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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단어들
이적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평점 :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며 들떠있는 마음도 과장된 언어들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세상의 아름다운 말들이 많지만 인생에 잘 물든 말의 빛깔은 더욱 아름답다. 그 빛깔 속에는 분명 삶의 빛깔을 충분히 머금은 시간이 들어 있다. 나이 듦은 소멸이 아니라 고요한 열정으로 일구어낸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는 과정이 아닐까. 젊었을 때 끓는 열정으로 살아간 그는 오래도록 숙성되어 빚어지는 고요한 열정으로 느껴졌다.
그의 산문집 <이적의 단어들>을 펼쳤을 때의 느낌이다. 그의 짧지 않은 인생에서 묻어나는 삶의 다채로운 빛깔들은 우리네 인생 한구석을 관통하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경이로운 순간들, 소름 끼치는 순간들, 공포스러운 순간들은 그가 고른 101개의 낱말에서 파생되는 놀라울 정도로 재치 있는 위트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어폰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한 등산객 목에 걸린 휴대전화 스피커에서 음악이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보기 싫은 건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지만 듣기 싫은 건 고개를 돌려봐야 피할 방도가 없다. 혹시 이어폰이란 게 발명된 걸 아직 모르나 싶어 가방 속 내 것이라도 건네줄까 하다가, 이어폰 끼면 경적 소리를 못들어 위험하다며 음악을 스피커 최고 볼륨으로 틀어놓고 달리던 자전거 라이더가 생각나, 그냥 살포시 내 귀에 꽂기로 한다. 이럴 때 이어폰은 귀마개이지 마스크. 유해한 것들로부터 내 몸은 내가 지킬 수밖에.
눈사람
A씨는 폭설이 내린 다음 날 남자친구와 거리를 걷다가, 길가에 놓인 아담한 눈사람을 사정없이 걷어차며 크게 웃는 남자친구를 보고, 결별을 결심했다.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았다. 저 귀여운 눈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부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소름 끼쳤으며, 뭐 이런 장난 가지고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느냐는 듯 이죽거리는 눈빛이 역겨웠다. 눈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면 동물을 학대할 수 있고 마침내 폭력은 자신을 향할 거라는 공포도 입에 담지 않았다. 단지 둘의 사이가 더 깊어지기 전에 큰 눈이 와준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눈물
오래전, 정말 즐거운 술자리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던 친구가 있었다. 다들 놀라 우냐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했다.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언제 또 올수 있을까, 다시 오긴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걱정도 팔자다." "우리 인생, 시작에 불과하다." 소리치면서 건배를 했지만, 이제는 안다. 그 눈물에 일리가 있었음을. 20대 젊은이를 감상에 빠지게 한 것은 취기였겠지만, 그 너머엔 삶의 유한성에 대한 정신 번쩍 나는 깨달음이 있었다는 것을.
일상의 순간 속에서 마주친, 그 경이로운 이야기들
이적의 노래, 소설, 사설, 지금의 산문까지 읽다 보면 그의 관점이 얼마나 독특한지 알게 된다. 어떻게 이런 사유가 가능한 걸까? 소름 돋을 만큼 놀라운 상상력과 생각이 깊이를 느끼게 된다. 무심코 지나치는 순간의 기록들은 이적 고유의 리듬과 특별한 상상력이 제약 없이 발휘되어 매력적이다. 그리고 예술계에 몸담아온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이 어떤 것에서 영감을 얻고 창조력을 키웠는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독특한 산문집인 것이다.
그의 주옥같은 기록물들 속에 녹아 있는 독특한 관찰법과 사유 방법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산문집에 담긴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얻어지는 인생의 이야기로 하나하나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경이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일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적의 단어들> 속에 녹아 있는 인생의 흔적들이 담고 있는 통찰과 위트를 즐기고 그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