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의 포구기행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해뜨는 마을 해지는 마을의 여행자
곽재구 글.사진 / 열림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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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가 하는 여행은 이미 시작부터 들뜬 마음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가는 일반적인 여행은 상상과 계획으로 이미 그곳에 간듯 들뜨고 그래서 막상 그 곳에 가면 상상하고 있는 풍경을 확인하고 종종 예상 밖의 풍경에 낯설어하고 심지어 기대에 못미친다고 실망하기까지한다.

하지만 곽재구가 하는 포구기행은 우리의 여행과는 다르다. 그 곳의 풍경과 삶에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를 즐기고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선입견도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진솔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런 그의 태도는 실제로 그의 글쓰기에도 나타난다. 그의 글은 그의 여행처럼 한가롭게 종이 위를 거닐고 있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서 또다른 삶의 모습을 한가로이 지켜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삶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 바삐 움직이는 시선으로 사물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산책자의 느릿느릿한 여유있는 시선으로 포구와 그 주변을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그 풍경과 하나가 되고 그물을 고치고 있는 어부 뿐 아니라 포구 위를 날고 있는 갈매기와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여유롭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볼거리와 오락이 가득한 관광지도 아니지만 그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볼거리와 오락이 포구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와 함께 도회지를 벗어나 한가로이 바닷가를 거닐고 등대를 바라보며 바다냄새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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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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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여전히 우리들은 우리들의 정신세계에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 정신을 둘러싸고 지탱하고 있는 우리의 몸에 대해서는 소홀한 게 사실이다. 이 글은 우리의 시선을 일차적으로 그 몸에 두고 있다.

물론 이 글이 말 그대로 몸 또는 걷기의 즐거움과 그에 대한 찬양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걷기가 바로 우리의 몸을 의사들의 지식이 아닌 우리의 자신의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딛는 과정은 우리의 정신의 심연으로 조금씩 조금씩 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걷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 세계로 들어가게 되며 어느 순간 몸과 영혼이 하나가 되는 합일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힘들게 땀을 흘리며 입술이 바싹 타들어갈 즈음 정상에 도달하고 그 곳에서 들이마시는 공기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건 세상의 때에 찌든 우리의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는 정화의 순간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말에 공감할 것이다. 그렇다면 걷기예찬은 그다지 새로운 글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걷기가 세상으로부터 초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걷기가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임을  작가는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걷기는 세상, 특히 도시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다시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즉 걷기는 19세기 파리의 많은 지식인들이 파리의 시내를 거닐면서 그 당시 파리를 이해하였듯이, 현대의 걷기는 급변하는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한편 걷기를 통한 세상에 대한 알기는 다시 나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밖으로만 향해 있던 시선은 다시금 나에게로 돌아와 나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걷는 동안 일시적이긴 하겠지만  나는 현실의 모든 굴레와 외투를 벗어버리고 원초적인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차가운 바람과 함께 다가오는 세상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시간에 쫓기면서 살아간다. 우리의 모든 것은 빨라야 한다. 어느 통신사의 광고처럼 속도가 생명이다. 하지만 천천히 걷는 과정에서 우리는 잃어버리고 놓쳐버렸던 많은 것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 핏발이 선 우리의 시선은 걷는 과정에서 순화되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어느 순간 그 속도와 시간을 일어버리는 순간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스티븐슨의 말처럼 우리는 '영원'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걷는 것처럼 천천히 읽어야 한다. 반드시 끝까지 빨리 읽어야 된다고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읽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이 안에 있는 많은 보행자와 함께 걸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번역자의 번역이 우리의 숨고르기를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내 개인적인 생각일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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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순수함과 거짓말 - 디즈니 문화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교육적 대안
헨리 지루 지음, 성기완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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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만화영화를 보던 생각이 난다. 일요일 아침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 주일학교에 가지도 않고 TV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그 영화들의 많은 것이 바로 디즈니의 제품이었다. 그리고 작년인가 혹시나 우리 아이들도 그 만화영화를 즐길 거라는 생각에 알라딘에서 디즈니 DVD를 구입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디즈니의 영화들이 공장에서 주물에 찍어내는 어느 것 하나 차이없는 제품이다. 한 마디로 어릴 적 KS 마크가 찍혀 있는 연필처럼 항상 표준화되고 그 기준을 벗어난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것, 그것이 디즈니의 영화같다. 항상 똑같은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 그 결말 또한 항상 같다. 몇 년전 드림웍스의 [쉬렉]이 제공한 재미는 바로 디즈니 만화영화가 주지 못한 것을 주려고 하였다는 데 있었다.

