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 가족 2 - 2세의 귀환 유정천 가족 2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작가정신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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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친구의 오사카 여행의 사진 중에서 유정천 가족의 성지라고 불리는 장소들이 찍혀 있었다. 너구리 가족의 터전인 시모가모 신사와 데마치바시, 이번 유정천 가족의 핵심 인물인 2세가 머물렀던 교토 호텔 오쿠라의 사진까지 책을 읽은 나로서는 반가운 사진들이었다. 물론 친구는 유정천 가족을 알고만 있을 뿐 크게 관심이 없던 터라 관련 사진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현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장소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교토를 배경으로 한 너구리와 텐구 그리고 인간이 그리는 이야기, 유정천 가족 두 번째 이야기인 2세의 귀환에는 아카다마의 아들이 100년 만의 고국의 땅을 밟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번 이야기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환술사 텐마야 흉계와 승려가 된 에비스가와 쿠레이치로의 등장이었다. 소운이 죽음 후 자신의 대에서 시모가모와의 소원한 관계를 해결짓기 위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쿠레이치로. 너무나도 쉽게 두 집안의 원한이 해결될까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역시나 반전이 있었다. 그리고 2권의 타이틀이기도 한 2세의 귀환으로 벌어지는 벤텐과의 대결 또한 흥미로웠다.

인터뷰에서도 저자가 언급했듯이 이 교토 원더랜드의 바탕에는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지배 구조와 착취, 야생동물의 도살과 잘못된 식문화가 깔려있다. 금요 클럽에서 볼 수 있듯이 연말 행사로 자리 잡은 너구리전 골 이야기에는 도물에게 자행하는 폭력이 약자인 인간에 대한 폭력과 착취로 이어질 수 있다며 저자의 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은 추잡하고 무섭다. 눈 뜨고 코베어 가는 세상에서 서로 속고 속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실력을 갈고닦아 '세상만사 속느냐 속이느냐'라고 어중간하게 깨달음을 얻은 인간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덴구들이 험준한 오만의 산에서 침을 뱉고 너구리들이 바보의 평야를 때굴때굴 굴러다니는 동안, 묵묵히 사기 기술을 연마해온 인간들을 얕보면 안 된다."p138

교토를 사랑하는 저자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유정천 가족>은 읽으면 읽을수록 담백함까지 더해지는 소설이었다. 2세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벤텐의 행방과 니세에몬이 된 야이치로가 이끌 너구리계의 미래가 궁금해지는 3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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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정지아 외 지음, 이제창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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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그 가운데에서 바로 서는 법에 혼란을 느꼈다. 어디서 내가 '나'일 수 있으며 내가 '나'이려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생각했다. 목소리를 높이고 내 색깔을 드러낼 때 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으며, 묵묵하고 순할 땐 쏟아지는 탁한 이야기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언젠가부터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의 방향은 옳은 것인지, 다른 이에게는 철없게 보일지도 모를 이 질문의 바탕에는 어쩌면 당연하게 거쳐야 할 인생의 형태는 아닐지 하고 생각하곤 한다. 누군가는, 언젠가는 겪게 되는 녹녹치 않던 인생이라는 벽에 부딪치던 순간을<방황하는 소설>에서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집 '크리스마스 타일'에 수록되었던 <월계동 옥주>에서 주인공 옥주는 가족도, 연인이었던 현우와의 결별 뒤 중국으로의 유학을 선택한다. 술에 취해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하던 옥주에게 중국인 '예후이'의 도움을 받은 옥주는 그녀와 가까워진다. 성적도 좋고 동기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예후이는 자신을 포함한 여러 친구들에게도 중국어 과외를 하고 있었다. 그들과 친해진 옥주는 여름방학을 친구들과 예후이의 고향 집에서 보내기로 하지만 처음부터 여행은 순조롭지 않았다. 꽤 긴 시간을 가야 하는 불편한 기차 안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 생겨난 애정 관계에서도, 모두 자신의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음이 움직이는 곳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나는 변화해 왔다. 인생이란 벽에 부딪혀 답답함에 주저앉아 있을 때도 난 항상 나의 사람들이 있어서, 누군가 내 옆에서 같이 걷고 있었고, 그러지 못할 때는 또 조용히 지금의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언제고 변할 수 있는 유연한 가능성과 희망을 안고, 나는 또 변해 갈 것이다.

