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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 을유세계사상고전
노자 지음, 최재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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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의 학자였던 왕필(王弼, 226-249)은 중세 중국의 관념론적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그가 쓴 [노자주(老子註)]와 [주역주(周易註)]는 수ㆍ당 대에 성행했고,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우리가 읽는 대부분의 [노자]는 왕필의 [노자]다. 왕필이라는 천재적인 학자가 주를 달고 정리한 그 [노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정치적 목적에서 공자의 유학에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끌어들였다는 데 있다. 그러다보니 본래의 뜻과는 상관없는, 혹은 본래의 뜻과는 상반된 의미로 왜곡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

 

굳이 원본 [노자]면 어떻고 왕필의 [노자]면 어떤가. 내 삶에 지침이 되고 활력이 된다면 상관없다는 식의 생각도 가능하지 않을 건 없다. 어떤 텍스트 건 읽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재해석이 되기는 마찬가지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노자]가 원래의 [노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여러 사람의 욕망이 투영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도 중요하다. 알아야 맹신에 빠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老子, 마이너스 철학으로 리더를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동양 사상 강좌 후반기를 이끌어갈 강사는 이승률 교수다. 첫날 강의의 제목은 “地下의 노자와 紙上의 노자”.

 

왕필의 [노자]는 ‘紙上의 노자’다. 3세기의 학자가 정리한 [노자]인 것이다. 그러다가 1973년 제후급 무덤인 마왕퇴에서 비단에 쓴 [노자]가 출토되었다. 이름하여 ‘마왕퇴백서(帛書)’라고 불리는 이 판본에 의하면 글자 수는 현행본과 거의 비슷한데, 갑/을 2종의 판본이 존재한다. 한대(漢代)의 예서체로 서사되어 있다. 쓰인 시기를 살펴보면 갑본은 B.C. 206~180년 경, 을본은 B.C. 180~157년 경으로 추정한다. ‘地下의 노자’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3년 곽점이라는 곳에서 출토된 곽점초간(郭店 楚簡)은 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준 모양이다. 연대적으로 가장 오래 된 텍스트가 발굴된 것이다. B.C. 4~3세기로 추정되는 전국시대 초나라 문자로 쓰여진 이 죽간(竹簡)은 현행본 [노자]의 81장 중 1/5 정도에 해당하는 2046字로 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곽점본을 [노자]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텍스트로 본다.

 

老子라는 인물은 전설처럼 베일에 쌓여 있다. 사마천의 [史記] <노자한비열전>에는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출신으로, 성은 李씨고, 이름은 耳, 자는 耼이다. 주나라 왕실 장서실의 사관이었다.”라고 밝히면서 노담이라는 인물이 노자라는 것을 사실화, 역사화하려 하고 있지만, 사마천은 “世莫知其然否”이라고 하여 노자가 누구인지 확신이 없음을 밝혔다. 사마천이 [史記]를 쓸 때 참고한 자료도 결국 [莊子]였을 것이라고 본다면 원래의 [노자]를 알기란 쉽지 않다.

 

이승률 교수는 우리가 [노자]라는 텍스트를 현 상황과 관련된 선입견을 바탕으로 읽으면 원래의 메시지를 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곽점초간(郭店 楚簡)에 권위 있는 학자인 그의 강의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노자의 원래 모습을 좀 더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역사의 흐름과 맞물려 원래의 [노자]가 지금의 [노자]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진진할 것 같다.

 

[참고 도서]

[노자] 최재목, 을유문화사, 2006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 소나무, 2001

[김충열 교수의 노자강의] 김충열, 예문서원, 2004

[노자 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김홍경, 들녘, 2003

[백서 노자 백서본과 곽점본ㆍ왕필본의 텍스트 비교와 해석] 이석명, 청계출판사, 2003

[老子] 池田知久, 2006

[老子註譯及評介] 陳鼓應, 1987
 

http://blog.naver.com/ythsun2 

www.renai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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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70
김교빈.이현구 지음 / 동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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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존재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사상도 문화도 달라진다.

사물을 정지된 상태에서 국부적으로 분석하는 경향이 서구의 세계관을 형성해 왔다면, 동양의 사고는 변화의 실상을 보려는 경향이 있다.

