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위로 - 카페, 계절과 삶의 리듬
정인한 지음 / 포르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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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손님 중에서 나에게 대뜸 부럽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도 카페 이름이 '좋아서 하는 카페'이기 때문이지 싶다. 그런 손님들은 대개 나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여유롭게 사는, 팔자 좋은 사람을 생각하는 것 같다. 카페 밖 풍경도 제법 그럴듯하다." - 프롤로그

따끈한 커피 한 잔에 마음이 놓이고 꼭 막혔던 가슴이 열린다. 커피 애호가는 아니지만, 감정의 변화가 생길 때면 언제나 향이 좋은 커피가 그리워진다. 그런 커피향이 좋아서 언젠가 카페 창업을 꿈꿨지만 먼저 창업한 주위 친구와 지인의 폐점 소식에 현실의 벽을 실감하며 뒤돌아섰다. 그래서인지 카페를 본업으로 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부럽기도 하고 염려되는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스며든다.

율하 카페거리에서 '좋아서 하는 카페'를 운영하며 글을 쓰고 있는 정인한 작가의 <커피의 위로>는 담백한 문체로 카페의 희로애락을 풀어냈다. 10년 이상의 시간을 카페에 바치며 느낀 카페의 전반적인 노하우와 가게를 이어나가기 위한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 그리고 바리스타 겸 사장으로서 겪게 되는 고충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만난 여러 인연들과의 만남과 이별 속에서 느끼는 아쉬움과 상실감은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새로 오는 이에게 가벼운 마음보다는 조금은 무거운 마음이 더 좋지 싶다. 레시피를 공유하는 것보다 우리의 태도를 납득시키고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카페의 내부자가 늘어갈수록 카페를 둘러싼 껍질 같은 것이 조금씩 얇아지는 느낌이 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비한 것은 없어지고 어떻게 보면 본질인 장사꾼의 모습만 남게 될까 걱정된다." -p47

나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위해 보내는 시간은 갖고 있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아닌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긴 시간 집중하며 연마하는 일이고, 그러므로 그건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긴 시간 동안 지킬 힘을 만들기 위해 섭취해야 할 영양소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다음에 오는 것은 행동과 실천이다. 상황과 사정에 따라 시작의 방법은 달라지겠지만, 첫 마음의 온도를 지키며 천천히 나아가고 싶다는 저자의 작은 바람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일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새로운 신입 사원을 맞이할 때도 온전히 진실 자체로 그 사람을 대하였던가, 상대의 배경이나 처지를 저울질하지는 않았는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내 합리화가 우선시 된다. 누군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연을 만나기를 소원할 뿐이다. 감성에 빠진 내가 때때로 현실성이 떨어지는 얘기를 하더라도, 사회윤리와 관습에서 벗어난 얘기를 하더라도 그럴 수도 있지 뭐. 인간이니까,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독백하듯 모든 비밀을 털어놓고도 돌아서서 그 말을 괜히 했어,라고 후회하지 않아도 될 사람, 옳고 그르다는 판단으로 나를 심판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 한 명만 나와 같이 일할 수 있다면 군중 속의 고독 같은 건 느끼지 않을 것 같다.

청년에서 아저씨가 되고, 이십 대에서 삼십 대가 되고, 그리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온 이때. 나잇살에 붙은 군살은 굳은살로 바뀌어 단단해지고 있다. 불안함은 초연함으로 바뀌고, 유약함은 유연함으로 바뀌어 간다.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며 감사이자 목표인 나이를 나는 지나고 있다. 여전히 꾸미지 않은 얼굴로, 가벼운 옷차림에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찾으면 다 있는 풍요. 엉키지 않고, 끊기지 않고 순조로이 돌아가는 일상. 용도에 맞는, 역할에 맞는 것들이 착하게 자리를 지켜 주는 안정감. 질릴 때쯤 새로운 것을 맛보게 해주는 설렘. 그런 여벌의 것들이 있다는 여유와 사치에 감사한다. 지금 이대로 조금의 여유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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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담아
에이미 블룸 지음, 신혜빈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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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나의 죽음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과 지인의 죽음은 무엇보다 괴롭고 두렵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을 때마다 두려움은 더욱 불어났다. 두려움은 그런 것이다. 갑자기 중단되어야만 하는 사랑 앞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존재들. 사랑의 대상을 상실한 우리를 짓누르는 슬픔을 몸과 마음으로 통과해내려 애쓰는 과정이 바로 애도일 것이다.

