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자들 - 숲을 향한 전방위적 공격 실천인문총서 5
데릭 젠슨.조지 드래펀 지음, 김시현 옮김 / 실천문학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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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유명한 인문학자라고 해야 하나,,, 우리에게는 공산주의 사상가로로 흔히 알려져 있는 카알 맑스(Karl Marx)는 그의 [공산당 선언]에서 인간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한 마디로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였고 그 다음에는 인간을 착취해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용이나 착취라고 우리말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는 같다. 영어로 exploit이다. 그 대상이 누구이냐에 따라 이용으로 또는 아주 부정적인 의미의 착취로 번역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번역은 지금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로 그러한 번역이 가능하였던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 그리고 인간은 다른 그 이외의 자연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젠슨과 드래펀의 [약탈자들]은 그 착취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자연, 구체적으로는 숲으로 확대하고 있다. 즉 숲을 이용하는 인간들의 행위를 약탈의 행위라고 어떤 의미에서는 착취보다 더 심한 약탈의 행위라고 바라보고 있다. 다시 말해 저자들은 숲을 인격화하면서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숲의 인격화는 오래 전에 내게 많은 감동을 주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짧은 동화를 생각나게 한다. 그 책에서 나무는 한 소년과 같이 성장하면서 항상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마지막 죽어서 마지막으로 잘라진 밑둥으로 노인이 된 그 소년이 앉을 수 있는 의자의 역할을 하고 그 때 축약된 글과 그림이 보여준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때의 감동은 나에게 인간의 이기심의 표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이 [약탈자들]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폭풍에 쓰러진 늙은 오리나무가 오솔길을 가로지른다. 부러지기 오래전에 죽었기에 가지에는 이끼 수염이 무성하다. 나무는 자라면서 숲을 위하고, 죽은 후에도 우뚝 서서  숲을 위하며, 산산이 부서지면서도 숲을 위한다."(21)

그 오리나무는 죽어서 이끼수염을 비롯한 다른 숲의 생명체들이 살 수 있는 터전과 양분을 제공해주면서 숲이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생명력을 존속시켜준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죽은 오리나무는 인간이 잠시 숨돌릴 수 있는 의자의 역할로 축소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제 나무는 그런 역할도 하지 못할지 모를 일이다.

여하튼 다시 이 책으로 돌아와, 저자들은 인간의 이기심, 특히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한다는 자본주의적 이기심을 주로 미국의 벌목업체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이 주로 미국으로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들의 자본주의적 행태가 그들만이 아닌 우리들의 행태가 아닌가하고 의심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렇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한 회의에서 한 말을 다시 인용해 본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숲이 우리 것이라는 생각 말이지요. 식물은 '우리의' 약이 아니고, 숲은 '우리의' 숲이 아닙니다. 첫째로, 식물은 식물 그 자체의 것이며, 숲의 것입니다. 둘째로, 식물이 설령 인간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소유주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식물을 목재로 가져갈 권리가 없듯이 약으로 가져갈 권리 또한 없습니다."(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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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잃어버린 언어
스티븐 해로드 뷰너 지음, 박윤정 옮김, 오영주 감수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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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식물의 잃어버린 언어"라는 제목은 이 글을 읽어보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우선 제목에서 '잃어버린' 주체는 식물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흔히 데카르트, 뉴턴 이후 기계론적 인식론은 우리와 식물의 소통을 단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식물을 비롯한 자연계를 인간의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과 인간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식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과학이 지닌 도구성 때문이다.

한편 이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식물의 언어라는 개념이다. 흔히 인간과 다른 동식물을 다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인간이 지닌 언어라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최근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예컨대 [털없는 원숭이]도 인간과 유인원 또는 원숭이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를 연결시켜주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인간의 언어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듯 하다. 그런데 식물에게도 언어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다시 한번 인간이 만물의 영장 또는 주인이라는 오래된 말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한다. 한 마디로 인간과 자연계의 단절 또는 최근 점점 더 불게 지고 있는 환경 문제는 바로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인간과 자연, 특히 식물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흔히 의사 또는 유사(quasi) 과학의 영역이라고 하는 약초와 약초를 다루는 사람들을 통해서이다. 현대 의학에서 볼 때 약초과 약초를 다루는 사람들은 헛된 미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약초와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식물의 언어를 듣고 그 언어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한편으로 식물들 사이의 언어와 대화는 인간의 환경에 대한 인식과 윤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준다. 필자에 따르면 언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식물과 인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인간과 인간의 언어는 다윈이후의 진화론적 사고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즉 인간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원리, 또는 한 마디로 경쟁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내가 살기 위해서 타인이나 다른 존재들은 사라져야 할 운명이다. 하지만 식물의 언어는 경쟁이 아닌 공존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자신이 처한 위험을 주변 존재들에게 그들만의 언어를 통해 알리고 있다.

자연계의 만물들은 서로 대화하고 있다. 그 대화에서 소외된 것은 인간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 나오는 약간은 묵시론적이지만 인상 깊은 구절을 적는다.