"옥주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믿었던 관계가 이렇게 쉽게 어그러지는 것에."p156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불안을 경험한다. 만일 불안으로 고군분투한 적이 있다면, 불안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위압적일 수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긋이 사소한 일이라도 불시에 엄습하는 불안감을 촉발하며, 단순한 일상에서조차도 버둥거리게 만들 수 있다. 창작과 비평 201호에 실렸던 김지연 작가의 <먼바다 쪽으로>의 주인공 현태도 심각한 불안 증세를 가지고 있다. 아파트에 살면서도 집에서 담배를 피우고 크게 소리 내어 기타 치며 노래 부르던 현태에게 종희는 아파트 사람들이 우릴 싫어한다며, 특히 아랫집 남자가 우릴 죽일 거라며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때는 코웃음 치던 현태는 어느 사건을 계기로 아랫집 남자가 정말로 자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도망치듯 시골에서의 생활을 하게 된다.

"돌아보면 꾸준히 나빠지는 선택만을 해 온 것 같았다."라는 종희의 말처럼 불시에 찾아온 불안에서 시작된 선택은 평범했던 삶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오늘도 그거 그런 평범한 하루일 거라는 믿음이 무너지던 날. 언제나 곁에 있을 것 같았던 흔한 일상은 불안정한 삶으로 바뀌어 있었다.

"현태의 불안 증세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종희는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애초에 거짓말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아니, 그건 농담이었다. 매일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현태에게 거실에서 쿵쿵 뛰며 게임을 하는 현태에게, 주말이면 기타를 치는 현태에게, 아파트 사람들이 다 우릴 싫어해, 특히 아랫집 남자가 우릴 죽일 거야,라고 말한 것뿐이었다." p174

최근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수록되었던 <파종>에는 자신의 딸 소리가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소리에 불안해하는 주인공. 학대하는 아버지에게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자신을 보살펴주던 이제는 세상에 없는 오빠의 기억을 떠올린다. 남편과 이혼 후 갈 곳 없는 자신을 아무런 말 없이 받아준 오빠가 가꾸던 텃밭에서 세 사람의 따뜻했던 추억은 글을 읽은 나에게도 잔잔히 스며들었다.

"그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소리가 아이답지 않게 아무것도 조르지 않고 바라지 않는다고 그녀가 자랑하자 그는 말문을 잃었다. 그러더니 소리에게 물었다. 소리는 뭘 먹고 싶어? 소리는 뭘 하고 싶어? 아무거나 괜찮아. 소리가 대답하면 아니, 소리가 진짜 먹고 싶은 거,라며 소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거나는 답이 아니야, 소리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p236

인간의 방황의 언어를 모른다는 것은 '갈대와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옷을 입은 채 바닷물에 빠지는 것도 인생이라며, 마음속에 금기를 갖지 말라 하는 그다음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요하고 심심한 시간에 폭력을 더해 그것을 거저 타파의 대상으로 여기며, 휴대폰을 꺼내어 무언가 찾곤 한다.

어쩌면 우리는 두 가지 오해 속에서 점점 외롭고 우울해지는 것 아닐까. 할 일 없이 심심한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닌, 무언가 하고 있는 게 맞다는 오해. 또 기쁨과 행복만 존재하는 것이 완벽한 마음이라는 오해.

길을 잃지 않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현명한 방법이긴 하지만, 길을 잃는 것 또한 길을 찾는 방법이라는 걸 우리는 잊고 사는 듯하다. 휴대폰만 있으면 누구나 갈 수 있지만, 모두가 모를 때 나만이 아는 그 길은 오직 경험으로 찾게 되는 것 아닐지. 길을 찾는 시간 속에서 길을 잃는 시간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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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데 가끔 뭘 몰라
정원 지음 / 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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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항상 우리 주변에는 차별과 배제가 존재해 왔었다.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 곁에는 차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노키즈존, 인종차별, 주거지차별 등의 문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앞으로의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할지 모르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똑똑한데 가끔 뭘 몰라>에서도 어른들의 차별과 부당함이 담겨 있었다. 점심시간 베트남계 혼혈이었던 하리에게 "하리는 김치도 잘 먹네, 한국 사람 다됐네."라는 말을 남기던 선생님의 시선에서도, 아이들의 출입을 제한하던 베이커리 카페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아이가 한 사람으로서 품격을 지닌 존재로 온전하게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할 사회에 어른 중심의 사회로 변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의 모습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었다.