 

동양 사회에서 수천 년 동안 자연과 사회, 물질과 정신을 아우르며 우주 만물의 변화를 설명해 왔던 개념은 기(氣)이다. 기(氣)는 철학적으로는 물질의 발생과 변화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인 틀이고, 한의학에 적용하면 인체의 생리와 병리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된다. 문학과 예술,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기(氣)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이다. 이 대청에 앉아 선비들은 글공부를 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기둥사이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 선비는 산에 앉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실내에 앉아 산을 바라보는 것인가.

 

이 아름답고 묘한 공간을 연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안과 밖을 이분화 시키지 않는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름이 되면 대청마루의 문을 들어 올려 공간을 터놓는 발상. 이런 양식의 문을 분합문(分閤門)이라고 하는데, 우리 고유의 분합문에 관한 특허권을 프랑스의 건축가가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덧붙여 전통 난방 방식인 구들에 관한 특허권은 독일에 있다는 사실.

 

동양화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여백’이라고 한다. 그것은 비어있음이 아니다. 기(氣)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동양적 사고의 특징은 안과 밖이, 자연과 인간이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발상에 있다.

 

김교빈 교수는 8월24일부터 10월 12일까지 총 8회에 걸쳐 <춘추전국과 제자백가>를 화두로 다양한 사상가들과 그 철학에 대해 강의했다. 철학과 사상이 관념적 유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연관되어 있음에 대해 강조했고, 인간과 세상을 보는 눈이 트이도록 이끌어 주었다.

 

서교동에서 ‘문턱 없는 밥집’과 ‘기분 좋은 가게’(http://cafe.daum.net/bobjibngage)를 운영하고 있는 김교빈 교수는 민족의학연구원 원장,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호서대학교 예체능대학 학장 등을 맡고 있다.

 

김교빈 교수의 저술은 다음과 같다.

[이언적:한국 성리학을 뿌리내린 철학자/성균관대학교 출판부]

[가치 청바지:동서양의 가치는 화해할 수 있을까?/웅진지식하우스]

[전통 청바지:옛것은 과연 낡은 것일까?/웅진씽크빅]

[동양철학 에세이:혼란 속에서 피어난 철학의 향연/동녘]

[함께 읽는 동양철학/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하곡 정제두:한국의 사상가10인/예문서원]

[기의 철학/예문서원]

[기학의 모험/들녘]

[한국철학 에세이:인물로 보는 우리 철학의 흐름/동녘]

[동양철학과 한의학/아카넷]

[민족문화와 의병사상/박이정]

[양명학자 정제두의 철학사상:존재론 인성론 사회인식에 대한 구조적 이해/한길사]

[중국 고대의 논리/동녘]

[기의 철학 상,하/예문지]

[중국고대철학의 세계 /죽산]

 

선생님 그 간의 주옥같은 강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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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70
김교빈.이현구 지음 / 동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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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향당(鄕黨)편은 공자의 용모와 목소리를 비롯하여 일상생활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唯酒無量不及亂.

공자께서는 술을 많이 드시되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정도로 해석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띄어쓰기를 하자면, 唯 酒無量 不 及亂이다. 그러나 만약 唯 酒無量 不及 亂으로 띄어쓰기를 하면 망측한 내용이 되고 만다. 공자께서는 술을 많이 드셨고 성에 차지 않으면 난리를 피우셨다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후자로 해석하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고립어인 한자는 조사도 없고 어미변화도 없고, 단어의 품사가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띄어쓰기도 하지 않고, 심지어 문장부호조차도 없기 때문에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공처가(恐妻家)는 아내를 두려워하는 남편을 이르는 말이지만 ‘恐’은 ‘두렵게 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아내를 두렵게 하는 남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후자로 해석하고 싶은 마음만 있지 실지로 그렇게 해석하지는 않는 듯. ^^

 

문제는 이러한 한자의 구조와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 혼란이 더해지면 다툼이 심해지고 말싸움이 더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에 혜성같이 등장한 사상가를 일러 명가(名家)라고 한다. 이들은 名과 實, 道와 器의 관계를 바로잡아 사회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궤변논자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개념’의 오류를 지적하고, 만물의 상대성에 대해 환기했다는 면에서 이들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송나라 사람으로 양혜왕 밑에서 재상을 지냈고, 장자(莊子)와 교유하기도 했던 혜자(惠子)는 명가의 대표적인 논객이다. 그의 역물십사(歷物十事)는 사물을 보는 상대적인 시각을 깨우쳐 준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물을 보는 방법 열 가지 (歷物十事)]

1. 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內 謂之小一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가장 큰 것(大一)이라고 하고,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을 가장 작은 것(小一)이라고 한다.

