냅의 고백들은 아찔했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기억하는 유사 경험의 나열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아찔하지 않았을 것이다. 냅이 읊는 경험들은 술 마신 다음날 나를 부정하지 않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더는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 눈 질끈 감고 뇌 저편에 밀쳐두어 망각의 영역에 갇혀 있던 수많은 실수를 일깨웠다.

잊고 있었지만 없었던 일인 건 아니었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과음 후 실수‘ 상자에 차곡차곡 넣어놓은 사건의 레이어가 이렇게나 다양하고 많은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잊고 있던 실수가 떠올라 눈을 질끈 감고 책을 덮기도 했다. ˝다들 이러잖아?˝, ˝술을 마셨으니 그럴 수 있어˝, ˝일상에 문제 없으면 된 거 아닌가?˝ 같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했던 말들, 그와 함께 손쉽게 밀쳐내버린 일들은 기억 저편에 어느새 산더미가 되어 있었고, 나는 이제서야 고개를 돌려 그곳을 보았다.


냅이 전해주는 정보들 역시 아찔했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주당이긴 하지만, 알콜 중독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알콜 중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는 생각했다. 4년 전쯤이다. 매일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맥주 4캔을 사서 저녁마다 다 마시던 시기가 있었다. 그 이후로도 최소 일주일에 1번씩은 마셔 왔다. 올해도 봄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하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2번씩 마시기도 했다.

여름부터 차츰 술과 멀어지면서 올 가을이 되어서는 술 마시는 텀을 2주로 늘렸고, 그게 3주가 되었고, 이제 한 달이 되었다. 그래서 중독 수준이라고 할 만한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에 실린 알콜 중독 테스트에서 나는 중증 알콜 중독을 진단받았다. 나 스스로도 체크리스트 항목들을 보면서 부정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냅이 알려준 사실들은 꽤나 끔찍했다. 이미 한 번 알콜 중독에 빠졌던 뇌, 알콜에 도파민 분비를 의존했던 뇌에는 그 시스템이 평생 각인되어 있다고. 오랜 기간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알콜 중독 수준으로 술을 마셨던 사람들에게 절주란 불가능하며, 금주만이 있을 뿐이라고. 그러나 알콜 중독자들 중 단주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3명에 1명도 되지 않는다고.

왠지 모르게 희망이 되는 정보들도 있었다. 알콜 중독은 성격적 결함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생리적 질병이라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알콜 중독은 다른 병처럼 유전적으로 대물림되는 질병으로, 알콜 중독자들의 핏줄에는 알콜을 절제하지 못하는 습성 같은 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음주 경향을 자제력, 의지력, 의존성 같은 내면적 특징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물리적 치료 대상으로 보게 해주었다. 몇 년 전 나의 심각한 우울이 의지 부족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질병이란 걸 깨닫고 나서 꽤나 효과적이고 빠르게 그것을 ‘치료‘할 수 있었듯이.


그런 의미에서 냅의 <드링크>는 고무적이다. 알콜에 대한 나의 나이브한 생각을 호통치듯 엄격하게 바로잡아주었다. 실제로 호통을 쳤다기보다는 그의 무섭도록 솔직한 자기 고백이 자연스레 내게 경각심을 던져 준 것이다.

어쩌다보니 단주 3주차, 술의 공간을 조금씩 다른 시간들로 채워가고 있었다. 음주가 조금씩 새삼스러워졌다. 미디어에서 얼마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부지런히 술을 권하고 있는지 체감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 책을 만났다. 더 나은 삶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조금씩 논알콜의 삶의 초입에 발을 들인 때, 캐롤라인 냅은 내게 박력 있게 다가와 내 손을 낚아채고 몇 발자국 성큼성큼 더 데려가며 ˝자, 봐!˝라고 말하는 듯했다.

자기 속을 깊숙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그대로 종이 위로 띄워낸 그녀의 용기를 보며 느낀다. 어떤 흠많고 치욕스러운 삶을 살았든간에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줄 아는 그 무서운 용기를 견지한다면, 삶은 길을 잃지 않는다.



p.s 다만 단주 후의 시간, 그 효과에 대해 충분히 얘기하지 않은 게 아쉽다. 그러한 내용은 끝부분에 잠깐 나오고, 책 대부분이 술 마시던 시절의 습성과 과오에 대한 얘기다. 심지어 중간 부분까지는 읽으면서 그녀의 묘사 때문에 술을 마시고 싶어질 정도다. 그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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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2-10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주....는 그냥 있는 말입니다. 저는 전형적인 소극적 알코올 의존증인데요, 1주에 8일 동안 최하 25% 소주 한 병 이상을 정기적으로 마십니다. 많이 마시지 않기 때문에 실수는 거의 하지 않지만 간혹 술 마시고 인터넷 접속해 정상적이지 않은 댓글을 달기도 합니다. 유전 맞는 거 같습니다. 아이들은 다행히 어미를 닮아 술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이런 책이 있군요. 굳이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끊지 못할 거 같습니다. 속만 상하기 싫어서 말입니다.

김섬 2022-12-14 19:40   좋아요 0 | URL
솔직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이런 자전적 에세이는 차치하고서라도, 술과 뇌의 생리학적 관계에 대한 접근 자체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음주는 (의지력의 문제라) 잘못되었다는 단순한 도덕론을 떠나서 질병으로서의 과학적 흐름을 쫓아가는 게 저는 더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 같아 앞으로 이쪽으로 더 읽어보려고 합니다. 음주 행위에 죄책감부터 느끼지 않으시는 게 의존증을 벗어나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왕 드시는 것 즐겁게 드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