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 개정판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여기 무언가 나쁜 일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클로에. 두 딸과 남편이랑 행복하게 사는 줄만 알았는데 남편이 다른 여자와 떠나자, 그녀는 제 인생을 '싸구려 인생'이라 부르며 분노와 상심에 빠져 있다. 그녀의 시아버지 피에르는 며느리를 위로해주겠다며 낡은 시골집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그가 아내, 쉬잔보다 더 사랑했던 여인, 마틸드에 대해 털어놓는다. 




아내이자 며느리인 클로에의 입장에서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외도한 것에 불과하지만, 두 남자의 입장에서는 아내보다 더 사랑하는 "진짜 사랑"을 뒤늦게 만난 것이다. 너무 늦게 찾아온 사랑을 결국 지나치고만 시아버지는 그래서 불행했고, 주변 사람들의 행복도 망쳤다고 말한다. 사랑을 버리고, '행복이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 대가'는 평생의 후회와 '더욱 슬퍼진 삶'이라며. 시아버지는 그 여인을 알기 전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와 헤어진 후에는 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며느리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남편의 외도에 상심해 '도어 뷰어를 통해 문밖을 보며, 절대 문을 열지 않고 살겠다'는 내 아들에게 과분한 며느리에게 시아버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행복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이 행복, 특히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지금 이 순간 응당 누려야 할 행복을 유예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자기 자신이 될 용기를 갖고, 행복하게 살겠다고 결심'하라 말한다. 클로에도 알듯이 이미 남편이 '배를 묶어둔 밧줄'을 풀고 떠난 이상, 텅 빈 항구는 아무 소용이 없다.




호텔 방에서 피에르를 기다리던 마틸드는 그와 하고 싶은 일들을 기억나는 대로 써 내려 갔다. '사랑하는 이와 소풍을 가고, 춤을 추고, 신문을 읽으며, 지하철을 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공연히 상대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고, 날 여전히 사랑하냐고 물어보는 것 등....' 마틸드는 피에르와 하고 싶은 일이 이토록 많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건, 하지 못한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말. 피에르는 그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망가뜨릴 용기가 없었던 대가로 '단골 치즈 가게와 정육점 때문에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여자'와 계속 함께 살면서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하며 후회한다. 피에르는 시아버지의 입장이 아니라, 더 오래 산 사람으로서 바로 그 점을 며느리에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피에르가 어렸을 때 그의 대고모는 그가 '가보지 않은 산들을 그리워한다'며 아버지를 닮은 아이라 말했다. 피에르 역시 자신은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하기보다 꿈을 꾸거나 동경하는 것이 더 좋았다고 한다. 적당히 타협해 살면, 피에르처럼 후회는 하며 살되 일상을 지킬 수 있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Stoner)』에서 캐서린을 사랑하면서도 붙잡지 않은 스토너가 그랬고,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Our Souls at Night)』에서 타마라를 사랑한 루이스가 그랬고,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에서 고작 4일을 함께한 로버트 킨케이드를 평생 그리워한 프란체스카가 그런 것처럼. 전도연과 공유가 주연을 맡은 영화 <남과 여>에서 차 열쇠를 쥐고 뛰쳐나온 기홍(공유)이 결국 상민(전도연)을 모른 척한 것처럼. 기홍은 피에르처럼 남은 평생을 후회하며 살 테다. 우디 앨런 감독의 <카페 소사이어티(Cafe Society)>도 남과 여의 입장만 다르지, 역시 동일하다. 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다음 일"은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다음 일"을 짐작할 수조차 없거나 설령 짐작하더라도 감당할 용기가 없다.




아빠와 함께 갓 구운 바게트를 사 오던 피에르의 어린 딸은 지금 당장 고소한 꽁다리를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무심한 아빠는 참았다가 집에 가서 먹으라며 거절한다. 지금 바로 한 입 베어 물 수만 있다면 그것은 딸에게 행복이고, 바게트를 손에 쥐고서도 먹지 말고 참아야 한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닌 것, 말 그대로 불행(不幸)인 것을. 피에르는 어린 딸을 보면서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중요하다고 깨닫는다.




사랑하는 남자와 두 아이를 낳고 살다가도, 어느 겨울날 아침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며 "미안해, 내가 실수를 했어"라고 말하고 떠나버리는 것, 그게 인생이라 말하는 안나 가발다의 글은 고통스럽다. 전화를 잘못 걸어온 사람이 잘못 걸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괜찮아요" 뿐이라는 그녀의 글은 더없이 불편하다. 인생이란 게 한낱 비눗방울에 불과하다는 그 서러운 사실을 너무도 태연히 말하는 그녀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클로에이자 피에르, 또 마틸드의 입장에서 사랑과 행복, 더 나아가 인생을 조망해볼 수 있다는 건, 특권이다. 바게트와 와인을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고.






인상적인 대목

인상적인 대목이 참 많은데, 마틸드와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던 피에르가 잠시 얘기를 끊고 클로에에게 춥냐고 묻던 대목도 그중 하나다. 


"아버님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요······." 

"아직도 춥니?"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p. 148



처음 이들이 시골집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춥고, 어둡고(갑자기 정전된다거나), 위험하다고까지 느껴지던 낯선 이곳은 둘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온기를 찾아간다. 시아버지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고 난 후의 클로에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차가운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던 시골집이 온기를 찾아가는 것처럼, 클로에 역시 이제 더는 춥지 않고 괜찮아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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