저자 헨리 지루는 디즈니의 그런 표준화과 기준에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특히나 포스트 모던 시대에 어떻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으로써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여전히 디즈니는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거의 매년 한 편 이상의 영화를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고 그 내용은 항상 그들이 생각하는 올바름의 기준에서만 재단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지루의 이 길지않은 연구서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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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역사 세계의 도시 이야기 1
프랑수아 베유 지음, 문신원 옮김 / 궁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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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뉴욕의 쌍둥이 빌딩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로 인해 미국인 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 경악과 충격에 그리고 안타까움과 슬픔에 남겼다. 지난 세기 중반 이후 줄곧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갈등과 충돌은 보이는 곳에서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슬람의 적대행위의 하나로서의 그런 테러는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 정도에서는 드문 일이었지만 .) 또 다른 한편 지난 해에 있었던 쓰나미로 인한 동남 아시아의 커다란 피해도 많은 사람들을 가슴아프게 했지만, 뉴욕의 사건만큼 세계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왜 뉴욕의 사건은 다른 사건과 비교할 때 유난히 지속적인 관심을 끌었을까?  이 문제의 해답의 일부를 아마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저자는 이 책의 발문에서 "모든 견고한 것은 뉴욕에서 녹아버린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흔히 미국을 지칭하는 용광로(melting pot)과 다르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책에 대한 인상과 뉴욕의 이야기는 너무나 미국적인 뉴욕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출발부터 이방인이었던 뉴욕인들, 그들이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은 낯선 땅에서 그들만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청교도들, 그리고 다양한 이민자를 수용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특히 뉴욕의 상징 중 하나인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를 보여주지만 자유의 여신상을 뒤로 하고 뉴욕 항구에 도착한 이민자들의 모습은 민주주의의 꿈과 그들이 이후 겪어야 할 고통을 한 눈에 보여준다.

또한 뉴욕이 커져가는 과정은 얼핏 미국이 서부로 나아가는 과정과도 같은 인상을 받는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그 사람들이 살아갈 공간의 필요는 뉴욕의 크기를 점점 크게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들은 그들만의 문화를 유지한 채 뉴욕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데, 이 또한 미국을 지칭하는 다채로운 야채로 가득한 샐러드 그릇(salad bowl)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은 이런 의미에서 읽을 만하다. 미국을 이해하고자 하거나 미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한 도시의 발전과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굳이 흠을 잡자면, 다인종이 모여사는 미국과 뉴욕의 공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잉글랜드와 영국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자는 잠시 잊어번린 듯하다.  저자가 말하는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와는 영국의 일부로서의 잉글랜드임에도 역자는 부지불식간에 잉글랜드를 영국과 동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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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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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두의 하나는 20세기 중반부터 우리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환경 또는 생태학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관심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침묵의 봄>>은 다시 읽게 하는 고전이며 그래서인지 벌써 세번째 번역본이 나왔다. 게다가 세계를 뒤흔든 선언문으로 미국의 독립선언문, 맑스의 공산당 선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1장 내일을 위한 우화는 왜 제목이 "침묵의 봄"인가를 알 수 있게 하며 칼슨이 환경(생물학)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 문학을 꿈꾸었음을 어림짐작할 수 있게 한다. 처음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미대륙 한가운데쯤 모든 생물체들이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마을이 하나 있다. 이 마을은 곡식이 자라는 밭과 풍요로운 농장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봄이면 과수원의 푸른 밭 위로 흰 구름이 흘러가고 가을이 되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소나를 배경으로 불타즛 단풍이 든 참나무와 단풍나무, 자작나무가 너울거렸다. (......) 전에는 아침이면 울새, 검정지빠귀, 산비둘기, 어치, 굴똑새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새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판과 숲과 습지에 오직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 내일을 위한 우화는 예언과도 같다. 이제 드디어 우리는 칼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듯 하다. 그리고 이제 칼슨이 첫 페이지에서 그린 풍경은 나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어린 시절 해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물장구치고 놀다가 엄마에게 두드려 맞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중랑천은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곳임 아님을 매일 매일 확인할 때 마다 이 구절은 항상 오버랩되고 있다.

물론 이후 많은 내용은 사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이제는 시장마다  유기농이니 무농약이니 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설마 지금도 칼슨이 말하고 있는 DDT와 같은 살충제를 사용할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지금 여기서 읽고 있는 우리에게 칼슨의 살충제와 제초제이야기는 이제 진부한 이야기같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또는 그와 비슷한 화학 약품을 제조하는 회사는 지금도 존재하고 가끔은 TV가 보여주는 폐수로 오염되어 죽은 물고기가 떠 있는 하천을 생각하면 그녀의 주장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하천을 보면서 새들의 노래가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 여기서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롭다.  그리고 인간이 선양하는 문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나아가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가를  생각하니 더더욱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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