"남편은 죽기로 결심했고, 나는 그를 도왔다."

이 책은 사랑하는 남편이 알츠하이머에 걸려 삶을 떠나길 선택하려 하고 인정할 수 없는 선택이지만 그 결정에 동의하고 그의 자유사를 도와주는 아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말기 질병 또는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이에게 조력 자살을 제공하는 스위스의 비영리 단체 디그니타스의 승인을 받은 뒤 취리히로 향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언젠가부터 남편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채기 시작한 에이미. 무채색 셔츠만 입는 아니에게 튈 레이스가 달린 얼룩무늬 옷을 선물하고, 몇 년이나 참여했던 독서모임의 일정을 헷갈리고, 가까운 거리로 이사간 회원이 아주 멀리 이사갔다고 착각하기까지 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신경외과에서 조밝성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고 조력자살을 도와주는 스위스의 디그니타스의 문을 두드린다.

나이 듦에 따라 겪게 되는 소중한 이의 죽음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일이다.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될 죽음 앞에 무력한 우리에게 남겨지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을 잣대로 그 행위를 평가해야 바람직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세상이 주입한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모든 방식의 죽음을 부정하고 자유사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이들에게도 '일리'는 있다. 다만 그 이유가 당사자에게도 합당한지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 자유사를 선택한 사람은 삶의 부조리에 부딪쳤을 때, 그 정체를 고민하며 온몸으로 끌어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는 위로의 말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는 본인 외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죽음에 동의하며 그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의 아픔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존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의 옆에서 숨을 쉬고 그의 존재를 느끼는 이 감각을 나중에 잊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시선과 손을 그에게서 떼지 않는다. (나는 잊지 못한다. 다 일 분도.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의 숨소리가 들리고 일어날 때마다 그의 온기가 느껴진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채 잠들고 그의 고개가 목베개에 살짝 떨어진다. 그의 숨소리가 바뀌고 이제 나는 마지막으로 그가 잠드는 소리를, 그의 깊고 고른 숨소리를, 지난 십오 년 가까이 그의 옆에 누워 듣던 소리를 듣는다. 그의 손을 잡는다. 여전히 그의 무게와 온기가 느껴진다. 그의 피부색이 불그스름한 빛에서 좀 더 창백한 분홍빛으로 바뀐다. 나는 그곳에 오래도록 앉아 기다린다. 이제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낯빛이 더 창백해지고 나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났음을 안다."

생에 대한 자기 결정권, 그 끝나지 않은 오랜 질문들 안에 숨겨진 문제들은 질병 문제뿐만 아니라 인종 차별, 빈부 격차, 새로운 사회의 형태 등의 새로운 형태의 문제에 직면하게 될 미래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건 분명 그렇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리라. 자유사의 찬반양론은 첨예하게 맞서 있어 윤리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그러나 죽음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국내에서도 갈수록 높아져가고 있으므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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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유전자 - 풍요가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
에드윈 게일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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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생물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생물학 분야에서 진화를 고려하지 않고 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은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사고와 신체는 자신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진화적 사고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생물의 탄생으로부터 흘러온 유전자의 사슬은 생존에 적합한 형태로 진화해왔다.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놀라울 정도로 유연한 존재다. 인간의 적응력은 문화적 진화와 유전적 진화 모두에 의해 강화된다. 옷, 불, 냉방을 사용해 가혹한 환경의 극단적인 온도를 누그러뜨리며, 새로운 농법과 혁신으로 식량난을 해결한다. 다른 동물들도 새로운 조건에 대응하며 유연성을 발휘하지만, 문화에서 비롯되는 놀라운 유연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지닌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이 문화적 활동으로 새로운 조건에 대응하지 못할 때는 자연 선택이 발생하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문화적으로 유도된 자연선택은 빠르게 진행되고는 한다.

