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문학동네 시인선 86
김상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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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혁 시인의 두번째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가 출간되었다. 겸사겸사 (김상혁 시인께는 미안하지만) 당시에는 읽다 말았던 그의 첫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2013.3)를 다 읽고,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2016.11)를 읽었다. 


 읽는 내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 사이에 존재하는 3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은 한 사람을, 한 시인을 변화시켰고, 독자된 입장에서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변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는 성(聖)과 성(性)의 이야기로 가득했었다. 시집의 제목에서 말해지고 있듯이 한 편 한 편에 가족의 구성원이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들이 많았고, 화자들은 대개 미성숙한 소년소녀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늘 스스로를 불안해 하고 성적인 것에 호기심을 느끼는 자아들, 그러나 위태로워서, 완성되지 않아서 오히려 성스러움에 가깝던 자아들 말이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는 그런 모습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화자들은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룩한 게 분명하다. 엄마와 아빠를 찾지도 않고, 여성의 다리 사이를 떠올리며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사육제의 밤, 엎드려 기도를 하지도 않는다. 시인은 아마 기쁨의 왕의 입을 빌리고, 슬픔의 왕의 입을 빌려 좀더 세상사에 가까운 이야기를, 깊게 뿌리 내려 더는 흔들리지 않을 말들로 전하고 싶었던가 보다.


 「벌어진 무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흡사 데이트 폭력을 연상케 하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인데, 여자가 옥상에서 뛰어내린 뒤 나렸던 '살점 같은 눈', 그리고 내린 비가 '마음 속 벌어진 무덤'으로 흘러 들어갈 때 '살점 같은 눈'이 섞여 있었다는 표현은 그런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것 같다. 


 「여왕님의 애인은 누구인가」라는 시에서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 엿보인다. 얼음산에서 발굴된 여왕님과 그녀의 몸과 관계하고픈 남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남자들은 여왕의 몸을 주무르며 어떻게든 해보고 싶어 하지만 여왕의 진술은 그녀의 과거와 추억 속에 머무르고 있으며, 남자들 역시 '무슨/가슴이/이리/차갑담!'하고 마는 것이다. 


 김상혁의 두 번째 시집은 시집에 실린 「이것은 새로운 세계」처럼 그 자신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시집이라고 볼 수 있다. 시집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성과 시 속 화자와 듣기로 상정된 청자의 동등한 구도, 그간 수동적으로 혹은 성적 대상으로만 그려졌던 여성성을 좀더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모습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편의 「십일월」중 첫번째 십일월에서 '왜 세계의 윤곽을 그리는 일은 색으로 세계를 뭉개는 일 보다 항상 덜 슬픈가'는 구절이 마음에 남는다. 



http://blog.naver.com/ght345/220853825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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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케이트 윌헬름 지음, 정소연 옮김 / 아작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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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트 윌헬름(Kate Wilhelm)의 소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원제 : Where Late the Sweet Birds Sang)는 1976년 발표된 공상과학 소설이다. 1977년 휴고 상과 로커스 상을 수상키도 했다. 세 개의 파트와 짤막한 에필로그로 이루어졌으며 포스트 홀로코스트로 그 장르를 분류해 볼 수 있다. 소설의 소재인 생태계적 멸망이라던가 인간 복제는 공상과학 소설에서 꽤나 흔한 클리셰이지만 세계를 덮친 재난에 대한 이야기보다 멸망해가는 세계, 그 속을 살아가는 세대의 이야기, 세대 속 개인이 갖는 감정들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점을 갖는다.  