► 경험세계에만 근거 갖는 상식 부수기

2. 無厚不可積也 其大千里

두께가 없는 것은 쌓을 수 없지만 그 크기는 천리가 된다.

► 두께가 없다고 넓이도 없으리라는 것은 편견

3. 天與地卑 山與澤平

하늘과 땅은 높이가 똑같고 산과 연못은 똑같이 평평하다.

► 만물의 상대성

4. 南方無窮而有窮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 끝이 있다.

► 기준 없는 막연한 주장은 모두 틀린 말

5. 我知天下之中央 燕之北 越之南

나는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지 안다.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이다.

►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중심이다.

6. 今日適越而昔來

오늘 월나라에 가서 어제 돌아왔다.

► 시간이란 상대적인 나눔일 뿐

7. 日方中方睨 物方生方死

해가 막 하늘 가운데 뜬 상태는 막 지는 상태이며, 어떤 존재가 막 태어났다는 것은 막 죽어가는 것이다.

► 사회의 또 다른 모순을 잊고 한 면만 보고 사는 사람들 비판

8.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많이 같은 것과 조금 같은 것은 다르다. 이것을 조금 같거나 조금 다른 것이라고 한다. 만물은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같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을 크게 같거나 크게 다른 것이라고 한다.

► 고정관념에 대한 부정

9. 連環可解也

둥근 고리는 풀 수 있다.

► 상식의 틀 부수는 발상의 전환

10. 汎愛萬物天地一體也

만물을 사랑하라. 온 세상이 한 몸이다.

► 지양과 통일을 거쳐 만물이 하나라는 결론

 



 

명가의 논리는 ‘상식의 탈출’에 있다.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상식 중에는 얼마나 많은 편견이 쌓여 있는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억압은 또 얼마나 많은가. 명가의 사상은 후대로 면면히 이어지지는 못 했지만 ‘비판’이라는 철학의 본질을 일깨워 주었다는 면에서 그 가치는 전혀 퇴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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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빈.이현구 지음 / 동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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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도 살 사람’

심성이 곱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고. 이런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이다. 우리 아버지도 이런 명예로운 타이틀을 훈장처럼 달고 사셨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과연 그런가? 접촉사고가 났을 때, 긴 줄을 서야할 때, 다운계약서를 쓰고 위장전입을 하는 장관후보자의 뉴스를 볼 때,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은 과연 ‘법’없이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오히려 ‘법’이야말로 그 순박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보호 장구가 아닐까. 그래서 옛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법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사람.

 

이번 강의는 법가(法家)에 대한 내용이었다. 관중(管仲), 상앙(商鞅), 한비자(韓非子)로 대표되는 이들 법가의 사상은 진 시황제가 통일국가를 이루고 조직을 정비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가(儒家)의 사상이 예(禮)를 보편적으로 적용하면서 민중을 상향 평등화시켰다면, 법가(法家)는 군주 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인 법을 적용함으로써 하향 평등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군주가 치술(治術)할 수 있는 수단으로 법(法)을 이용했던 것이다.

 

법가의 법 실현은 매우 가혹하고 상세했다. 예를 들면 ‘죄인을 숨겨주면 허리를 벤다’, ‘쓰레기를 버리면 손을 자른다’는 식이다. 以刑去刑이다. 법에 규정된 대로 형벌을 엄격하게 집행함으로써 차후 사소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다. 법은, 두려움에 관한 인간의 심리적 약점을 십분 활용하여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유용한 방법이었다.

 