인간의 유전자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유전자가 표현되는 각각의 형태를 '표현형'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덴마크의 식물학자 벨헬름 요한센이 제안한 것으로 이 책의 저자 에드윈 게일의 제시하는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난해할 수 있을 '표현형'을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만난 사람의 모든 특징을 말한다. 살아온 환경과 역정에 의해 변화된 유전자의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유명한 다윈의 말처럼 "살아남는 것은 가장 힘센 종도, 가장 영리한 종도 아닌 변화에 가장 잘 대처하는 종이다." 인간의 환경 적응의 유연성을 '표현형 가소성'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예부터 키가 작았다. 19세기에 남성 평균 신장은 161센티미터, 여성 평균 신장은 149센티미터였다. 육이오전쟁이 끝난 뒤 한반도는 자유 시장 경제와 억압적 전체주의 체제로 양분되었다. 195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삼팔선 이남에서든 이북에서든 같은 키로 성장했지만, 2002년 유엔의 조사에 따르면 북한의 취학 전 아동은 남한에 비해 키가 13센티미터 작고 몸무게가 7킬로그램 가벼웠다. 북한 성인의 키는 달라지지 않은 반면에 남한 여성은 20.2센티미터 증가라는 세계 기록을 달성했으며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기대 수명을 기록했다. 지도에 그은 선이 생물학적 차이로 나타난 것이다." p12~13

에드윈 게일은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인간이 변해온 과정과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존을 위한 기술의 발달로 기아로 허덕이던 과거를 뒤로한 채 많은 이들에게 풍부한 식량을 가져다주었고 식량 생산의 전 지구적인 산업화는 많은 후기 산업사회에 전례 없이 다채로운 식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당분과 지방으로 가득한 고밀도의 저렴한 고칼로리 음식을 아주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비만율이 상승하고 심장병, 당뇨병, 고혈압이 급증한 '소비자 표현형으로 나타났다. 인간의 음식 섭취 적응과 오늘날의 풍족한 환경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인류가 진화시켜 온 적응과 현재 환경 사이에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화들 중에서도 가장 쉽게 이해되는 예이다.

인간은 기생충과 질병 같은 자연선택으로부터 벗어나 눈 깜박할 순간에 진화하였다. 의료 기술의 발전과 생활 여건의 개선 등으로 질병에 대항하고 다른 동물에게서 관찰되지 않는 진화한 마음도 만들어냈다. 이것은 특정한 적응에 대한 자연선택을 발생시키는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진화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을 끊임없이 구축하며 자연선택을 반복적으로 일으키는 과정에서 서로 뒤얽히고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우리는 자연적 종이 아닌 나름의 문화를 지닌 인공적 존재이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환경과 싸우며 적응해 왔다. 하지만 지금 인류의 미래는 밝다고만은 할 수 없다. 환경 오염으로 인한 인류의 위기가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브랜드 박사는 "우리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류를 생각해야 한다"라는 말을 한다. 인류의 멸종을 피하기 위해 인간의 수정란을 가지고 인류가 살 수 있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간다. 인터스텔라의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이 되기 전에 인류는 인간만으로 생태계를 구성할 수 없음을 깨닫고 외계에서 새로운 환경을 찾기보다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 환경과 어울려 살 궁리를 하는 것이 파멸을 막을 첫걸음이지 않을까.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유연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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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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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는 인연설이란 게 있다. 한 사람과 그 사람을 둘러싼 다른 사람, 자연과 우주가 모두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깝고 알아보기 쉬운 인연이 있고, 만난 적 없고 본 적도 없는 사람들. 이 모든 인연들이 모여 한 사람을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도, 앞으로 만날 사람도 모두 지금 나와 당신을 살아가게 해주는 고마운 인연이라는 것이다.