 1부는 점차 붕괴해가는 생태계와 그를 대비하는 데이비드와 그의 가족들(사돈에 팔촌까지 대가족을 이루는), 세계의 멸망 앞에서 어떻게든 사랑을 지키고 싶었던 데이비드와 셀리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2부는 인류의 생존을 잇기 위해 데이비드와 월트 등이 만들어낸 클론 세대들의 삶의 모습과 클론으로 나고 자랐으나 클론이 아니게 된 두 사람, 몰리와 벤의 사랑이야기가 이어지고, 3부에서는 몰리와 벤의 유성 생식으로 태어난 아이 마크가 클론 사회에 섞여들어가 반목하고 그들의 삶에서 스스로를 자유케 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케이트 윌헬름의 비극적인 세계관은 근미래에 고스란히 실현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생생하며 가능적인 세계이다. 동식물들이 생식을 멈추고 인간 조차도 불임하는 시대, 그것은 질병이나 유전적 결함으로 나타나지만 기실 인류를 원인으로 하여 만들어진 질병이다. 또한 데이비드 세대들이 그들의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 인간 복제는 현재로서도 충분히 유효한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복제된 클론들이 원 세대들을 압도해 골짜기의 주도 세력이 된 이후의 삶 역시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들은 같은 세포를 가진 이들끼리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분류하며 언어뿐만 아니라 그들 자매간, 형제간에 공유되는 감정으로 소통한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추우면 닭살이 돋고 더우면 땀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소통체계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롯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존재할 수 없으며 가문처럼 기능하는 형제(자매)의 틀 안에서 여럿이되 하나이며 하나이되 여럿인 존재로 역할 지어진다. 그렇기에 그들은 외로움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클론 사회는 단순 배양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들은 인공수정으로 사람의 수를 늘리고 혹은 통제하는데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씨받이' 역할을 하는 여성 객체들이다. 그녀들의 역할을 말 그대로 골짜기의 형제 혹은 자매들의 유전자를 받아 자궁을 빌려주고 출산을 대행하는 것인데 이는 그들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성을 띈 채 기능한다. 한때는 같은 형제자매였음에도 씨받이가 되면 그들 무리에서 퇴출당하고 마는 것이다. 

 씨받이들은 사회 안으로 편입되지 못한다. 병동에 갇혀 의사들과 간호사들, 씨받이들 서로만을 만날 수 있다. 낮에는 간단한 노동을 하고 혹은 약물에 취한다. 임신이 될 때 까지 수정을 시도당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그것이 당연한 삶이다. 씨받이가 된 이후 그렇게 조정되어졌기 때문이다. 약물 혹은 유전자로 인간을 맘대로 조정시킬 수 있는 미래가 펼쳐진다. 그리고 이러한 씨받이들의 존재는 평등할 것만 같았던 클론 사회에 숨겨진 계급의 일환으로 기능한다.   

 클론 사회를 보면 굉장히 획일화 되어있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그들이 원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의해 누구는 의학적인 분야에 재능을, 누구는 한 번 본 것을 고스란히 따라 그릴 수 있는 재능을, 누군가는 조선을, 누군가는 농사를 한다.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학교에 맡겨 차이를 두지 않으며 섹스를 하되 난교의 형태로, 그러나 놀이의 의미로 나눈다. A 유전자 형제들과 B 유전자 자매들간의 유대를 다지는 단체 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즉 동일 유전자를 지닌 형제, 혹은 자매들의 획일화가 엿보이며,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어긋나는 모습을 띄면 가차 없이 무리에서 추방된다. 말 그대로 골짜기에서 쫓겨나거나 씨받이가 되거나 무리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간주되어 격리처리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몰리나 벤, 후에 등장하게 되는 마크의 존재는 이질적인 것이다. 폐허가 된 도시를 탐험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개인이 되었고, 더이상 형제자매들과 일치된 존재일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몰리와 벤의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특별하다. 스스로 개인의 자리를 성취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위험인자로 분류된 벤이 형제들에 의해 골짜기를 떠나게 되고 마찬가지로 위험인자로 분류되어 섬너 가의 낡은 저택에 감금당했던 몰리가 벤의 아이인 마크를 낳았을 때 마크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클론과 클론의 유성생식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지점에서부터 몰리와 벤이 마크에게 물려준 재능, 다른 클론들과 다르게 형제자매 속에 소속된 존재가 아닌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개인이라는 점에서 마크는 특별해진다. 

