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 인간 - 좋아하는 마음에서 더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정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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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그저 그런 지루한 삶을 살았다고 불평해대도 모든 순간이 예측한 대로 흘러가는 이는 없을 것이다. 기대와 어긋난 순간의 마주침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못내 불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소나기가 항상 미운 것은 아닌 것처럼, 그 당혹스러운 마주침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출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은 낯선 환경으로의 끊임없는 환승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낯선 환경에 발을 딛고 선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익숙한 모든 풍경을 등져야 하는 일이고, 낯선 시선을 한몸에 받아야 하는 일이다. 겨우 그 위에 발을 딛고 선다 해도,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처음 보는 건물과 거리, 사람과 시선, 모든 것이 한 사람 외부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낯선 환경에 발을 딛는 일을 꿈꿀 때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는 왜 낯선 곳에 가는 일에 가슴이 뛰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우리가 매일 겪는 하루는 같아 보이지만 실은 다른 것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일상이라는 이름에 가려졌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낯선 플랫폼을 밟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은 모두 다 매일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는 여행자인 것. 낯선 환경으로의 환승은 운명이고 본능이다.

"환승하는 삶.

환승할 수밖에 없는 삶.

좋아하는 것에서 좋아하는 것으로 환승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좋아해야만 하는 것을 만들고 좋아하게 만들어야 살아지는 삶도 있다. 마음과 사랑이라는 것을 손쉽게 쓰지만 사실 요즘은 그런 것마저 만들어내야만 견딜 수 있는 삶도 많다고 느낀다. 그런 삶의 환승의 수가 빈번하게 높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무수한 환승을 경험하면서도 순간 나 자신의 바깥에 놓인 삶에는 또 한 번 무감했던 것 같다." - 프롤로그

그동안 효율적인 삶을 교육받아왔고, 때론 강요당했고, 그렇게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가능한 더 빠르게, 가능한 더 많이, 질이 안 되면 양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배웠다. 그래서일까, 효율적인 삶과 속도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방향을 쉽게 잃었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그래서 속이 비어버린 사람. 깊이가 없는 껍데기를 부여잡고 올 수밖에 없었다.

한정현 작가의 <환승 인간>에서는 오롯이 자신으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해왔던 수많은 환승들을 통해 삶에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사랑에 대한 단상도, 생각지도 못한 유학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느낀 삶에 대해서도, 그녀가 좋아하는 문학, 영화를 통해 작가 한정현으로의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진정 원하는 삶을 위하여 무수한 환승과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모든 진심이자 진실이다"라는 선언이었다. 그건 내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자꾸만 자주 휘발되는 가치에 관한 것, 내가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나가는 시간에 의해 가치 없음이 되어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소설 속에서 지켜보고자 했던 나. 여전히 내 아에서 가치로 남겨져 있지만 타인들에 의해 무가치해지는 무언가에 대해 써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쓴 "이제 가자, 아키코"라는 문장은 내 인생의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려는 마음이었다." - 이제 가자 아키코 중에서

수많은 인생의 환승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경험적 근거를 바탕으로 단언한다.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각각 살아온 인생에 따라, 각자 다른 눈으로 목격한 세상에 따라, 그리고 각자 온몸으로 느꼈던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발현된다.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내 삶의 형편에 따라, 또 누구와 함께했으며,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왔는가에 따라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삶의 희로애락, 온전히 나만이 느낄 수 있고,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 의미를 어떻게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생을 찬탄하고 긍정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다. 하루를 버티고 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해 나가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내가 나로 산다는 것이 조금 미안하고, 많이 불편하지만 수심을 알 수 없는 검은 밤바다가 있고, 태양을 품은 뜨거운 아침의 금빛 바다가 있듯 각자의 삶이 수시로 변화는 일들로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닐까? 남들은 발견할 수 없는 커다란 돌비석 하나를 가슴에 묻고 생의 끝까지 그것을 지표 삼아 걷는 일. 그 끝이 희망이 되는 일로 여기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희망이 야박하더라도 우리는 힘을 내어 끊임없이 환승하며 돌비석으로 나아가는 일. 만약 벼랑 끝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웃을 수 있는 삶으로.

