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다이다이 서점에서
다지리 히사코 지음, 한정윤 옮김 / 니라이카나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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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온라인 서점의 등장으로 많은 서점이 문을 닫았다. 대형 서점의 이점을 넘어설 경쟁력이 없는 작은 동네 서점은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의 보급 이전 도서 황금기와도 같았던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여전히 그때의 추억을 그대로 간칙한 채 수십 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오고 있는 서점들이 존재한다.

"슬슬 연필을 깎아주세요. 쓰기 시작하면 속도가 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같은 책을 만들고 싶어요. 이 카운터석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단편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P67


구마모토의 시내의 뒷골목에 위치한 작은 서점 다이다이 서점은 22년 전, 다지리 씨가 회사를 그만두고 차린 카페 겸 잡화점'orange'의 옆 점포를 빌려 열게 된 서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비밀 낭독회로 더욱 유명해진 이 서점은 아시아 최고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고해정토로 유명한 이시무레 미치코, 사진작가인 가와우치 린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감독 유키사다 이사오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문화 예술계의 유명 인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독특한 서점이다.

편집자 오가와 씨의 부탁으로 쓰게 된 <다이다이 서점에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보통의 사람들이다. '돈치 피클'이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인 우쿨렐레 연주자 돈치씨, 이곳에서 일했었던, 지금은 액세서리를 만들고 있는 치바짱과 노리짱, 재일교포 작가인 강신자 작가와 그 밖에 많은 단골손님들의 이야기는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마음 따뜻해지는 기분 좋은 상상 속으로 이끈다. 그리고 이곳은 단골손님의 부탁으로 피로연이 열리기도 하고, 각종 음악회와 미술 전시회, 심지어 반려동물의 입양처를 찾아주기도 한다.

"여전히 약자의 책만 가득하네."


​다지리 씨가 선택하는 책에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그녀가 선택하는 책들은 미나마타병 환자에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 전쟁의 무수한 피해자, 차별당하고 힘없는 사람들,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을 고른 것이다. 그녀의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시무레 미치코 작가의 작품이 그러하다.(고해정토, 헌등사) 지금도 다지리 씨에게 책을 추천받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일본 전역에서 찾아오고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수만큼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직접 이야기를 듣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알고 싶으니까 읽는다. 입장이 다르면 풍경도 변하기 때문에 모든 입장에서 보고 싶다."


책이라는 매개체로 모인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박한 일상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다지리 씨가 만들어가는 이 서점은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아닌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이어지는 만남의 장소가 아닐까 한다. 그런 정겨움이 가득한 이곳은 오늘도 어김없이 활짝 문을 열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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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데이 파더스 클럽 - 육아일기를 가장한 아빠들의 성장일기
강혁진 외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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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는 엄마가 키워야지."

내가 태어난 80년 대만 하더라도 아이 키우기는 온전히 엄마의 몫이라고 단정 짓고 그녀들이 도맡아왔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여성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육아가 사회적 제도의 개선과 남성들의 인식 변화로 아기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고 키워주는 아빠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더욱이 각종 매스컴에서 아빠의 육아를 다른 프로그램이 많아지며 아빠들도 당연히 육아에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썬데이 파더스 클럽>은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다양한 생각과 에피소드를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건 글이 제격이라는 생각에 모인 5명의 아빠들이 겪게 되는 좌충우돌 육아일기이다. 한 달에 한 번 육아 일기를 남기는 이들은 다양한 연령대, 성별이 다른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들이라 그들의 글은 다양한 사람들과 언론의 주목까지 받으며 화제가 되고 있다.

"여전히 내가 아빠라는 사실이 비현실적이거나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에게는 아빠가 되기 전 40년의 삶이 있다. 아빠로서의 나를 마주하는 것이 가끔 어색한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노력하려고 한다.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함께 웃고 우는 경험을 더 많이 하려고 한다. 더 자주 안아주고, 더 자주 아이 볼에 입 맞추고, 더 자주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한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에 스스로 어색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조금씩, 오랫동안 내 안에 아빠는 단어의 크기를 키워갈 것이다." -34p


계획대로 완벽하게 흘러가는 육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역시 계획에 없는 아이를 가지게 되어 아빠라 불리게 되었고 아빠가 되었다는 현실이 낯설게만 느껴졌었다. 충분하지 않은 경제 사정으로 인해 회사를 쉴 수 없었고 육아 휴직을 사용했을 때 생기는 회사로부터의 불이익 때문에 와이프의 혼자 도맡아 육아를 하는 날이 많았고,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사회제도와 예상치 못한 아이의 건강 악화 등의 문제로 힘든 육아생활을 이어나갔던 것 같다.

"끝끝내 유튜브 2배속 재생 버튼을 누구고야 말았다."

그들의 글에는 아빠로서 공감 가는 내용들이 가득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현실에 자신의 여가 생활시간마저 줄여야 했던 경험,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에게 있어 자신의 생활 패턴은 모두 아이의 시간에 맞춰 돌아가야 하는 현실도, 모든 것이 귀찮고 내 아이의 육아마저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아빠라는 낯선 경험을 쌓아가면서 아이와 함께 자신도 성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에요."