"나는 운명이니, 가야 할 길로 인도해 준다는 작은 신호니 그런 걸 믿지 않았어. 점쟁이의 말이나 미래를 점치는 타로도 믿지 않았고. 난 단순한 우연의 일치, 그 우연의 진실을 믿거든."

모든 냄새를 구별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앨리스와 그녀의 이웃에 살며 교차로를 그리는 것을 즐기는 화가 달드리의 이야기로 1950년대의 런던과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앨리스는 친구들과의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다 점쟁이의 예언으로 평범했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날 이후 매일 밤 낯설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게 되고 언젠가부터 이웃 달드리(이든)와의 가까워진 앨리스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산을 상속받게 된 달드리의 도움으로 점쟁이가 예언한 운명을 찾아 이스탄불로 떠나게 된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그들은 가이드 칸을 만나 운명의 여정이 시작된다. 어느 날 우연히 들어선 골목길에서 악몽을 꿀 때마다 봤던 장소를 발견하게 되고 그동안 기억 속에서 지워졌었던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한다.

"4월 25일. 이스탄불에서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유력 인사들과 지식인, 신문기자, 의사, 교사 그리고 아르메니아 상인들까지 대거 검거되었어요. 그들 대부분은 재판 없이 처형되었고, 생존한 사람들은 아다나와 알레프로 끌려가서 강제 수용되었고요."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 4월 24일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이 강제추방 과정에서 엄청난 수가 목숨을 잃은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이 학살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대량학살 사건인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은 뒤로 미룬 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 문제가 주로 다뤄졌다는 점이다. 로맨스 소설 안에 감추어진 아픈 역사는 잊혀 가고 있던 비극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회색빛 런던의 평화로운 풍경과 아름다운 이스탄불 모습을 간직한 <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은 여러 문화의 원형을 간직한 매력적인 끌림으로 충만한 이스탄불을 배경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신비한 여정과 생각지도 못했던 진행은 이 책을 읽어야 할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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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홍라희 컬렉션 - 강력하고도 내밀한 취향
손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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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은 사실 '이건희 컬렉션'이 아니다

수집은 개인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어떤 한 개인을 들여다보는데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삼성가의 행보는 오래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병철 회장에서 시작된 삼성가의 수집은 이건희 회장을 통해 이미 2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고 그의 부인 홍라희 여사 역시 전문성을 갖춘 수집가로 삼성가의 며느리가 될 때부터 수집가의 훈련을 받아왔다. 굳이 박물관과 미술관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이미 국내 전무후무한 미술 수집을 완성하였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미술계 최고의 이슈로 자리 잡은 세기의 기증을 실행하였다.

지금껏 전례가 없었던 이 기증은 경제적 가치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규모이다. 이병철 회장 때부터 모아온 고미술품과 국내 근대 미술품 및 세계적인 서양화는 2만 3천여 점에 달하고 고미술품과 근현대 미술품을 합친 경제적 가치는 3조 원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체 미술관이 100년 동안 사야 할 미술품을 한 번에 구한 것과 같은 양이다.

이건희 컬렉션이라 불리는 지금의 미술 수집은 넓게 표현한다면 이건희, 홍라희 컬렉션이라 칭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이 책은 이건희 컬렉션이라고 불려왔던 구축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내 홍라희의 뒷이야기, 수십 년간의 수집 과정에서 그들 부부가 믿고 의지했던 화상의 이야기와 컬렉션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과 그것을 창조한 화가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가려진 이름 '홍라희'

이건희 컬렉션이 불리는 이 엄청난 수집품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결재권자가 이건희 회장이었다고 해도 아내 홍라희 여사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홍라희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 미술학과를 나왔고, 1995년부터 호암미술관 관장을, 그리고 2004년 리움미술관을 개관하고 오랜 시간을 관장 자리에 머물렀다. 선대부터 내려온 고미술 중심의 삼성가에서 홍라희 여사의 전문성은 삼성가의 컬렉션을 다양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건희 컬렉션의 대부분의 수집 활동을 부부가 함께 해왔다.


