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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한 굽이를 지나면 또 다른 굽이가 오고, 그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기다린다. 단숨에 돌파할 생각은 버려라. 삶도 사랑도 사기 치는 짓까지도 언제나
첩첩疊疊하다. (pp. 120~121)
이제야 접하게 된 김탁환의 작품이다. 요새 주목받는 영화의 원작이라서가 아니라 순전히 제목이 무슨 뜻인가 하는 궁금증에 덜컥 구매부터 해버렸는데 저자의 다른 작품들도 조만간 모두 읽겠노라고 다짐할 정도로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대로 '스토리 디자이너' 김탁환, 그의 스토리텔링은 황홀할 정도이고,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과연 영화에서 이를 얼마나 잘 표현해낼지 걱정부터 앞선다.
대체 무슨 뜻인가 궁금했던 가비는 coffee의 영어발음을 딴 고어라 한다. '가비'가 coffee라는
걸 알고 나니, '노서아'의 뜻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노서아 가비란 러시안 커피를 말함.) 주권을 잃고 세계열강에 짓밟혔던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만나볼 수 있는 이 책은 명성황후가 비운의 생을 마감한 후 홀로 남은 고종 황제께서 아관파천이라는 굴욕을 당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고종 황제는 실제로 커피를 즐겨 드신 걸로 알려져 있으며,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돌아가신 가운데 오늘날까지도 독살설이 제기돼 오고 있는데 이 책은 바로 거기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통)역관이던 아버지가 난데없이 청나라에서 고종을 위한 천자의 하사품을 가로 챙겼다는 누명을 쓰고 죽자, 열아홉 살의 여주인공은 아버지의 죄의 대가로 시골 관아의 노비로 늙어야 하는 운명을 피해 러시아로 도망친다. 외국어 교본이 사방 벽에 가득 꽂힌 서재로부터 멀리 달아났다. 머물러 썩어가느니 붙잡혀 치도곤을 당하더라도, 불행을 거스르고 나랏법을 거슬러 오르고 싶었다. 천하를 덮는 조롱이 등장한다고 해도 나는 그 조롱 너머로 날갯짓하리라. (p. 23) 그곳에서 은여우로 통하며 그림을 위조하고 유럽 귀족들을 속여 러시아 숲을 파는 등 엽기적 사기행각을 벌이던 주인공 따냐는 '자신의 삶을 흔들고 찢고 흩어놓은' 희대의 사기꾼 이반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어느 날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 2세의 대관식에 조선 사신들이 참석한다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은 러시아 측 통역관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연회에 참석한다. 러시아 황제가 고종 황제에게 준 선물을 가로채려 하는 이반과 따냐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재회하고, 따냐는 우연하게 고종의 바리스타가 된다.
이 책은 철저히 여주인공 따냐를 위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언제 이런 여주인공을 가져보았던가?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전형적이지도 않으며, 결코 순정적이지도, 이데올로기적이지도 않고, 역사와 민족이라는 둔중한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뿐더러 그 표면 위를 매끄럽게 미끄러져 가는 여주인공을 우리 소설에서 만나본 적이 있었던가? (pp. 248~249)
책 맨 뒤에 실린 문화비평가 강심호의 글처럼, '우리가 언제 이런 여주인공을 가져보았던가?'라는 데서 오는 뿌듯함은 물론이고, 이 한 권의 책 속에서 보여지는 따냐의 눈부신 고군분투에 통쾌함과 유쾌함을 한껏 만끽할 수 있다. 시대가 사실 너무 우울하지 않았는가! 누구는 인간된 도리로 어찌 저토록 추접스러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욕심으로 저와 제 가족이 사는 나라를 파는 데 혈안이고, 누구는 그 와중에도 거액을 착복해 유배됐으면 반성하고 살지는 못할지언정 되려 왕에게 앙심을 품고 왕이 즐겨 마시던 차에 독을 넣고, 또 누구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인접국의 황제를 찾아가 굴욕적인 자세로 도움을 청하며 눈물을 훔치고, 나라의 황제는 한때 나라의 국모이자 자신의 아내였던 이를 허망하게 잃고 쓰디쓴 커피만 연거푸 들이켜며 절망하고 있다. 그런데 따냐는 이 우울한 시대에 대한 푸념을 뛰어넘어 그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비상의 날갯짓을 멈추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부모를, 꿈을, 나라를 빼앗긴 데다, 정인이라 여기던 사내에게 배신당하지만 그래도 주저앉아 울고만 있지 않는다. 그는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상대에게 모든 걸 걸지는 말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거짓과 사기를 일삼지만, 사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서로서로 속이는 가운데, 그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렇기에 따냐,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어느 풀숲에나 독사는 있기 마련이라지만, 그 숲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갈 작정이라면, 독사가 꼬리를 내리고 사라질 만큼 강한 독기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에게 어찌 멋지다는 찬사를 늘어놓지 않을 수 있겠는가!
1898년 덕수궁에 자리한 정관헌에서 이반으로 분한 러시아 통역관 김홍륙이 고종 황제와 순종이 마시는 커피에 독을 탔다. 맛이 이상하다고 느낀 고종 황제는 순종은 지능에 손상을 입고 생식기능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피비린내 나는 쓰라린 역사 속에서 홀로 종횡무진이던 한 젊은 여인의 처절하지만 경쾌한 비상의 날갯짓을 떠올리며 진한 노서아 가비를 마시고 싶은 밤이다.
그런데 대체 커피라는 그 검은 액체를 어떤 형용사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의 표현대로, 커피는 외로운 마음을 다독여주는 속삭임이고, 불쑥불쑥 떠오르는 첫사랑을 닮았는가 하면, 달면서도 쓰고 차면서도 뜨거운 기억의 소용돌이이고, 끝나지 않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아름다운 독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