육아를 할 시간에 돈을 많이 벌어 다양한 학습을 통한 경험과 장난감과 같은 물질적인 것으로 만족시켜 줘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다양한 경험을 체험하게 해주는 것도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이와의 시간에 따뜻하게 반응해 주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같이 즐겁게 놀아주는 것이 밝고 따뜻한 긍정적인 아이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들의 말처럼 나 역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많이 사랑한다 말해주고, 더 많이 함께해 주고 싶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더 최선을 다했어야 했는데도 그러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아빠의 육아란 의외로 단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와 함께 진심을 다해 놀아주고 함께 호흡하는 일, 아이를 향한 아낌없는 사랑과 그 사랑을 언제까지나 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육아이지 않을까?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이와의 시간에 부모로서 아이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부모가 됨으로써 가지게 되는 책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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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한의원
이소영 지음 / 사계절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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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오른쪽 손톱을 깍지 못했다. 바로 오른팔에 붙은 유령 때문에!"

살다 보면 한 번쯤은 큰 사고를 당하거나 누군가에 의한 폭행, 작게는 넘어지는 것과 같은 일로 다치게 되어 끔찍한 통증으로 고생했던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개인적 차이는 있겠지만 그 고통은 심리적 트라우마로 남아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초래하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어깨 통증으로 1년 가까이 고생하고 있는 중이다. 병원에서는 뼈와 근육에 이상이 없다고 이상하게도 참기 힘든 통증으로 불편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한국문학을 좋아하다 보니 매달 출간 예정인 한국문학 신작 리스트를 둘러보게 된다. 그러던 중 [알래스카 한의원]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소설을 보게 되었고 출간 전 영화 판권 계약이 완료된 책이라는 점에서 더욱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진 리터칭 작업을 하는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이지는 얼마 전 자신의 선배이자, 회사 대표인 박대표의 강아지를 산책 시키던 중 불법 콜택시에 오른팔이 치이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병원으로 실려간 이지는 여러 검사를 받았지만 타박상 외에는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받게 되지만 오른쪽 팔에는 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이후 여러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했지만 통증은 여전했고 그것은 의학적으로 명확한 치료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복합통증 증후군'이었다. 불행은 연속으로 온다고, 통증으로 인해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지는 회사에서 해고까지 당하게 된다.

"호르몬과 신경 전달 세포들이 어떤 고통을 기억했다가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음에도, 작은 자극에라도 노출되면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다."

치료를 위한 검색 도중 우연히 '싱잉볼 치유 모임'을 알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헬로키티 가면을 쓴 소녀에게 알래스카에 있는 한의원에서 복합통증 증후군을 치료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지는 알래스카에 있는 한의원에 바로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한의사 고담이었고 그에게서 자신은 치료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지만 치료한 적은 없다는 말을 들려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이지는 무작정 알래스카의 한의원으로 떠나게 된다.

"내가 아는 이누이트가 있는데, 이 땅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부족에 따르면 가장 좋은 죽음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면서 죽는 거래요. 그래야 다음 생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고통스러운 감정과 마주한다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가슴 깊이 숨겨둔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시간이라는 간이 처방으로 엷어지게 할 수는 있어도 사라지게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약한 존재. 인생 전부를 걸고라도 자신의 상처와 마주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값진 삶이지 않을까?

오랫동안 시나리오 작업을 해온 이소영 작가라서 그런지 공간과 인물들이 상상이 되는 디테일을 가진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만났고, 그런 경험들도 이 소설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알래스카를 배경으로 이지를 둘러싼 인물들이 펼지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 호두앤유픽쳐스에서 준비 중이라는데 이지가 걸었던 트랩 라인 안쪽의 경이로운 대자연의 풍경을 어떻게 표현할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언제 상영될지 모르는 영화를 기다리게 만드는 오랜만에 가슴 따뜻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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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이터 - 디베이팅 세계 챔피언 서보현의 하버드 토론 수업
서보현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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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은 내가 나의 목소리를 내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었다."

살아오면서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서로의 의견에 대한 의견 충돌을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서로의 옳고 그름을 떠나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자신의 의견을 인정하게 만드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런 수많은 논쟁의 순간들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을 순수히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 토론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디베이팅 챔피언이자 세계 최우수 토론팀 코치를 역임한 서보현 저자의 디베이터는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합리적인 말하기 기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를 제패한 디베이팅 챔피언의 말 하기 기술이라는 말에 큰 호기심을 느끼며 읽기 시작했다.

남들의 눈에 띄기를 수줍어하는 소년이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되고 외국이라는 낯선 곳의 문화와 언어에 힘들어하며 또래 아이들과 갈등에서도 침묵하고 피하기만 하는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 그런 삶을 180도 바꿔줄 일이 생기는 그것은 교내 토론팀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토론과 함께 성장한 유년에 기억을 되짚어가며 그가 느끼고 배운 토론에 대한 전반적인 기술에 대해 써 내려가고 있다.

