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알콩달콩한 느낌의 로맨스 소설을 읽게 된 것 같다. 코니 윌리스의 책을 읽는 건 벌써 네번째다. 『화재감시원』, 『여왕마저도』, 『양목에 방울 달기』를 읽었을 때만 해도 코니 윌리스는 좋은 SF 작가 였고 주변을 정말 잘 관찰하는 작가구나 하는 감상이 있었는데 『크로스토크』를 읽고 나니 일상적인 이야기에서부터 ESP, 로맨스까지 해낼 수 있는 작가구나, 작품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 작가구나 하는 걸 느꼈다.
『크로스토크』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현재 시점과 시기적으로 많이 겹친다. 영미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주인공들은 실리콘 밸리에 있는 '컴스팬'이라는 회사의 휴대폰 개발자이며 연구자인,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일상적인 직업들을 가졌다. 『크로스토크』 속 연인들은 그들 사이의 공감 능력 확대를 위해 "EED"라는 수술을 한다.
소설 속에서 "EED"를 한다는 것은 연인 간의 사랑을 더 명확히 증명해주는 상징으로 통하지만, 주인공 브리디의 가족들은 "EED"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가족들 말고도 브리디에게 "EED"를 말리는 사람이 있는데 브리디의 동료이자 지하연구실 생활자 C.B.이다. 브리디와 그녀의 남자친구인 트렌트는 주변 사람들 모르게 "EED" 수술하는 일을 성공하지만 브리디는 그 영향으로 트렌트와의 공감 소통이 아닌 온갖 목소리들의 홍수, 텔레파시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다. 목소리들의 홍수에 허우적 대는 브리디를 구해준 건 C.B., 브리디는 처음엔 C.B.가 그녀와 트렌트의 소통을 막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계속해 자신을 구하는 C.B.의 모습에 점차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C.B.의 조언에 따라 스스로 목소리의 홍수를 피할 수 있는 안전망을 구축하고 그 과정 중에 자신을 둘러 싼 어떤 미스테리를 풀어나가게 된다.
이 소설이 흥미로웠던 지점은 일단 그 어떠한 소소한 단서들도 버릴 데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브리디의 빨간 머리가 아일랜드 계의 유전이라는 것도, C.B.가 끊임없이 외워대던 마시멜로에 대한 부분, 앞서 읽을 때는 별 거 아니게 넘긴 부분들이 뒤에 가면 또다른 사건의 단초나 부속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C.B.를 대하는 브리디의 생각과 태도가 사건을 해결해 나가면서 점차 변화해 나가는 모습이 정말 재밌게 느껴졌다.
덧붙이자면 텔레파시 능력자였던 C.B.가 생각해낸 휴대폰 어플의 역할 역시 아주 흥미로웠다. 대화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막아주거나 집중에 방해 받지 않도록 도와주고, 불편한 자리에서는 전화를 핑계로 일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기능, 사람들은 소통을 더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아니라 소통을 절제할 수 있게 해주는 게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싶지만 남들에게 자신은 알리고 싶지 않은 요즘, 차라리 서로가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소통을 통제할 수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자체가 참 예쁘다. 이 소설은 SF라기 보단 로맨스 소설이라고 해야 더 걸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유치찬란한 로맨스에 질렸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연인과 오롯한 공감, 일체감을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