정원 작가의 작품에서는 오늘날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아이를 키우기 점점 더 위험한 사회가 되었고, 아동을 대하는 가치와 관점에서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사회, 지금 우리 사회의 아동관점은 아직도 비민주적이고 아동정책은 여전히 어른 중심의 사회이다. 아이들은 미래의 주역이란 의무를 위해 지금의 자기 권리를 누리지 모샇고 어른이 시키는 대로 무엇인가를 해야한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성공 여부를 떠나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내가 보기에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혼혈인들은 온전히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동남아나 중국에서 시집 온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인들과 같이 살고 있다. 그들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들도 급격하게 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서 그들은 여전히 소수이고 한국인들 특유의 친화성과 인정, 이러한 사회적 미덕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 나라에 같이 살고 있는 이웃인 국내 혼혈인들에 대해서는 어떤 사회적 시선을 느낄 수 없다.

사회의 특정 이들을 차별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그것도 아아들과 같이 아무런 영향력이 없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배제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때, 그 사회의 어떤 누구도 언젠가 특정한 이유로 차별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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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천 가족 1 유정천 가족 1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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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는 도쿄의 풍경을 좋아한다. 명승지와 교토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식당과 찻집, 꿈을 품고 있는 활기찬 사람들, 그리고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조차 가슴에 스며든다. 단순한 관광지를 벗어나 아날로그 문화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가장 아날로그답다고 인정하는 곳이 바로 교토이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 속에도 아름다운 교토를 배경으로 한다. 흐드러진 벚꽃 속의 신사와 불각, 하얗게 분칠하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게이코, 손님을 태우고 골목을 누비는 인력거도.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교토의 신비함이 베여있다.

"기온 야사카 신사 일대는 완전히 밤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야사카 신사 돌계단 아래부터 시조 길을 따라 요란한 조명이 늘어서 있다. 시조에서 남쪽으로 뻗은 하나미고지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거기서 서쪽으로 벗어나 인적 드문 골목을 걸었다. 큰길에서 벗어난 기온 부근은 한적했다. 내가 자전거 페달을 밝을 때마다 요리집 불빛이 꿈속처럼 흐릿하게 빛나며 뒤로 휙휙 물러섰다." p73

그의 대표 작품인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와 <야행>의 교토의 배경처럼 <유정천 가족> 역시 교토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교토 시모가모 신사 옆 다다스 숲에 사는 시모가모 가문의 삼남 야사부로는 둔갑술에 능한 너구리이다. 그는 너구리계의 위대한 수장이었던 아버지가 인간들에게 잡혀 너구리전골로 생을 마감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쫓으며 인간과 텐구, 너구리가 공존하는 교토의 거리를 활보하며 살아간다.

"큰형은 호랑이 모습에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전통복 차림을 한 젊은 도련님 스타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로등 아래 서있는 나와 동생을 잠시 싸늘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다리 쪽으로 가서 휘익, 하고 휘파람을 크게 불었다. 그러자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자동 인력거가 나타났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큰형의 보물이다. 인력거꾼은 일찍이 교토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자동인형 기술자가 발명한 가짜 인력거꾼인데, 이제는 움직임이 예전만 못하지만 큰형이 아버지의 유물인 그것을 계속 수리하면서 애용하고 있었다." p98

사건의 전개와 모티브로 한 이야기들을 활용하는 방법, 관계 형성 등 사건을 풀어나가는 작가 특유의 재치와 이야기 구성이 눈길을 끈다. 너구리 가족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가족이라는 의미를 되새겨보고, 새로운 것에만 관심을 두던 현대인들에게 아날로그적인 아름다움을 전하려는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과 작별하면서 우리 아버지는 느긋한 그 피를 정확하게 넷으로 나누어 주었다. 큰형은 책임감만 이어받았고, 작은형은 느긋한 성격만 물려받았으며, 동생은 순진함만 물려받았다. 그리고 나는 바보스러움만, 완전히 제각각인 형제들을 이어주는 것은 바다보다 깊은 어머니의 사랑과 위대한 아버지와의 이별이다."p220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 속에는 그가 사랑하는 교토를 향한 마음이 담겨 있다. 오래된 것들이 낡고 시대에 뒤처진 것이 아니라 시간의 힘을 증명하는 것임을, 꿈과 일상이 하나가 된 듯한 교토라는 배경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대체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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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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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삶으로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삶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p451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태어났을 때는 자신의 몸조차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존재로서 철저히 타인에게 의지하여 생존하여야 하며, 이후 점차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간다. 처음부터 타인에게 의존하여 자라기 때문에 타인의 영향을 받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완성시켜 나가는 존재이다. 물론 유전적으로 영향을 받아 개인의 한 부분이 형성되어 있지만 이후 성장 과정에서 타인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인간은 성장해 나간다.

