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70
김교빈.이현구 지음 / 동녘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논어 향당(鄕黨)편은 공자의 용모와 목소리를 비롯하여 일상생활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唯酒無量不及亂.

공자께서는 술을 많이 드시되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정도로 해석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띄어쓰기를 하자면, 唯 酒無量 不 及亂이다. 그러나 만약 唯 酒無量 不及 亂으로 띄어쓰기를 하면 망측한 내용이 되고 만다. 공자께서는 술을 많이 드셨고 성에 차지 않으면 난리를 피우셨다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후자로 해석하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고립어인 한자는 조사도 없고 어미변화도 없고, 단어의 품사가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띄어쓰기도 하지 않고, 심지어 문장부호조차도 없기 때문에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공처가(恐妻家)는 아내를 두려워하는 남편을 이르는 말이지만 ‘恐’은 ‘두렵게 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아내를 두렵게 하는 남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후자로 해석하고 싶은 마음만 있지 실지로 그렇게 해석하지는 않는 듯. ^^

 

문제는 이러한 한자의 구조와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 혼란이 더해지면 다툼이 심해지고 말싸움이 더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에 혜성같이 등장한 사상가를 일러 명가(名家)라고 한다. 이들은 名과 實, 道와 器의 관계를 바로잡아 사회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궤변논자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개념’의 오류를 지적하고, 만물의 상대성에 대해 환기했다는 면에서 이들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송나라 사람으로 양혜왕 밑에서 재상을 지냈고, 장자(莊子)와 교유하기도 했던 혜자(惠子)는 명가의 대표적인 논객이다. 그의 역물십사(歷物十事)는 사물을 보는 상대적인 시각을 깨우쳐 준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물을 보는 방법 열 가지 (歷物十事)]

1. 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內 謂之小一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가장 큰 것(大一)이라고 하고,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을 가장 작은 것(小一)이라고 한다.

► 경험세계에만 근거 갖는 상식 부수기

2. 無厚不可積也 其大千里

두께가 없는 것은 쌓을 수 없지만 그 크기는 천리가 된다.

► 두께가 없다고 넓이도 없으리라는 것은 편견

3. 天與地卑 山與澤平

하늘과 땅은 높이가 똑같고 산과 연못은 똑같이 평평하다.

► 만물의 상대성

4. 南方無窮而有窮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 끝이 있다.

► 기준 없는 막연한 주장은 모두 틀린 말

5. 我知天下之中央 燕之北 越之南

나는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지 안다.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이다.

►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중심이다.

6. 今日適越而昔來

오늘 월나라에 가서 어제 돌아왔다.

► 시간이란 상대적인 나눔일 뿐

7. 日方中方睨 物方生方死

해가 막 하늘 가운데 뜬 상태는 막 지는 상태이며, 어떤 존재가 막 태어났다는 것은 막 죽어가는 것이다.

► 사회의 또 다른 모순을 잊고 한 면만 보고 사는 사람들 비판

8.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많이 같은 것과 조금 같은 것은 다르다. 이것을 조금 같거나 조금 다른 것이라고 한다. 만물은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같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을 크게 같거나 크게 다른 것이라고 한다.

► 고정관념에 대한 부정

9. 連環可解也

둥근 고리는 풀 수 있다.

► 상식의 틀 부수는 발상의 전환

10. 汎愛萬物天地一體也

만물을 사랑하라. 온 세상이 한 몸이다.

► 지양과 통일을 거쳐 만물이 하나라는 결론

 



 

명가의 논리는 ‘상식의 탈출’에 있다.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상식 중에는 얼마나 많은 편견이 쌓여 있는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억압은 또 얼마나 많은가. 명가의 사상은 후대로 면면히 이어지지는 못 했지만 ‘비판’이라는 철학의 본질을 일깨워 주었다는 면에서 그 가치는 전혀 퇴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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