한비자의 법가 사상을 기반으로 진 시황은 천하를 통일했다. 진나라는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로를 만들고, 분서갱유를 하면서 일사분란하게 나라를 정비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왕국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나라는 고작 15년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 이유를 새겨보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작업이리라. 김교빈 교수는 이번 강의에서 진나라 멸망의 이유를 두 가지로 짚었다. 첫째, 가정 단위로 집단을 조직하여 연대책임을 묻는 식으로 기계적인 법적용을 하여 인간 관계망을 끊어버린 것. 둘째, 전쟁에 소용이 없는 시와 음악은 쓸 데 없다는 논리로 문화의 토대를 없애버린 것.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태도’가 만들어진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게으르다고 규정하면, 선한 상태로 이끌어내기 위해 가르치고 혹은 가혹하게 벌을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며,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규정하면, 그 본성이 드러나도록 기다리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 아니다. 태도를 선택하는 데도 각양각색이 될 수 있겠다. 본성을 찾고 발현시키기 위해 혹독한 수련을 하게 할 수도 있고, 본성을 가리고 있는 사악한 표피를 벗긴다는 명분으로 참람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 ㅠ ㅠ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가 영화화 되었다. 소설보다 소설 같은 실제사건을 재수사해야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합의를 하고 고소를 취하하면 판사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 지금까지의 법 현실이었다. 법은 법일 뿐. 순박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방패가 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순박하지 않고 힘없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술이나 한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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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70
김교빈.이현구 지음 / 동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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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맹자와 묵자처럼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살고, 나이 들면 공자처럼 어질게 살다가, 말년에는 노자와 장자처럼 초월적으로 사는 것이 어떨까.

김교빈 교수는 오늘 강좌를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운을 뗐다.

인류가 주목하는 사상가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묵자(墨子)의 철학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한다. 다만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철학과 사상의 방향은 달라지는 듯하다.  

묵적(墨翟)이라는 이름의 이 위대한 사나이는 공자(孔子)가 타계한 해(B.C479년)에 태어났다. 그는 뛰어난 기술자였고, 하층민 계층에 속했다. 그의 관심은 ‘실제에 있어 사람에게 이로운 일인가 아닌가’에 초점이 맞추어 있었고, 전국시대라는 흉흉한 시절 자신의 기술을 ‘방어용’ 무기를 개발하는 일에 바쳤다. 

묵자를 대표로 하는 묵가(墨家) 집단은 주로 하급 무사나 기술자들이었다. 당시의 기술(과학기술)은 동시대의 서양을 능가하는 정밀함과 정확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 기술을 약소국이 자신의 나라를 방어할 수 있도록 방어용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했고, 오로지 방어를 위한 전쟁만 수행했다. 


묵수(墨守)

묵가집단처럼 철저하게 지킨다는 뜻이다. 방어전을 치르기로 하고 약속을 한 나라를 위해서 그들은 한 치의 예외도 두지 않았다. 문득 로마 교황의 충직한 수호신인 바티칸 스위스 근위대를 떠올리게 했다. 스위스 용병들은, 자신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의 조국 스위스에 용병 의뢰가 들어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고 목숨으로 계약을 지켰다고 한다. 그런데 스위스 용병과 묵가집단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직업의식이냐 철학적 사고냐’라는 것이다.

 

겸애(兼愛)

부모와 형제에 대한 예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유가(儒家)의 사랑 방식은 차별적인 사랑, 즉 별애(別愛)이다. 이에 반해 묵가(墨家)는 차별 없는 사랑인 겸애(兼愛)를 강조한다. 자기를 위하듯 남을 위하면 세상이 이로워져서 결국 그 이익이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순환의 논리를 사랑의 법칙에도 적용했는데, 이는 공리주의(公理主義)와도 통한다고 할 수 있고, 예수가 말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교훈과도 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묵가는 정치적인 평등을 요구했고, 경제적인 평등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들의 삶이 ‘비좁은 네모 방에, 기둥에 조각도 할 수 없고, 벽도 꾸며서는 안 되고, 음식은 질그릇에 옥수수나 조밥이면 족하고, 여름에는 베옷 겨울에는 사슴가죽 옷 한 벌로 만족해야 하고, 살아서는 노래나 오락을 즐겨서도 안 되고, 죽어서도 얇은 관 하나에 초라한 장례를 치러야 하는’ 식으로 인간적인 욕심을 지나치게 통제한 것이 묵가철학의 외연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데 실패한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김교빈 교수는 분석했다.

 

반전(反戰)을 외치고, 이익의 나눔을 몸 바쳐 실천했던 묵가집단. 그들이 무사였기 때문에 집단과 단체의 의리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었는지, 그들이 기술자였기 때문에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했는지, 혹은 그들이 피지배계층이었기 때문에 공평한 세상을 원했는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이후 세력을 잃은 그들이 협객(俠客)이 되어 여기저기를 떠돌지만 그 지향만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기원전 5세기경의 우직한 무리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21세기의 광화문에 선 나는 다소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그 정신이 너무나도 숭고하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ythsu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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