"나는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거나 주장에 대한 깊은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고, 논쟁적인 의제들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밝혀보는 일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토론은 단순한 서로의 정보교환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찬반이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는 주제를 가지고 편을 나누어 논리적 근거를 통해 정해진 시간 안에 질문하고, 반박하며, 마지막에는 설득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짧은 시간 안에 논리적 근거를 입각하여 발표해야 하는 고도의 집중력 향상과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공감 능력에도 도움이 되므로 제대로 훈련만 받게 된다면 일반적인 학습에도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토론과 지적 양가감정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의 관점이 진정한 반대에 직면했을 때 우리에게는 더 강력하게 주장하거나 아예 포기하는 선택지만 있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해서 제3의 길을 찾아내는 방법도 있다. 교육 도구로서 토론이 지닌 또 다른 측면이다.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지속해나갈 수만 있다면, 토론은 우리에게 꾸준히 서로에게 배워나가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하지만 토론의 교육적 효과가 충분히 입증되었음에도 아직 국내에서는 쉽게 다가서기 힘든 실정이다. 아직까지 토론을 통한 학습이라는 것 자체가 낯설고 이를 제대로 가르칠 지도자의 수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정 주제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이라는 소수의 활동을 떠나 일상의 모든 상황에 적용되어 갈등 상황에서 더욱 나아가 세상을 바꿔나가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는 저자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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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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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가?

<연기 인간>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알도 팔라체스키의 작품이다. 그를 알고 있는 독자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아마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탈리아 작가일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인 1911년에 이 작품을 처음 세상에 출간하였지만 이후 다섯 차례나 개정판을 출간했다. 소설 '광장'에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최인훈 작가가 수차례나 개정판을 출간한 것처럼 그 역시 이 작품에 큰 애정을 품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환상적인 존재로 인간 사회의 허황되고, 독단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의 광기를 신랄하게 풍자한 이 소설은 20세기 초 이탈리아 미래파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연극의 형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작가의 서술보다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연극의 사건 진행 방식처럼 복합적인데, 그것은 한 개의 사건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호 관련된 사건들을 제시한다. 복잡해 보이는 대화지만 의외로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은 마치 한 편의 연극 장면을 보는 듯해서 '연극 소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봣지만 다 알고 있었지요.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 사람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사물의 이름을 다는 알지 못해도, 그 이름에 상응하는 사물이 어떤 건지 알지는 못해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봐야만 했지요."

 

 

페나, 레테, 라마라는 세 명의 노부인이 피운 불에서 생겨난 그는 굴뚝 안에서 33년을 지내며 그녀들의 대화를 들으며 만들어진다. 어느 날 노부인들의 대화가 중단되자 3일을 기다렸다가 굴뚝 밖으로 나와 도시로 내려오게 된다. 그에게는 세 명의 노부인의 이름 앞 글자를 따서 '페렐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의 신비스러운 모습과 특별한 분위기는 모든 이들을 사로잡았고 왕의 귀에까지 그의 존재는 알려져 왕궁으로 초대받게 된다. 왕은 그에게 새로운 법전의 집필을 맡겼고 그는 법전 집필을 위한 시찰을 하게 된다. 시찰에서 돌아왔을 때 궁정 하인장 알로로가 페레라처럼 될 수 있다며 자기 몸을 불태워 죽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페렐라는 알로로의 죽음이 자신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던 거라고 대답하게 된다. 알로로의 죽음을 가볍게 정의하는 그의 무관심에 분개한 사람들은 이때부터 페렐라를 향한 여론은 정 반대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연기 인간>을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굴뚝에서의 33년이라는 시간은 예수가 이 세상에 머무른 33년을 의미한다. 인간 세상의 모든 죄악의 용서를 위해 재림한 예수처럼 페렐라의 33년의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를 만난 11명의 여인 들 중 유일하게 그의 편에 서서 끝까지 그를 변호하려 했던 올리바 디 벨론다 후작부인은 예수의 삶에 큰 안식을 안겨 주었던 마리아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인간 본성의 악한 면을 겪고서도 인간의 곁으로 돌아와 법전을 남기고 사라진 페렐라는 창조주임에도 피조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을 의미한다.

 

"페렐라 씨, 왕이 죽으면 가장 부유한 시민이 왕좌에 오른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나라의 금고에 금을 가장 많이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이 새로운 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들을 삶의 진리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악덕을 자행해 왔다. 그런 인간의 내면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잔인하고 비열하며 허황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인간의 우스꽝스럽고 비정상적이고 역설적인 모든 위선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는 <연기 인간>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가?"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다.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운 온갖 잔혹한 행위들이 과연 진정한 가치를 위해 행해진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 사회의 안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에 지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의 표지 일러스트는 오픈 AI가 개발한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시스템 DALL.E 2를 활용했다고 한다. 최근 AI의 활용을 이용한 여러 창작물들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작품 역시 AI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로 100년 전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재치 있고 기발한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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