"인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생명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어느 생명체보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하지도 않다. 이를 망각하면, 개인이나 국가, 민족은 파국을 면할 수 없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그들이 인간에게 복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 과학적인 인식론이 인간의 내면에 끼치는 영향은 훨씬 미묘하다. 그러나 자연의 다른 부분에 끼치는 영향만큼 고통스럽다. 우주를 하나의 기계로 보고 인간만을 지성적인 생명체로 보기 시작하면, 인간의 삶 속에 독특한 고립감이 생겨난다. 더불어 전에 몰랐던 힘든 외로움도 파고들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많은 정서적 병리 현상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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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참으로 대단한 존재이다. 기계적으로 말한다면 자가진단 기능이 있고 그 진단에 따라 항상 자신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려고 한다. 흔히 항상성(homeostasis)라는 생명체의 기능은 외부 환경의 변화, 즉 자극에 체온을 일정한 상태로 유지한다. 그런 면에서 생명체의 강한 생존 의지는 대단하다. 어찌 보면 그와 같은 기능에는 신성성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최근 자연의 변화는 심상치 않다. 장마 기간보다 장마가 끝난 후의 강수량이 더욱 많아지면서 점점 아열대기후로 변하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또한 소나무 재선충병은 점점 북상하고 있으며 대나무의 성장한계선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와 함께 인간의 몸 또한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점점 증가하는 성인병, 정신병 등은 만성적인 자연 환경의 변화로 유발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인간의 병들의 대부분이 인간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자연 환경의 변화 또한 인간의 책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문제의 심각성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은 그 책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 환경과 인간의 변화는 앞서 언급한 생명체의 호메오스타시스 기능이 점점 약화되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우려는 낳는다. 경제와 환경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자연 환경의 보존과 그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슈마허는 그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신성하지 않다"고 말한다, 종교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의 창조물이라면 그 창조물에는 신성함이 존재하고 그 신성함을 설명하는 일부가 항상성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인간의 활동은 그 신성함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니 인간은 참으로 대단하다. 바로 이 시점에서 갑자기 바벨탑의 신화와 인간의 비극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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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오래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 사회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의무 또한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의무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서구 사회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한 사회의 일원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이 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현 사회를 들여다볼 때 이 말이 지니는 함의는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소위 명망과 인기를 한껏 누리고 있다는 많은 정치인들의 개인적인 모습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치부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망각한 행동에 기인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들만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한 사람들인가? 날로 심각해져가는 환경 그리고 그 환경의 역습을 조금씩 체감하는 지금, 어쩌면 우리 모두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망각해 온 것은 아닌가?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해 왔다. 다시 말해 스스로 귀족인 양 행세하면서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을 열등한 존재로 내려다보았을 뿐 아니라 착취(exploit)해 왔다.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자연 만물에 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기억해야만 한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다른 존재들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아가 다른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나아가 그 다른 존재들에 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행해야 한다는 것을. 그 가운데 인간의 탈색된 올바름과 정의로움은 새로운 환경의 색을 입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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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끊임없이 지식을 생산해왔으며 그 지식을 학습해왔다. 심지어 지식에 대한 학습을 강요해왔다. 특히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그 유명한 격언과 "지식강국"이라는 표어가 함축하고 있듯이, 개인 뿐 아니라 사회, 심지어 국가의 운명이 바로 이 지식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이 생산하고 축적해온 지식이 인간과 국가, 나아가 지구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발전시켜왔는지는 한번 의심해봐야 한다. 예컨대, 수많은 전쟁의 기록들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지식은 다른 인간의 인간성을 짓밟기도 하고 심지어 그 인간 자체를 말살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물론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법이나 도덕 등 다양한 장치를 통해 제재하고 있는 것도 인간의 지식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인간의 지식이 인간의 운명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의 주변을 둘러보기만 하더라도, 인간의 지식이 가져온 문명과 그리고 과학기술 등은 다른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주변의 다른 환경을 착취 또는 남용한 결과라는 사실을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유명한 성경의 지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는 인간의 지식이 어떻게 정당화되고 있는가 또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지식은 어떤 의미인가? 성경의 구절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창세기의 선악과 나무를 알고 있고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지식에 관한 구절이다. 아담과 이브는 지식의 나무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왜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지식을 금지시켰는가? 지금까지의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성장을 가져왔는지를 의심하게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하느님의 금지한 지식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지식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인간의 앎과 지식은 어떤 지식이어야 하는가?  이 또한 성경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나서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고 자신의 몸을 나뭇잎으로 가린다. 다시 말해 인간은 금지된 지식을 알고 나서 나와 다른 사람, 나아가 나와 다른 존재의 차이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그 지식을 통해 그 차이를 점점 넓혀왔다. 따라서 하느님이 금지한 지식은 나와 다른 것을 구분하고 그 안에 위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며 하느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지배할 권한을 주지는 않았다.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권리만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바람직한 지식이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을 확대하고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슈마허의 "작은 것은 아름답다"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 지식의  (겉으로 보기에) 대표격인 현재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 또한 이러한 생각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최근의 생태학에서 슈마허의 글은 더욱 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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