모든 것이 변화고 새로운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그 환승의 갈림길에서 각자의 꿈이라던가 작은 희망 같은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마음 한구석에 세워 놓고 살아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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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위드 X 창비교육 성장소설 9
권여름 외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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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의 계절이다.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밤 펼친 공포 소설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마른 자국엔 서늘함까지 느껴진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사위에 위화감을 느껴 괜스레 두리번거린다. 80~90년대만 하더라도 여름철 극장가의 주연은 공포 영화였다. 지금은 그 자리를 블록버스터가 꿰차고 있다. 물론 제작비 대비 흥행 신화를 쓴 소수의 화제작들이 호러 영화 명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서점가는 다르다. 절대적인 수는 많지 않아도 탄탄한 장르문학의 독자층은 좋은 작품들이 꾸준히 출간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지난해 출간된 전체 소설 분야 도서 중 3.1%가 추리, 공포, 스릴러, 미스터리 소설로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왜 사람들은 호러 소설에 매료될까. 특히 학교 괴담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은 어느 나라에서든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아이들의 첫 집단생활의 규칙, 규율 및 학습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여, 입학을 앞두고 아이의 긴장과 불안이 서려 있는 곳. 이곳에서의 생활 중 이상한 일 한두 개쯤은 일어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스터디 위드 X>는 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단편으로 어쩌면 표제가 되는 <스터디 위드 미>에서는 자신의 공부하는 모습을 유튜브에 업로드하는 전교 1등 '수아'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주인공. 언젠가부터 수아의 영상에서 정체 모를 두 명의 귀신이 찍히게 되고 수아는 점점 야위어간다.

집단 괴롭힘과 학교 폭력으로 고통받던 '준우'는 그를 괴롭히던 강병세에게 벗어나려 집에서 꽤 멀리 있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입학 첫날 교과서를 받던 곳에서 상현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들은 빠르게 친해져갔다. 어느 날 상현은 준우를 괴롭히던 녀석들에게 복수할 방법이 있다며 그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고 하고 준우를 괴롭히던 녀석들은 한 번 들어오면 두 번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카톡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독특한 소재의 <카톡 감옥>.

<벗어나고 싶어서>에는 윤재는 수업 중에 교사인 미진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마지못해 미진은 학창 시절 때 만났던 친구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전학 간 학교에서의 첫날에 자신에게 다가와 도시락을 같이 먹자던 '우리' 뚱뚱하지도 않는데 방울토마토만을 가져와 점심을 먹고는 자신을 돼지라고 칭하는 이 아이에게는 어떤 사연이 가지고 있는 걸까.

<영고1830>은 지역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 영고에 주인공 희준은 진학하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재직 중이던 학교인 영고에서는 괴담이 존재했는데 매년 1학년 8반 30번에게 불행이 닥치기 때문이다. 중간만 하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공부해 보지만 성적순으로 번호가 매겨지던 영고에서 최하위 등수인 1학년 8반 30번이 되고 만다.

<그런 애>에서는 예나의 가장 친한 친구 솔희는 배우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SNS에 노출이 심한 사진을 올리게 되고 학교 친구들로부터 조롱 받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 날 예나는 학교 뒤편 소원을 들어 준다는 구덩이에서 솔희의 USB를 발견하게 된다.

<하수구 아이>에서는 학교 후문 하수구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는데 주인공이 초등학교 때 '하수구 아이'라고 불렸던 친구를 떠올리게 되고 속마음까지 털어놓았던 친한 친구였지만 주위의 시선과 친구들의 놀림으로 인해 모른 척 방관하게 되는데 잊고 지냈던 그 아이와의 관계를 떠올리며 숨기고 싶었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성적으로 인한 스트레스 다가왔었던 학창 시절의 꿈을 꾸곤 한다. 가까운 친구들과의 입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 바둥되던 고교 시절의 꿈을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때의 스트레스를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면서 가장 혹독했던 그 시절 가슴 설레며 친구들과 함께 듣던 추억의 괴담들.

가장 익숙한 공간이자 누구나 거쳐가는 곳 학교라는 공간에서 오싹한 괴담들의 소재가 변화고 있다. 단순 귀신의 등장이 아닌 경쟁 교육과 학교 폭력으로 인한 시기와 복수라는 소재가 늘고 있다. 경쟁 교육은 학생들에게 위선적, 가식적 태도를 심어 주며 그에 따라 학생들의 호전성도 증대된다. 나아가 폐쇄적,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심어준다. 친구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고립적으로 살아가며 그런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의 문제로 우리를 자멸케 할 수 있다. 지나친 경쟁 교육의 폐단을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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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하는 소설 - 미디어로 만나는 우리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김애란 외 지음, 배우리.김보경.윤제영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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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미디어란 생활의 필수재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우리의 일상 곳곳에 미디어가 스며들어 있다. 미디어는 모든 정보의 원천이자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셜미디어 중독, 사이버불링, 가짜 뉴스 등 악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결국 이 문명의 도구를 어떻게 다룰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로부터 건네받은 불로 문명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 불의 힘으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불을 선물 받은 우리 역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반드시 고민해 보아야 한다.

