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 사막의 망자들,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5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 최대 신문사 중 하나인 LA 타임스에서 범죄 담당 기자로 일했던 전력 때문인지 LA 타임스는 이 작품을 두고 '재미뿐만이 아닌, 문학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해내고 있다'고 극찬했다. 다시 말해,  촘촘한 이야기 구조 속에 가정과 사회 전반에서 포착되는 암울한 현실의 단면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그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매커보이처럼 LA타임스의 범죄 담당 기자로 재직하기도 했었고 소설가로 전향하고 나서는 미국 미스터리 작가 협회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는 저자 마이클 코넬리는 과연 스릴러가 무엇이고 또 스릴러는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서는 사전에 충분히 의식하고 집필했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의 작품은 다른 형태의 미디어로의 전환이 쉽게 예상된다. 실제로 그의 작품 중에서 벌써 여럿이나 영화화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저 "영화 같은 소설"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애초 기획단계부터 다양한 플랫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원 소스(one source)를 만드는 것을 염두 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역사가 오래된 유명한 신문사들마저도 휘청대면서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니 경력이 30년이 다 되어가는 베테랑급 기자들은 정리해고 되고 이들의 빈자리는 적은 연봉에도 기꺼이 일하겠다고 몰려드는 젊은 기자들에 의해 대체된다. 이 책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 역시도 2주 후에 안젤라 쿡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데 2주 전에 자신이 직접 작성했던 살인 사건의 용의자인 16세 흑인 소년에 대한 무죄를 주장하는 전화가 걸려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결국 매커보이는 살인 사건의 진범이 흑인 소년이 아닐 뿐더러 이것이 연쇄살인이라는 걸 알게 되고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라스 베이거스로 향하는데, 문제는 그가 상대해야 할 대상이 언제나 그보다 한 발 빠르다는 것이다. 
 

   
  나는 창밖을 돌아보았다. 사막에서 문명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자 카펫처럼 깔려 있는 불빛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 세계였다. 저 지평선 위엔 수십억 개의 불빛이 빛나고 있으련만, 그 모든 빛을 다 모아도 어떤 인간들의 마음 속 암흑을 밝히기엔 부족하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P. 187)  
   


불량기가 가득한 흑인 청소년을 성인으로 둔갑시켜 버리고 살인범으로 몰아댄 경찰과 언론의 편협하고도 무사 안일한 태도가 힘없는 약자나 소수집단에 끼치는  영향과 피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보도 자료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아주 냉소적인 시각으로 그것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정확하지 않은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해 매우 교묘하게 다듬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살인에 대해 모두 자백했다고 하면서도 정작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자백이었다. 윈슬로의 변호인 말이 옳았다. 그 자백은 효력이 없을 것이고, 그의 고객은 무죄일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p. 117)' 또 아무리 베테랑급 기자라도 정리해고를 비껴가지 못하는 현실과, 그렇게 해고를 당한 기성 세대가 막상 사회 밖으로 나왔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지만 실질적으로 국가와 사회가 이들을 책임질 수 없다는 문제도 여실히 드러난다. '솔직히 까놓고 말할게요, 선배. 바깥엔 아무것도 없어. 실은 나도 자동차 세일즈맨이라도 해볼까 하는데, 지금 하고 있는 놈들도 전부 죽겠다고 아우성이네요. (p. 75)' 또, 무엇보다도 연쇄살인마가 잭 매커보이의 이메일 계정과 은행 계좌 비밀번호를 해킹해 그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과정은 섬찟하기까지 하다. '누가 나를 공격하고 있는 것 같아. 내 전화기, 내 이메일, 내 은행계좌까지 못 쓰게 만들었어. (p. 157)' 블로그를 비롯해 SNS가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온라인에 자신과 관련된 흔적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고스란히 누군가에게는 범죄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어주는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걸까?     
 

   
  인터넷은 전혀 새로운 게임이 펼쳐지는 세계야. 선과 악이 만나는 거대한 교차로지. 온갖 형태의 변태성욕과 페티시즘을 위한 채팅룸과 웹사이트에서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인간들이 매일 매 순간 서로 만나고 있어. 우린 그런 인간들을 점점 더 많이 보게 될 거야, 잭. 그들은 환상이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나누던 것을 현실 세계로 가지고 나오지. 같은 신념을 지닌 사람을 만나면 그 신념을 정당화하기 쉬워져. 용기를 북돋워주고, 가끔 행동을 요구하기도 하지. (P. 379)  
   


이 책은 개인적으로 여러 면에서 흥미롭게 읽었는데 "단발이론" 운운하는 장면은 스릴러답지 않게 로맨틱하고, 우리에게는 친숙하다 못해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허수아비를 공포의 대상으로 바꿔놓은 점은 무방비 상태에서 허를 찔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너의 기사에 폭과 깊이를 더하라. 사건을 일어난 그대로만 쓰지 마라.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고 도시생활과 독자들 속으로 맞춰 들어가라. (P. 110)'는 말은 잭 매커보이뿐 아니라 마이클 코넬리 그 자신이 늘 되새기던 말이 아니었을까? '보통 스릴러는 다시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허수아비>>는 두 번 이상 읽어볼 것을 권한다'고 뒤표지에 쓰인 것처럼 폭과 깊이를 더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 덕에 두 번 이상 읽어도 실망하지 않을 범죄스릴러가 됐다.    
 

   
  “몇 년 전 어떤 남자가 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 우린 서로 사귀었지만 잘 안 됐지. 나는 나대로 고민을 안고 있었고, 그 남자도 전처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거든. 그 여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서로 각자의 고민을 얘기하던 중 그 남자가 '단발이론'이란 것에 대해 설명하더라고. 혹시 들어본 적 있어?”

“단발이라면?”

“총알 한 개 말이야.”

“케네디를 단번에 보내버린 총알 같은 거?”

레이철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톡 쳤다.

“그게 아니라 평생의 사랑을 의미하는 거야. 누구에게나 진정한 사랑은 한 발의 총알처럼 단 한 사람뿐이란 거지. 운 좋은 사람은 그 사람을 만나 그 총알에 일단 가슴이 뚫리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대. 불륜, 이혼, 죽음 등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말이야. 그게 바로 단발이론이야.” (P.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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