남과 다른 존재인 마크가 클론 사회에서 적응치 못해 벌이는 일들, 마크를 받아들이면서 변화된 인식을 선보이는 베리, 미리암, 앤드루의 모습들은 제각각의 의미를 갖는다. 클론들의 사회는 가능성을 멈춘다. 그 누구도 창조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크는 그를 먼저 알았고 무너지는 피라미드에서 빠져나가기로 마음먹는다. 베리와 미리암은 마크와 그들의 공동체를 대하는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지만 그들은 몰리의 두상 조각을 보며 남다른 감정들을 되새긴다. 

 마크가 스스로 골짜기를 떠나게 되었을 때 그가 후에 만들어가는 공동체는 오히려 원 세대의 그것에 더 가깝다. 3부의 뒤를 잇는 에필로그에 짤막한 분량으로 서술된 마크의 공동체는 멸망으로부터 비껴난 희망을 노래하며 "과거의 재창조나 정교한 미래 설계가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을 암시한다. 외로움을 알고, 외로움을 채우며, 그렇게 서로 다르게, 오롯하게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기대케 한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생태계 붕괴와 세계의 멸망, 인간 복제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 소규모 공동체 사회가 보여주는 정치성, 과학기술이 필연적으로 갖는 발전적 가능성과 한계성 등 현대인들이 품을 수 있는 수많은 시의적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던지고 있다. 인물들의 관계성은 세계관 전체를 아우르는 큰 축이며 사랑과 우정 등의 감정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동력이 된다. 첨예하게 대립할 수도 있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화법이 날카롭지 않은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세계의 붕괴'라는 비극적 세계관, 인간 복제라는 클리셰적 소재를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노래로 흥얼거리게 한다. 결코 스펙타클하지 않다. 다만 잔잔하게, 독자에게로 젖어 들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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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토크 1
코니 윌리스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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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알콩달콩한 느낌의 로맨스 소설을 읽게 된 것 같다. 코니 윌리스의 책을 읽는 건 벌써 네번째다. 『화재감시원』, 『여왕마저도』, 『양목에 방울 달기』를 읽었을 때만 해도 코니 윌리스는 좋은 SF 작가 였고 주변을 정말 잘 관찰하는 작가구나 하는 감상이 있었는데 『크로스토크』를 읽고 나니 일상적인 이야기에서부터 ESP, 로맨스까지 해낼 수 있는 작가구나, 작품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 작가구나 하는 걸 느꼈다. 


 『크로스토크』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현재 시점과 시기적으로 많이 겹친다. 영미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주인공들은 실리콘 밸리에 있는 '컴스팬'이라는 회사의 휴대폰 개발자이며 연구자인,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일상적인 직업들을 가졌다. 『크로스토크』 속 연인들은 그들 사이의 공감 능력 확대를 위해 "EED"라는 수술을 한다. 


 소설 속에서 "EED"를 한다는 것은 연인 간의 사랑을 더 명확히 증명해주는 상징으로 통하지만, 주인공 브리디의 가족들은 "EED"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가족들 말고도 브리디에게 "EED"를 말리는 사람이 있는데 브리디의 동료이자 지하연구실 생활자 C.B.이다. 브리디와 그녀의 남자친구인 트렌트는 주변 사람들 모르게 "EED" 수술하는 일을 성공하지만 브리디는 그 영향으로 트렌트와의 공감 소통이 아닌 온갖 목소리들의 홍수, 텔레파시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다. 목소리들의 홍수에 허우적 대는 브리디를 구해준 건 C.B., 브리디는 처음엔 C.B.가 그녀와 트렌트의 소통을 막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계속해 자신을 구하는 C.B.의 모습에 점차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C.B.의 조언에 따라 스스로 목소리의 홍수를 피할 수 있는 안전망을 구축하고 그 과정 중에 자신을 둘러 싼 어떤 미스테리를 풀어나가게 된다. 