우리 삶에서 유용한 도구가 되어 준 것들은 어느 것이든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 미디어의 기반이 되고 있는 인터넷도 편리함 이상으로 많은 악영향을 낳고 있다. 즐겁고 유익한 콘텐츠뿐 아니라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도 넘쳐난다. 특히 SNS는 인간관계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인신공격과 혐오 표현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우리 삶 곳곳에 뿌리내린 인터넷을 외면할 수 있을까? 통제하고 막는 것만이 능사일까?

<연결하는 소설>은 김애란, 구소현, 오소영, 서이제, 김혜지, 임현석, 김보영, 전혜진까지 일상의 소통을 의미하는 미디어를 주제로 한 단편들을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은 미디어의 탄생으로 인해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것들 중 일부분을 표현하고 있다. 그 중 개인적으로 와닿은 세 편의 소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문을 장식하고 있는 소설은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김애란 작가의 <침묵의 미래>는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생성과 그 사멸의 과정을 인간 자신의 운명처럼 그려내고 있는 일종의 관념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라져 가는 언어의 마지막 화자들을 전시한 '소수 언어 박물관'이라는 독특한 배경을 이 소설은 지금까지 김애란 작가가 보여주었던 매력적이고 견고한 이야기체의 구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관념적 세계를 내보이는 듯한 뜻밖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종족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는 언어, 그리고 공포스럽게 찾아오는 침묵의 미래는 절대적으로 외롭고 고독하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되는 소멸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0%를 향하여>를 특이한 문체로 적응이 힘들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읽게 만드는 마법같은 매력을 가진 서이제 작가. <연결하는 소설>을 구성하는 작가 중 가장 주제와 어울리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단편<위시리스트>는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어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알라딘 위시리스트에는 몇 백만원치의 책을 담아두는 자신을 돌아보며 결국 끊임없이 채워가는 행위란 오늘날의 필연적인 질병 '저장 강박'이 아닐까. 물건의 소유 여부가 내 존재를 빛나게 한다고 믿고 있는 현대인들이 소유욕에 대해 사유할 의미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임현석 작가의 <무료나눔 대화법> 역시 일상 생활에서 널리 이용되는 중고거래 어플의 사용으로 자신의 편견에 변화가 생긴다는 내용이다. 자신의 조건에서 어긋난 불편하고 피하고 싶었던 대화를 해오던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편협했던 자신의 사고를 돌아보며 비로소 타인과의 대화를 이어나간다. 급격하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개성에 대해 존중과 이해야 말로 타인을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임을 깨닫는 하는 소설이었다.

근대에는 언어를 습득하는 능력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기본 소양이었다면, 이제는 미디어 환경을 전방위적으로 이해하고 맥락을 파악하며 비언어적 요소를 캐치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해졌다. 미디어는 이제 지식과 정보를 매개하는 중요한 도구가 됐다. 언어라는 미디어의 본질에서 파생된 수많은 미디어 속에서 함께 살아갈 사회 구성원들간에 지켜져야 할 미디어의 무게와 중요성을 생각하며 미디어로 전달되는 내용의 의미를 정확하게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참된 쓰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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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들
진하리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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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게 지내며 정이 들어 사촌과 다를 바 없는 가까운 이웃을 '이웃사촌'이라 한다. 이 말속에는 이웃은 사촌처럼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규범적, 윤리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한곳에 머물러 토지를 경작하며 생활하던 농경사회에서는 이웃 간의 협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이러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오늘날은 아파트가 보편화되면서 주거형태도 이동성이 높은 사회로 변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 곳에만 평생 살지 않는다. 유목민은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좋은 목초지를 찾아 이동생활을 하듯 오늘날 사람들도 일과 직장 재산 증식 등 주가가치, 교통, 문화 환경 등의 다양한 이유에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 살기 때문에 평생을 함께 해왔던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진하리 소설가의 첫 번째 소설집 <이웃들>은 가깝게 지내는 친구, 이웃, 가족 간의 내비치는 심리를 섬세하게 소설로 심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6편의 단편은 <휴가> 제외하고는 모두 연작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는 주제의식을 생각하면 모두 같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남들과 다른 소수자를 질시하고 배척하는 자신의 편협함을 정의감으로 포장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이해관계로 얽혀 서로에게 예의는 갖추지만 정있는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냉정한 관계.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이름뿐인 다정한 이웃들은 동일한 세계관 안에서 때로는 주연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은 서정인 작가의 '원무'와도 닮아 있다.

