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비서들 - 상위 1%의 눈먼 돈 좀 털어먹은 멋진 언니들
카밀 페리 지음, 김고명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뉴욕대를 졸업하고 가까스로 학자금 대출을 갚아나가는 30세 '흙수저' 티나 폰타나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졸업 후 6년째 미디어 재벌 로버트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데 악덕 사업가로 알려진 그는 유독 그녀를 신임한다. 어느 날 로버트의 전용기에 문제가 생겨, 티나는 급히 자신의 신용카드로 그의 비행기 좌석을 예약하는데 결제 금액이 취소된 후에 실수로 환급까지 받게 된다. 환급 받은 2만 달러 짜리 수표를 기념 촬영하던 티나는 계좌로 자동입금된 수표를 보고, 충동적으로 학자금 전액 상환 버튼을 누르고 만다. 하지만 곧 경영관리팀 비서, 에밀리 존슨이 이를 발각하고 자신의 학자금 7만 달러도 상환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한다. 



작품 속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 많은데 첫째는 '타인은 생지옥이니 사람은 섬으로 살아야 한다'던 티나가 동년배와 우정을 쌓으며 사회성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 둘째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잘하는 일이 뭔지도 모른 채 일단 '발부터 들이밀어 넣은 회사'에서 6년을 비서로 일하는 동안 등한시해온 자신의 능력과 꿈을 찾아가는 과정, 셋째는 제아무리 '노오력'해도 개선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뉴욕 '흙수저'의 초라한 현실, 넷째는 재벌과 비서라는 대립 구도를 통해 강조되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 다섯째는 악덕 재벌이라고는 하나 유독 자신에게만은 친절했던 보스를 속인 후 티나가 겪는 내적갈등, 여섯번째는 페미니즘 로드무비의 정수인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시키는 티나 & 에밀리 조합을 비롯해 비서 3인방 진저 로이드(법무팀장 비서)릴리 매드슨(회계팀장 비서)웬디 챈(디지털팀 비서)을 축으로 한 '누가 봐도 수상한데 왠지 안쓰러운 빈손연합'의 행보이다.


읽는 내내 여러 작품이 떠오른다. 먼저, 어시스턴트의 고군분투는 로렌 와이스버거의 히트작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생각나고, 개성이 뚜렷한 사회초년생들이 뉴욕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는 데이비드 블레딘의 「월 스트리트 몽키」와 닮았고, 가진 것이라곤 빚밖에 없는 '뉴욕 흙수저'의 삶은 이지민의 「청춘극한기」에 나오는 연봉 300만 원짜리 작가, 한국 흙수저 옥택선의 삶과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고는 하나 우리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고, 분량 또한 부담 없으니 가볍게 기분전환용으로 읽기에 제격이다. 모든 여성을 홀릴 만한 치명적 매력남이 등장하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여성과 모자란 여성이 친구(내지는 공모자)가 되고, 아무 때나 빵빵 터지는 유머코드와 적재적소에 깔린 비속어, 무하마드 알리처럼 절대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여주인공, 그리고 안줏거리처럼 등장하는 유명 연예인(여기서는 조지 클루니)까지 칙릿(chick-lit)의 흥행 요소가 모두 들어 있다. '이거 범죄 아니야?"라며 5인방의 행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학자금 대출금을 갚기 위해 시작된 '우연한 도둑질'이 어쩌다 로빈훗의 혁명이 되어버린 뉴욕의 5인조 도둑비서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저자 카밀 페리가 <에스콰이어>지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한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2-30대의 '폭풍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통쾌한 흙수저의 복수극을 완성했다. 여기서 '판타지 로맨스'는 덤이다. 
 


참, '티나-케빈', '티나-에밀리' 조합에서 보여지는 티나의 속마음이 특히 재미있다. 이를 테면, 초반에 케빈이 티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같이 햄버거 먹는 게 어떠냐고 물으면, 티나는 "내가 (너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해"라고 답하는 식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칙릿에 등장하는 매력남에게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 것 같다. 일단, 상위 5%에는 해당할 듯한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이면서도 패션감각은 엉망이(어야 하)며, 여자관계는 결벽증 환자처럼 깔끔하고, 예쁘고 섹시한 여성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외모를 덜 꾸미는 여주인공에게 호감을 갖는다. 직업은 전문직이며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독 여자친구에게만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치명적인 약점을 종종 드러낸다. 마침, 케빈 역시 변호사라 그런지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마크 다아시를 떠올린다.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로버트와 에밀리, 그리고 케빈이다. 이미 영화화 작업이 진행 중이란다. 과연 허당 미남 케빈은 누가 맡을지 기대되고, 악덕 사업가이면서도 유독 특정인에게만은 인간미를 풀풀 풍기는 로버트는 이름 그대로 로버트 드 니로가 제격일 것 같다.





이 나라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대학을 나와서 열심히 일하면 중산층으로 남부럽잖게 살 수 있다던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지난 30년 동안 정치와 경제 지형이 변하면서 현재의 20대와 30대가 중산층이 되겠단 꿈을 이룰 가능성은 부모 세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적어졌습니다. 우리가 게을러서, 직업의식이 투철하지 않아서, 과소비에 취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이 시대의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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