 이 소설이 흥미로웠던 지점은 일단 그 어떠한 소소한 단서들도 버릴 데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브리디의 빨간 머리가 아일랜드 계의 유전이라는 것도, C.B.가 끊임없이 외워대던 마시멜로에 대한 부분, 앞서 읽을 때는 별 거 아니게 넘긴 부분들이 뒤에 가면 또다른 사건의 단초나 부속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C.B.를 대하는 브리디의 생각과 태도가 사건을 해결해 나가면서 점차 변화해 나가는 모습이 정말 재밌게 느껴졌다. 


 덧붙이자면 텔레파시 능력자였던 C.B.가 생각해낸 휴대폰 어플의 역할 역시 아주 흥미로웠다. 대화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막아주거나 집중에 방해 받지 않도록 도와주고, 불편한 자리에서는 전화를 핑계로 일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기능, 사람들은 소통을 더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아니라 소통을 절제할 수 있게 해주는 게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싶지만 남들에게 자신은 알리고 싶지 않은 요즘, 차라리 서로가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소통을 통제할 수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자체가 참 예쁘다. 이 소설은 SF라기 보단 로맨스 소설이라고 해야 더 걸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유치찬란한 로맨스에 질렸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연인과 오롯한 공감, 일체감을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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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의 나라 디스에픽 노벨라 시리즈 4
박문영 지음 / 에픽로그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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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와우북 페스티벌에 갔을 때 에픽로그 출판사와 온우주 출판사 부스에서 책을 샀었다. 송경아, 김보영, 정소연 작가가 진행한 포럼 '젠더 문제를 말하는 SF의 방식'을 듣고 난 뒤 한국 작가의 SF 작품이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사마귀의 나라』는 작가에 대한 그 어떠한 정보도, 작품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없이 구매하게 된 책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읽고 난 뒤 나는 지금 매우 만족하고 있다.  


 이 책을 쓴 박문영 작가는 2013년 제 1회 '큐빅노트 단편소설 공모전'을 수상하며「파경」이라는 작품이 실렸고, 2014년 미메시스에서 펴낸 공동창작집 『봄꽃도 한때』에서는 만화 「세 사람이 있는 실내」를 수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사마귀의 나라』는 2015년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분야 대상을 수상했다. 박문영 작가는 글과 그림을 통해 경계 없는 작업을 해나가는 중이며, 우리가 일견 구분지어 생각하는 장르 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을 하고 있다. (박문영 작가가 작품이 많지 않다 보니 책에 실린 서지정보와 박문영 작가의 블로그 wppmy.egloos.com 을 참조하였다.)   


2015년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분야 대상을 수상한 박문영 작가님



 『사마귀의 나라』의 세계는 2083년이라는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굉장히 암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다. 기술적 발전이라던가 그로 인한 희망과 기대 등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먼 소설이다. 이 소설의 장르를 굳이 구분해야 한다면 국지적 포스트 아포칼립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속의 세계는 수많은 국가들이 파산하고 소멸해 나간 상태에서 글로벌한 대기업들의 이윤에 따라 대륙의 경제적이고 영토적인 상황들이 움직이고 있다. 오롯하게 자본만이 세계를 지배하며 단어 '평화'의 의미는 '가격으로 거래되는 품목'에 불과하다. 전체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섬'은 발전 가능성이 없는 탓에 배제되고 외면 당한 곳으로 드높은 벽을 사이에 둔채 육지와 분리되어 있는 곳이다. 마을의 건축물들은 부식되고 점점 폐허나 진배없는 상황, 얼마 남잖은 마을의 주민들은 건강한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질병을 갖지 않은 주민은 존재치 않는다. 

 섬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잊은 지 오래다. 그들은 서로를 서로가 가진 질병의 상징으로 호칭한다. 백내장을 앓고 있어서 '백씨'라고 부르거나 눈이 여덟개가 달려있어 '팔룬', 이가 검어 '이빨', 피부에 일어난 수많은 각질과 반점들로 '반점', 꼬리가 달려 '사마귀',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자식을 자궁에 담았다 하여 '궁', 다리에 병이 들어 '다리'라고 부르는 식이다. 건강한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이 병든자들과 소년소녀들이 근근이 생을 이어가는 곳, 그곳이 이 소설의 '섬'이다. 