어쩌면 이해관계로 묶인 타인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피로 연결된 가족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휴가>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주의 시선에서 본 가족들은 화목한 것처럼 보이지만 준왕이 두 살이던 해에 단체 가족 휴가에서 준왕의 누나 준희의 죽음을 중심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있었다. 진실을 알고 있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모른 척 살아가는 가족들 역시 타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예증하고 있다.

신인 작가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탄탄하면서 섬세한 심리묘사는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손홍규 소설가의 말처럼 이토록 무시무시해도 되는 걸까. 나 역시 진하리라는 이름을 결코 잊지 못하게 될 것 같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 사회의 여러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며 이것은 소설 속의 중산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지금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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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악녀 이야기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시부사와 다쓰히코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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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를 떠올리며 신약성서 마가복음 6장 17~29절에 기록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가 떠오른다. 헤롯 왕이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요한은 이를 유대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비난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이려 했지만 선지자로 추앙받던 요한을 두려워한 헤롯의 반대로 죽이지 못한다. 요한의 죽임만을 생각하던 어느 날, 헤롯의 생일이 되어 연회가 벌어졌을 때 헤로디아가 어린 딸 살로메를 불러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게 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였고, 같이 크게 기뻐했던 헤롯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맹세를 하게 된다.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은 살로메는 요한의 목을 원했고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던 헤롯은 결국 요한을 참수하고 만다.

성경에서의 살로메는 어머니인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고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과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서는 요한에게 반해 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헤롯을 유혹하는 팜 파탈로 묘사되고 있다.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악녀란 어떤 존재들일까? 시부사와 다쓰히코가 정의한 문고판 후기를 보면 악녀란 "미모와 권력을 가지고 악의 극한까지 간 여성, 혹은 애욕과 범죄로 스스로를 망가뜨린 여성이라고 칭하고 있다. 악녀를 칭하는 기준 정확히 구분 짓기는 힘들지만 후세에 오래 전해질 만큼의 강한 인상을 남기며 남성의 운명을 더 나아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악행을 저지른 여성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동, 서양을 합쳐 12명을 선정해 소개하고 있다. 루크레치아 보르자 엘리자베스 여왕, 메리 스튜어트, 마리 앙투아네트, 클레오파트라, 측천무후 등 다양한 시대와 국가의 여성의 삶을 그만의 스타일로 풀어내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였고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다는 매리 스튜어트를 둘러싼 얽힌 비극적인 비운의 삶과 폭군 네로의 어머니로서 그의 인생 전반부를 공포로 지배했던 아그리피나와 남존여비 봉건사회에서 일개 여성이 지존의 자리에 올라 모든 남자들의 무릎을 굻게 만들었던 측천무후의 이야기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극단적인 로맨티시스트 기질을 지닌 메리라는 이름의 이 여성을 과연 '악녀'라고 불러야 할지 무척이나 의문스럽다. 어떤 사람은 그녀를 순교자로 찬미하고, 어떤 사람은 그녀를 남편을 살해한 음탕한 여성이라고 비난한다. 많은 역사가나 시인에게 이토록 다양하게 묘사되는 여인도 드물 것이다. p78

대부분의 전제군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그리피나 역시 자신의 지위가 언제든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신음했다. 황제에게는 메살리나가 낳은 브리타니쿠스라는 적자가 존재했다. 아그리피나의 친아들 네로는 황제에게는 남의 자식이나 매한가지였다. 장래에 대한 그녀의 불안감이 싹을 틔우고 있었던 이유다. p136

무후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강인한 의지력과 정치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미신에 대한 맹신이 존재하던 시대에 미륵의 화신이라느니, 주 왕실의 자손이라느니 하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감쪽같이 미혹시켰기 때문이다. 화려한 의식이나 사원 건립도 보기에 따라서는 백성을 홀리는 선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예상을 뛰어넘은 효력을 발휘해 결국 그녀는 전대미문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p198

때로는 개혁의 주체로 때로는 정의의 집행자로 번번이 자행돼온 극단적인 행동들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간이 문명을 이룬 이래 계속해서 나타난 수많은 폭정의 밑바탕에는 무엇이 깔려 있을까? 지금까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행해야 했던 수많은 정치적 행위들의 밑바탕에는 자신들 이외의 사람은 새로운 세상과 함께할 수 없는 정화의 대상일 뿐이다.

저자가 풀어내고 있는 악녀들은 찬미와 증오를 동시에 받고 있으며 저자 또한 여전히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단순 선과 악의 개념을 초월해 한 시대를 뒤흔든 여성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껴졌던 건 권력이 갖는 양면성인 것인가? 인간에게 권력욕이 있는 한 폭정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권력자는 잠재적인 폭군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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