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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ㅣ 문학동네 시인선 86
김상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김상혁 시인의 두번째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가 출간되었다. 겸사겸사 (김상혁 시인께는 미안하지만) 당시에는 읽다 말았던 그의 첫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2013.3)를 다 읽고,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2016.11)를 읽었다.
읽는 내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 사이에 존재하는 3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은 한 사람을, 한 시인을 변화시켰고, 독자된 입장에서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변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는 성(聖)과 성(性)의 이야기로 가득했었다. 시집의 제목에서 말해지고 있듯이 한 편 한 편에 가족의 구성원이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들이 많았고, 화자들은 대개 미성숙한 소년소녀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늘 스스로를 불안해 하고 성적인 것에 호기심을 느끼는 자아들, 그러나 위태로워서, 완성되지 않아서 오히려 성스러움에 가깝던 자아들 말이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는 그런 모습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화자들은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룩한 게 분명하다. 엄마와 아빠를 찾지도 않고, 여성의 다리 사이를 떠올리며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사육제의 밤, 엎드려 기도를 하지도 않는다. 시인은 아마 기쁨의 왕의 입을 빌리고, 슬픔의 왕의 입을 빌려 좀더 세상사에 가까운 이야기를, 깊게 뿌리 내려 더는 흔들리지 않을 말들로 전하고 싶었던가 보다.
「벌어진 무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흡사 데이트 폭력을 연상케 하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인데, 여자가 옥상에서 뛰어내린 뒤 나렸던 '살점 같은 눈', 그리고 내린 비가 '마음 속 벌어진 무덤'으로 흘러 들어갈 때 '살점 같은 눈'이 섞여 있었다는 표현은 그런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것 같다.
「여왕님의 애인은 누구인가」라는 시에서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 엿보인다. 얼음산에서 발굴된 여왕님과 그녀의 몸과 관계하고픈 남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남자들은 여왕의 몸을 주무르며 어떻게든 해보고 싶어 하지만 여왕의 진술은 그녀의 과거와 추억 속에 머무르고 있으며, 남자들 역시 '무슨/가슴이/이리/차갑담!'하고 마는 것이다.
김상혁의 두 번째 시집은 시집에 실린 「이것은 새로운 세계」처럼 그 자신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시집이라고 볼 수 있다. 시집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성과 시 속 화자와 듣기로 상정된 청자의 동등한 구도, 그간 수동적으로 혹은 성적 대상으로만 그려졌던 여성성을 좀더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모습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편의 「십일월」중 첫번째 십일월에서 '왜 세계의 윤곽을 그리는 일은 색으로 세계를 뭉개는 일 보다 항상 덜 슬픈가'는 구절이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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