 국가는 파산하고 국제기구는 힘을 잃고, 지켜 줄 이도 없고 살아남을 방도도 없던 섬 사람들은 구호물자를 지속적으로 제공받는 조건으로 '동방 유니버설'이라는 기업에 섬의 땅을 판다. 기업은 섬을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으로 만들고 그 사이 섬은 더 빠르게 죽어간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몸에 꼬리가 달린 소년 '사마귀'와 그의 어머니 '궁'은 마을에서 겉돈다. 사마귀에게 꼬리가 달린 것도, 궁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를 아이를 갖은 것도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사기 때문이다. 늘 다른 소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사마귀'는 소녀 '반점'과 조우하게 되고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반점의 남매이자 유일한 가족인 '이빨'은 또래 무리의 대장 노릇을 하는 소년이다. 이빨과 그를 위시로 한 소년들은 사마귀를 마귀와 같이 꼬리가 달렸다며 괴롭히고 해코지를 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행동이 반점으로 하여금 사마귀를 더 애틋하게 생각케 하는 계기가 된다. 

 소설 속에서 엿보이는 소년들의 태도는 저들도 온전치 못하면서 스스로보다 더 약한 자를 괴롭히는 습속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한 자에게는 엎드리고 약한 자는 짓밟고자 하는 강약약강의 모습은 생존을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약자를 짓밟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드높이려는 마음, 허세 등이 자리한다. 

 한편 섬에 방사능을 폐기하는 대가로 구호물품을 보내주던 기업 동방은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구호물품의 질을 떨어뜨리고 두달 즈음부터는 아예 보내지를 않는다. 사람들은 구호물품이 보내지는 양태에 따라 점점 달라져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구호물품이 들어오자 생존을 위한 모든 행동들(농사나 어업 등)을 멈추고 그에 의지한다거나 구호물품의 질이 개 사료로까지 떨어졌을 때 불평을 말할 지언정 그에 순응한다거나, 구호물품이 오지 않게 되었을 때 좌절하고 분노하고 굶주림과 방사능에 의한 피폭으로 목숨을 잃어간다. 

 소설이 말미에 치달을 수록 십여년 전 섬에 흘러들어온 뒤 마을의 대표격을 맡아온 '백씨'와 수양딸인 '팔룬', '궁'과 '사마귀'에 얽힌 이야기들, '반점'과 '이빨'의 이야기, 궁의 아기인 '무무'의 탄생, 무너져가는 섬의 이야기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기업 동방으로 대표되는 육지인들과의 대조점 역시 심도 깊게 생각해볼만 하다. 

 이 소설은 중편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담고 있다. 환경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 배제되어간 약자들에 대해서, 강약약강하고 있을지 모르는 스스로에 대해서, 국가의 역할과 자본의 영향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숙고해볼 수 있다. 

 박문영 작가의 문장은 어렵게 꼬아 쓴다거나 현학적인 사상을 표현한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해하기 쉽게 쓰인 글이다. 그녀가 가진 힘은 서사에 있으며 적재 적소에 배치된 인물들이 힘을 갖고 전체적인 소설을 추동한다. 거기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인물들, 배경들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는 소설 전체를 일관되게 유지시킨다. 

 앞서 이 소설을 읽은 것에 대해 무척 만족한다는 이야기는 언급했었다. 덧붙이자면 박문영 작가를 발견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기쁘게 생각한다. 그녀의 에너지는 지표 아래를 끓는 마그마처럼 침잠해보이지만 무척이나 강력하다. 이 소설을 읽게 된 독자라면 그 힘을 분명 체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박문영 작가의 작품을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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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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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코 작가 하면 '밀란 쿤데라', '프란츠 카프카'와 '카렐 차페크'를 떠올렸던 내게 '보후밀 흐라발'이라는 이름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 역시 '보후밀 흐라발'은 낯선 작가일 것이다. 

