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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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낮은 곳에 있는 서민 개인의 삶이 역사로 기록될 수 있는가?  상식적인 견해로 본다면 전통적인 역사는 왕들과 그 주변의 역사이다. 그래서 최근 TV에서 다룬 한글 창제와 관련된 드라마에서도 드라마의 흥미를 한층 배가시키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드라마의 큰 축이며 한글와 일반 백성의 연관성을 강하게 드러내준 노비와 나인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고 세종대왕 만이 살아남는다.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도 서민의 삶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생활사의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 책들이 그 한 예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역사라고 하면 상층부에 있는 또는 기록문화에 접근 가능했던 사람들의 삶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이다.

특이한 제목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한 이 책은 그 내용에서도 흥미로왔는데, 이는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다. 즉 중세 말 근대로 이행되기 직전에 이탈리아의 한 방앗간 주인의 삶을 통해 중세의 역동적인 삶과 사상 그리고 그 가운데 단순히 수용적이고 수동적이지만은 않았던 대표적인 하층민의 민중문화를 되집어보는 것은 재미있는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이런 역사적 접근을 미시사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는데, 역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미시사의 이론적 틀과 주장들을 살펴보는 것과는 다르게 미시사적 접근으로 중세 말을 설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데에서 일반 역사에 관심을 두고 살펴온 독자들에게는 낯설고 새로운 하지만 약간의 흥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와 같은 미시사적 접근과 해석은 그 성격상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자료의 불충분성 때문에 저자의 상상력은 불가피하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문학, 즉 역사소설의 색채를 슬쩍 내비치기도 한다는 점에서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한다. 팩션(fact+fiction)이라는 새로운 소설의 범주가 소설의 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즈음 역사의 장에서 그것도 매우 아카데믹한 공간에서 상상력이 중요한 연구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전율이다.

경직되어 있는 사고의 두터운 외피는 이런 잔잔한 충격에 새롭게 반응하고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 대해 새롭고 중요한 한 의미를 제공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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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와 광대 - 중세 교회문화와 민중문화 현대의 지성 133
유희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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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항상 궁금과 관심의 대상이었다. 암흑의 시대라고 말하기에는 거의 천년 동안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무지한 사람들이라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문에서 나름대로 개인적인 관심거리로 중세에 관한 책들을 한권씩 사서 읽었다. 읽으면서 역시 나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중세는 아무것도 하지않은 아무것도 없는 시대는 아니었다.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사람들이 근대로 이행되는 과정에 필요한 많은 것들의 기틀을 만들었다. 예컨대 책 등의 발명품. 그럼에도 중세는 흔히 알려진 대로 교회의 시대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교회와 교황, 그리고 교리들이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였다. 하지만 그 교회의 그늘 아래 민중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았을까하는 의문과 궁금증이 새롭게 커져 갈 때 바로 [사제와 광대]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사제가 중세의 권위적인 교회를 대표한다면 그 대척점에 광대로 대변되는 민중문화가 있다고 저자는 책의 처음에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과 이 책의 서두에서 언급한 광대는 더 이상 이 책에 없다.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의 역사가 교회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약간의 실망과 이 책의 저자에 대한 의심이 일어난다. 어지간해서는 그런 느낌을 가지지 않는데, 내가 제대로 읽지 않았나하는 자신에 대한 반성도 하였지만 그래도 분노가 끓어오르며 표지가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위한 수단만이었는가라고 생각했다.

저자의 중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흥미롭고 재미있고 나름대로 정리가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였지만 이 책에 대한 실망은 지울 수 없었다. 얼핏 느끼기에 1부는 역사학회에 발표한 논문을 책으로 다시 엮고 2부는 박사학위논문의 소제목을 다시 책으로 정리한...

정말로 아쉬웠다. 사뭇 중세의 광대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지 궁금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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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 개정판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10
메리 셸리 지음, 서민아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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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진화 발전하고 있다. 무수히 증식하면서 감당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이제는 더 이상 예측불가능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식이란 바로 그 예측가능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지식의 토대가 되는 예측가능성은 사라지고 있다.  그만큼 무수히 많이 생산되는 지식은 더 이상 객관성과 실용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거꾸로 지식은 인간의 지식이 함의하고 있는 주관성과 자의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지식은 어디에서 출발하였을까?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듯한 이 문제, 사실 자연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이 번개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시작하였듯이. 또한 요즘 생태학이 말하는 생물다양성이라는 개념이 그러하다. 과거에는 받아들여지지않고 인간 중심을 고수하던 세계는 지식 또는 우리의 앎이 확대되면서 우리의 실존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생물다양성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상호연관은 인정되었다.  

지식은 "분류"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지식은 세분화되면서 우리의 앎은 심화되며 우리의 앎을 위한 노력은 한층 가열차진다(과학(science)의 어원이 알다에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과학과 지식과 앎의 행위는 동일하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그런 지식의 확대는 인간의 자신감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 반대의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너무나 많은 지식은 어떤 것이 우선 순위인지 알 수 없도록 하면서 혼란을 가중시키며 더 이상 분류체계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서 세상은 더욱 더 알 수 없는 공간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돈다. 다시 돌아가 생물다양성이 그렇다. 우리가 많은, 다양한, 복잡한 장치를 통해 우리의 주변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에 대한 앎은 심화되는 동시에 혼란에 빠지면서 우리는 과거의 앎에 대해 망각하고 불신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대학생활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에 체득하였던 것에 대한 부정이 현대(근대)의 과학/앎을 낳은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데카르트의 회의하는 이성을 생각해보라. 그 또는 우리의 이성은 엄밀함과 이성이라는 깃발아래 모든 비이성적인 것의 부정과 거부를 낳았다. (헤겔의 부정은 생산적이지만 우리의 부정은 그렇지 못하다.) 

