없다." (55)

혁명이 목표로 했던 일상생활의 변화는 이제 다양한 포스트모던적 생활양식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게이나 복장도착자가 되는 일, 또는 두 명이든 열 명이든 동시에 여러 사람과 주기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일은 더 이상 체제 전복적인 성질을 띠지 않는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무 의미도 없는 주제로 취급받는 실정이다. 생활양식이라는 이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어디로 끌고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런던의 캠던이나 뉴욕의 태리타운을 방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소위 힙스터 문화라 불리는 이곳의 하위문화는 생활양식의 흡수작용을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그것은 곧 전복적 잠재력이 말끔히 소거된 일상생활의 순전한 (쾌락주의적) 심미화다. 이곳의 창의적인 젊은이들의 가방에서는 체 게바라의 전기가 튀어나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정작 일상생활에서 혁명을 수행한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 이러한 종류의 그릇된 ‘사랑의 재발명‘은 초인플레이션 상태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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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이 인간 이하라는 수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신이 인간 이하임은 폭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는 분노는 광주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공수부대와 싸워야만 했던 운명이었다. 광주 시민들이 투쟁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임‘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 우리는 이제 5월 25일 김성용 신부의 강론의 뜻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는 이제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하며 개나 도야지와 같이 입을 먹이그릇에 처박아 먹어야 하며, 짐승과 같이 살아야만 합니다.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유신잔당이 우리를 짐승같이 취급, 때리고, 개를 죽이듯이 끌고 가고, 찌르고 쏘았기 때문입니다.
2) 두 다리도 걷고 인간다웁게 살려고 하면 생명을 걸고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져야 한다. 과거의 침묵, 비굴했던 침묵의 대가를 지금 우리들은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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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월인가 2월, 나는 5년 전부터 들춰보지 않았던, S에 대한 나의 열정의 시간에 해당되는 일기장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여기에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이유로 일기장은 내 손이 닿지 않는 장소에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이 페이지들 속에 『단순한 열정』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진실‘ 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정제되지 않고 암울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어떤 제물 같은 무엇이 있었다. 나는 이것도 언젠가는 출판하리라고 마음먹었다.
(12)

밤에만 이루어지는 이 모든 것들을 그가 나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열정을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다는 것이 나의 비극이다. 외부로부터 강요받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움은 나를 열정으로 몰아간다. 나를 온통 지배한다. (36)

요즘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것이 괴롭다. 교정, 수업, 사랑 이야기, 외출, 리셉션, 모두 공허하다. 더는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진실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글과 진실은 혼재한다. (69)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박물관으로 몰려갔다. 지난 추억들을 찾아 노스 핀클리에 들렀다. 나는 문화적이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인생과 시간을 파악하는 것, 즉 이해하고 즐기는 것이다. (100)

내가 S에게 애정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행동들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프랑스인을 사귈 때와는 달리, 그의 문화적 코드를 해독하거나 그를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자리매김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61-62)

"남자들이 나를 헤매게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를 헤매게 하는 것은 단지 내 욕망일 뿐이다. 즉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육체와의 결합 속에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져버리는 굉장한 어떤 것에 대한 복종(또는 추구)일 뿐이다. (203)

어제, 그와 함께 TF 1의 멍청한 오락 프로그램들, 예를 들어 정확한 가격 알아맞히기 따위를 보면서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절망감을 느꼈다. 그가 얼마나 지적인 것과 거리가 있는지를 발견했다.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본 영화는 끝까지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찌나 지루해하는지, 끊임없이 몸을 뒤틀며 보기 드물게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249)

찬란한 가을 햇볕 아래 반짝이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끝없이 작 년을 생각한다. 이 열정으로 내 인생의 걸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그것이 걸작품이길 바랐기 때문에 이 관계가열정이 된 것이다. (미셸 푸코 : 최고의 선은 자신의 인생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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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도 일종의 방사선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 주위에는 이를테면 그 사람에서 연원하는 의미의 크고 작은 영역이 있어서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사람은 누구든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영역에는 신체적 요소들과 정신적 요소들이 풀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얽혀 있다. 한 사람에게서 나와 그 주변 환경으로 퍼져나가는 영향력들은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하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 섬광을 담지하고 있다. 그러한 영향력들은 실제로 단지 외적인 경우에도, 즉 그 사람의 인격을 느끼게 하는 어떠한 암시력이나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정신적 섬광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69, 1-4 장신구의 심리학)

어떤 행위나 그 산물이 우연을 넘어선 필연적 형식과 보편적 감정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고립된 순간적인 자극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이런 행위와 그 산물을 아무런 양식이 없다고 평가한다. 내가 전적으로 개인 법칙이라고 명명한 것이 필연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위대한 창조적 개인에게 개별적 업적은 그의 고유한 존재에 내재한 광범위한 깊이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서 확고한 기초를 발견하게 되며, 또한 능력이 뒤떨어진 사람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수용된 양식에 의한 업적과 달리 ‘지금 여기‘를 넘어서는 무엇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개인적인 것은 개인 법칙을 나타내는 예가 된다. 개인 법칙을 만들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사람은 보편 법칙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의 업적은 양식이 없는 것이 된다. (129, 2-4 양식의 문제)

아주 위대한 개인들의 개인적 양식은 그들보다 뒤떨어진 사람듯이 추구하는 보편적 양식과 구분되는데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실천적 규범을 입증한다. "네 스스로 전체가 될 수 없다면, 너 자신을 거기에 봉사하는부분으로서 전체 속에 편입시키도록 하라." (130, 2-4 양식의 문제)

높이 치솟아 있는 산과는 달리 바다는 물거품이 빠져나갔다가 밀려오기를 반복한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원인과 결과의 순환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다는 우리 자신의 내면적인 삶의 형상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꼭 닮았다. (136, 2-5 알프스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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