 보후밀 흐라발(1914.3.28~1997.2.3)은 밀란 쿤데라로부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체코 최고의 작가"라는 평을 들었으며, 체코에서만도 삼백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세계 30여개국에 번역 출간된 작가이다. 필립 로스는 그를 "현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하나"라고 이야기 했으며, 영국의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보후밀 흐라발은 폭발적인 유머와 고요하면서도 부드러운 디테일을 지닌, 가장 세련된 소설가다. 우리는 흐라발을 읽어야 한다."라고 칭찬키도 했다. 즉 보후밀 흐라발은 이제야 한국에 알려진 것이 이상할 정도로 대단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던 폐지 압축공 한탸의 이야기를 그린 길지 않은 소설이다. 한탸는 그저 폐지를 압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끊임없이 독서하고 사유하며 교양과 지식을 쌓아나간다. 이 소설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늙은 한탸가 되새기고 혹은 꿈꾸는 무수한 몽상들이다. 책과 폐지로 가득찬 지하 작업공간과 2톤의 책이 쌓인 그의 방을 배경으로 그는 훗날 그의 압축기를 가지고 은퇴 뒤의 삶을 꿈꾸기도 하고 첫사랑이었던 만차를 떠올리거나, 그를 스쳐 지나간 어린 집시 여자를 그리기도 한다. 

 한탸의 가족들은 부재하고 부재케 되며(외삼촌의 죽음) 소장은 늘 그더러 일을 좀 하라고 울부짖거나 사정한다. 한탸는 지하실과 집만을 오고가지만 가끔은 외삼촌을 방문하거나 맥주를 마시러 펍에 들르기도 한다. 한탸가 일한 삼십오 년만큼 한탸를 지킨 나이든 압축기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폐지를 압축한다. 한탸는 혼자이나 혼자가 아니며 한탸의 공간은 그럼으로 더욱 고독하다. 한탸의 노동은 매일매일 그 모습이 다르지 않고 한탸의 고뇌는 괴테와 탈무드, 예수와 노자 등을 빌리며 깊어지고 넓어진다. 한탸의 곁을 지키는 건 시궁쥐와 푸른 등을 가진 파리들 뿐이다.     

 소설 속에서 그려진 한탸의 세계는 (읽어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몽환적이다. 주로 한탸의 몽상이 소설 전체를 이끄는 주축이기 때문에 현실에 뿌리 내린 리얼리즘적인 묘사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현실반영적인 이유는 몽상 틈틈이 엿보이는 장면장면 때문이다. 부브니에 등장한 거대한 신식 압축기와 그 압축기를 다루며 일하는 (한탸가 일하는 방식과 너무도 다른 사고방식의) 사회주의 젊은 청년들도 그러하며, 한탸의 곁에 머무르다 어느 순간 사라진 어린 집시 여자가 실은 한탸를 떠난 것이 아니라 게슈타포에 의해 끌려갔다는 사실도 그러하다. 

 즉 해석하기로, 그 누구와도 제대로 된 관계맺음을 하지 않은 채 폐지와 헌책들에 열중하는 한탸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나치 치하의 불안한 현실 사회를 스스로에게서 배제시키고자 했던 무의식의 발현으로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밟지는 않았으나 고전이나 철학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깊은 인물인 한탸는 은거한 지식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이는 현실사회와 유리되려는 은거한 지식인으로 정의해볼 수도 있다. 

 한탸의 말로 또한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줄 수 있을 텐데, 거대한 압축기와 청년 일꾼들의 등장으로 폐지를 압축하는 일에서 밀려난 한탸가 자신의 압축기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장면은 자신이 생을 살아감으로 유일하게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일이 타인으로 인해 배제되었을 때, 스스로 그가 사랑했던 일의 일부가 되길 원하는 욕망을 비추어내고 있다.

 보흐밀 후라발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반어적 제목과 한탸라는 교육받지 못했지만 지적이고, 삶의 비천한 가운데 위치했지만 누구보다도 고결한 인물을 내세워 시적이면서도 역동적이고, 고요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소설을 만들어 냈다. 길지 않은 소설이니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은 독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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