이창래 작가의 여섯 번째 장편 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동양인의 피가 아주 조금 섞이고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가지고 있던 백인 남성의 성장 이야기다. 이 소설은 퐁 로우와 만나 하와이, 홍콩, 마카오 등의 비즈니스 여행으로 보낸 일 년과 그의 연인인 싱글맘 밸과 그의 아들 빅터 주니어를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다.

"흔히 사람들은 순간을 살라고 조언한다. 끊임없이 미래나 과거를 보려 들지 말고, 그 모든 걸 더해 보지도 말고, 현재라는 풍성하게 무르익은 과일을 맛보라고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면 인간은 그 순간에 머물게 된다. 중독자처럼 자신을 속이고 포기해 버린다. 그 모든 달콤함이 썩는 것 외에는 변화도 일으킬 수 없게 될 때까지." p29

친구의 부탁으로 골프 캐디를 하다가 만난 중국계 사업가인 퐁 로우를 만나고 틸러의 좋은 인상에 퐁은 그가 거느리고 있는 여러 가게에서 시식을 하고 평을 남겨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퐁은 틸러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그에게 자신의 사업에 필요한 비즈니스 여행의 동반을 부탁한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퐁과의 여행은 틸러에게 커다란 아픔으로 남는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 퐁에게 모든 것을 맡긴 틸러의 타국에서의 일 년으로 후 틸러는 밸이라는 자신과 전혀 다른 낯선 여자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나는 퐁을 잘 몰랐지만, 그의 말투와 움직임에는 충실함이 있었다. 동네를 자기 마당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로지르는 태도에서 확신이 느껴졌다. 그는 테라스의 갈라진 모든 틈을 새로 피어난 모든 수국 꽃송이를 소유한 듯했다. 흩날리는 나뭇잎 한 장이나 자갈 한 개도 예외 없이 그 모든 게 퐁이라는 사람의 존재 안에 섞여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p65

"오랜만에 처음으로, 나는 완전한 만족감을 느꼈다. 혼자 있었는데도 내가 딱히 내 자리를 찾은 것은 아니라도 최소한 지속적인 상황을 기다리는 동안 새로운 존재 방법을 찾았으니까." p550

이창래 작가의 소설 속에서 그려내는 인물들은 대게 화해롭지 못하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여기에서 인간과 인간의 근본적인 괴리와 최근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직접적인 인간관계 측면이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비대면적이고 개인적인 측면이 늘어나는 방향으로 환경이 변화한 문제, 그로 인해 매우 이기적인 관계만을 추구하거나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는 상처들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렇다.

"나는 핀으로 꽂힌 귀뚜라미였다. 비즈는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말이다. 나는 반박했다. "노력은 했지." 내 노력으로 뭐가 달라진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기서든, 타국에서든 모든 일이 잦아든 지금은 내가 좀 괜찮아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과거의 자도 구동 모드로 전화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그 디폴트 상태의 소년, 그 디폴트 상태의 영혼이 되지 않을 것이다. 피도, 사랑도 묽어진 녀석. 자기의 머릿속에서만 노래를 보를 수 있는 녀석." p685

나의 타국에서의 긴 유학 생활 동안 하던 고민들과 일던 분노, 받은 상처와 고마움 같은 감정들로 무엇이 달라졌을까? 일본어가 서툴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책을 훔친 도둑으로 몰려 몸수색을 받아야 했던 안 좋은 기억도, 형편이 좋지 않은 유학생들에게는 유난히 차갑게 굴던 교수의 구역질 나는 편견, 마지막 학기 학비를 낼 수 없어 귀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나에게 아무런 조건도, 기한도 없이 큰돈을 빌려준 아르바이트 가게의 일본인 점장님의 친절도 지금의 나로 성장하기까지의 하나의 과정이었을까?

삶의 이유와 감각을 잃어버린 타국에서의 일 년을 통해 틸러는 또 다른 타인으로 그것을 회복하려는 변화의 과정을 담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을 형성해 나간다. 인간이란 한없이 연약하고 무른 존재이므로 끊임없이 타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그 되찾을 길 없는 타인과의 유대와 상실이 꼭 비관적이고 슬픈 것만은 아닌 것을, 그 상실 속에 참으로 깊은 인생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성찰해 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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