"저희 부부가 최초로 산 미술품은 서예가 소전 손재형 씨의 소장품들이었는데,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금강전도> 같은 명품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행운이었지요. 회화나 도자기의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요. 그때부터 전문가들에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 회장은 1970년대 내내 거의 매일 저녁 미술품을 보고 사들이곤 했습니다."

전체 컬렉션에서 3분의 2 이상이 1970년에서 1980년까지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여사가 사들 수집품이다. 그녀는 한국의 미술뿐만 아니라 서양의 현대미술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고 마크 로스코, 애드 라인하르트, 프랭크 스텔라 등 지금의 컬렉션을 갖추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가장 가까운 조력자 '이호재와 박명자'

책에서는 미술계를 뒤흔든 삼성가와 수십 년간 함께한 두 화상을 소개한다. 바로 가나아트의 이호재 회장과 현대화랑의 박명자 회장이다. 1970년에 인사동에서 현대미술을 취급하며 본격적인 상업 화랑을 경영하고 있었던 박명자 회장과 1983년에 만 29세의 나이로 최연소 사장이 되며 가나화랑을 차린 이호재 회장. 박명자 회장이 당대 최고의 작가의 작품을 위주로 삼성가에 신작을 공급했다면, 이호재 회장은 생존 작가나 작고 작가의 구작과 명품 고미술을 공급해 주었다고 한다.


유명한 일화로 1979년 겨울 25살의 이호재 회장은 삼성 본관을 찾아가 막무가내로 이건희 부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고 수차례나 문전 박대를 당했지만 그 끈기에 감동한 것인지 이건희 부회장은 그를 들여보내라고 한다. 이것이 이호재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 20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나며 그들의 관계는 계속됐다.

그들이 사랑한 작품들

고미술의 관심에서 출발한 이건희 회장의 수집은 근현대미술 작가로 관심이 넓어진 건 아내 홍라희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중섭, 박수근, 권옥연 등의 구상계열 작품 외 유영국, 김환기, 김흥수 등의 추상 계열의 그림은 아내 홍라희의 조언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의 컬렉션의 특징이라면 단순 가격이 비싼 그림들이 아닌 학술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대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피해로 척박한 근대미술에 삼성가의 컬렉션으로 들어온 작품은 1400점의 근대미술은 당시 미술계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남을 것이다.



저자가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에서 느낀 부러움은 나 또한 유학 당시 느꼈다. 마츠가타 고우지로가 수집한 미술품이 국립서양미술관의 근간이 되었는데 마네, 세잔, 모네, 고갱, 고흐에 이르기까지 유럽이 아닌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츠카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가와사키 조선소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는 그림을 사기 위해 런던에 사무실을 만들고 자주 파리로 가서 그림을 골랐다고 한다. <수련> 역시 모네가 살아 있을 당시 마츠카타가 직접 가서 산 그림으로 그의 열정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일본이 소장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의 컬렉션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삼성가의 기증으로 우리나라도 모네의 수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구매조차 쉽지 않았을 고갱, 샤갈, 미로 달리, 피사로, 르누아르에 이르기까지 서양 근대미술의 소장이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기증은 숭고한 일이다. 자신의 안목과 시간, 막대한 노력을 들여 애써 수집한 소장품을 사회를 위해 내놓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영원히 기억되고, 존경받아 마땅하다.

세기의 기증으로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건희. 홍라희 부부의 컬렉션으로 국내 미술계는 다시 활력을 찾고 있다. 그들의 기증의 가장 큰 의미 중 하나는 빠져있던 컬렉션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엄청난 가격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던 김환기 작가의 작품들과 박수근, 이중섭 작가의 대작들을 기증받음으로써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손영옥 미술평론가의 <이건히. 홍라희. 컬렉션>으로 그들의 컬렉션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와 그들이 사랑한 그림과 작가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시간이었다. 삼성가의 컬렉션을 이해할 가장 흥미로운 도서로 남을 거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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