데카르트의 회의하는 이성이 근대과학의 토대가 되면서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선조들의 삶과 생각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의 삶의 부정은 사실 출발 당시부터 적극적으로 수용된 건 아니다. 우리의 이성에 대한 긍정의 출발선상에서 이성에 대한 나아가 인간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것의 부작용이 인식되었다. (빅터의 연금술에 기반한 지식 또한 사실 이런 태도에서 나오고 있다.) 아도르노가 고뇌한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의 출발지점에 있었다. 예를 들어 계몽의 산물인 고딕이 그러하다. 고딕소설이 끊임없이 "알수 없는"(knowledgable)  괴물을 소재로 삼고 인간의 이성의 결과를 문제시하고 있다. 메리 쉘리의 작품이 바로 그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런 상황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과학과 지식의 대변자인 빅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호명한다. 왜? 타자로 관심의 대상이었던 괴물이 이제 중심에 위치한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은 더 이상 자신감에 덤치는 인간의 것이 될 수 없다. 빅터 또는 이성의 산물이지만 비이성적인 존재, 그 괴물이 이제 이야기의 중심에 있게 된다. 생물다양성과 상호연관성이라는 테제아래 그 존재의 정당성은 인정많은 한 비구니 스님의 도룡뇽처럼. 우리는 이제 우리의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단지 소망할 뿐이다. 우리의 이성의 반이성성을 깨달을 뿐이다.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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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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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만에 시집을 잡았다. 시를 읽으면서 바쁜 삶 속에서 다시 한 시집의 긴 여백과 시가 제공하는 상상과 회상, 그리고 추억으로 여유로워진 나를 발견한다. 참으로 여유로운 토요일 저녁이다. 향이 좋은 차와 성시경이나 빅 마마의 노래가 나의 오감을 함께 적셔 준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음식은 피할 수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일 가운데 먹는 점심을 떼우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 어릴 적 엄마의 손맛을 생각나게 하는 음식은 너무나 즐거운 상상을 준다. 그런 음식은 단순히 미각만을 자극하지 않는다. 우리의 뇌를 자극하고 어릴 적 친구들과 어른이 되어 가끔은 낯설어진 어머니를 다시 떠올린다. 그래서 집에 전화했다. 저녁은 잡수셨어요? 뭐드셨어요? . . .

시인 안도현에서 음식은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는 음식을 통해 바쁜 일상 속에서 잊혀진 그리고 잃어버린 주변을 다시 생기있게 오감으로 느끼고 있으며 느끼도록 한다. 그리고 그런 즐거운 상상은 음식에서 점점 그 주변의 모든 것으로 확산되고 끊어진 주변과의 관계를 연결시키고 있다.

외딴 집이다// 둘러보니/  아기원추리 집 한 채,/ 도라지꽃 집 한 채,/  뻐꾸기는 집이 여러 채,//  외딴 집이 아니다/ 소란스런 마을  한복판이다        - 산가1 -

'나' 또는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산 속에 있는 집은 홀로 떨어진 외딴 집이다. 하지만 그 외딴 집에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많은 이야기가 있으며, 나는 느끼지 못하지만 지금도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우리가 그 이야기 속에 둘러싸여 있다. 또한 그 이야기는 우리가 홀로 있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숲의 많은 식물 뿐 아니라 동물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도시 공간에서는 느끼기 힘든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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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생각들 - 당대 최고의 석학 110명에게 물었다
존 브록만 엮음, 이영기 옮김 / 갤리온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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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모 방송사의 "TV 책을 말하다"를 잠시 보게 되었다. 독서대중의 호기심과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하지만 가끔은 그런 프로그램이 약간은 상업적인 냄새를 띠는 것 같아서 반감도 없지 않았던 차에 이 책과 이 책의 쓴 저자들의 성격, 그리고 "에지"라는 단체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그래서 곧바로 주문하고 전철에서 읽기 시작했지만 피곤한 일상에서 이 내용들은 나에게 다가오지않고 먼지처럼 흐트러지고 나의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기를 여러번 ... 하지만 결국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그리고 그 먼지들이 서로에게 이끌려 돌덩이처럼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돌덩이는 어느 영화에선가 지구의 종말을 가져올 지도 모르는 거대한 운석 그리고 그 이후에 찾아올 빙하기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스의 한 철학자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이후, 아마도 그 이전부터 사람들은 나와 내 주변에 있는 것을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 노력들은 여전히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그런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이 책의 저자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선배 그리고 선조들의 노력들을 한낱 거품으로 만들려는 정말로 "위험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래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실낱같이 부여잡고 있는 인간에 대한 많은 믿음들을 그들은 뜨리려고 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의 특이성에 대한 많은 생각은 이제는 깨어져야 할 환상이며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계몽"이라고 외치는 듯 하다.

그러면서 나에게 지금 "가장 위험한 생각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전철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  많은 회사의 도산이 가져온 질은 좋지만 터무니 없이 값싼 물건을 파는 사람들,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외치는 사람들, 도움을 요청하며 절뚝  거리는 사람과 목이 터져라 외치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사람들,  그리고 아둥바둥  자본의 힘과 권력을 향유해보려고 노력하는 나에게 이들의 생각들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그리고 어둠침침한 곳에서 맥주 한 잔을 들이키는 매우 감상적인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우울함을 느끼게 하고 또 다른 생각을 보여주는 이 책 ...

그래도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위안은 선하고 옳은 말만 하는 사회가 가장 위험한 사회라고 말하는 대니얼 길버트의 아주 짧은 글이다. 이처럼 별나고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그러나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다른 생각들을 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사회, 그 사회는 아직까지 살만한 사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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