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 개정판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10
메리 셸리 지음, 서민아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지식은 진화 발전하고 있다. 무수히 증식하면서 감당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이제는 더 이상 예측불가능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식이란 바로 그 예측가능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지식의 토대가 되는 예측가능성은 사라지고 있다.  그만큼 무수히 많이 생산되는 지식은 더 이상 객관성과 실용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거꾸로 지식은 인간의 지식이 함의하고 있는 주관성과 자의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지식은 어디에서 출발하였을까?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듯한 이 문제, 사실 자연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이 번개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시작하였듯이. 또한 요즘 생태학이 말하는 생물다양성이라는 개념이 그러하다. 과거에는 받아들여지지않고 인간 중심을 고수하던 세계는 지식 또는 우리의 앎이 확대되면서 우리의 실존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생물다양성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상호연관은 인정되었다.  

지식은 "분류"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지식은 세분화되면서 우리의 앎은 심화되며 우리의 앎을 위한 노력은 한층 가열차진다(과학(science)의 어원이 알다에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과학과 지식과 앎의 행위는 동일하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그런 지식의 확대는 인간의 자신감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 반대의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너무나 많은 지식은 어떤 것이 우선 순위인지 알 수 없도록 하면서 혼란을 가중시키며 더 이상 분류체계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서 세상은 더욱 더 알 수 없는 공간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돈다. 다시 돌아가 생물다양성이 그렇다. 우리가 많은, 다양한, 복잡한 장치를 통해 우리의 주변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에 대한 앎은 심화되는 동시에 혼란에 빠지면서 우리는 과거의 앎에 대해 망각하고 불신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대학생활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에 체득하였던 것에 대한 부정이 현대(근대)의 과학/앎을 낳은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데카르트의 회의하는 이성을 생각해보라. 그 또는 우리의 이성은 엄밀함과 이성이라는 깃발아래 모든 비이성적인 것의 부정과 거부를 낳았다. (헤겔의 부정은 생산적이지만 우리의 부정은 그렇지 못하다.) 

데카르트의 회의하는 이성이 근대과학의 토대가 되면서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선조들의 삶과 생각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의 삶의 부정은 사실 출발 당시부터 적극적으로 수용된 건 아니다. 우리의 이성에 대한 긍정의 출발선상에서 이성에 대한 나아가 인간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것의 부작용이 인식되었다. (빅터의 연금술에 기반한 지식 또한 사실 이런 태도에서 나오고 있다.) 아도르노가 고뇌한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의 출발지점에 있었다. 예를 들어 계몽의 산물인 고딕이 그러하다. 고딕소설이 끊임없이 "알수 없는"(knowledgable)  괴물을 소재로 삼고 인간의 이성의 결과를 문제시하고 있다. 메리 쉘리의 작품이 바로 그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런 상황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과학과 지식의 대변자인 빅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호명한다. 왜? 타자로 관심의 대상이었던 괴물이 이제 중심에 위치한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은 더 이상 자신감에 덤치는 인간의 것이 될 수 없다. 빅터 또는 이성의 산물이지만 비이성적인 존재, 그 괴물이 이제 이야기의 중심에 있게 된다. 생물다양성과 상호연관성이라는 테제아래 그 존재의 정당성은 인정많은 한 비구니 스님의 도룡뇽처럼. 우리는 이제 우리의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단지 소망할 뿐이다. 우리의 이성의 반이성성을 깨달을 뿐이다.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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