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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엄마 1 - 영주 이야기, 개정증보판
최문정 지음 / 다차원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240 "....내가 엄마를 세상에 묶어 두는 닻이라고 했었나? 그런데 나는 내가 엄마를 가두고 있는 감옥처럼 느껴졌어. 나 때문에 돈 버느라 힘들고, 나 때문에 끔찍한 결혼생활 버티느라 아프고....그래. 어쩌면 엄마 말처럼 내가 엄마의 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닻이 너무 무거우면 배는 아무데도 못 가니까. 그러니까 이젠 조금 가벼운 닻이 될게. 엄마가 바다로 나갈 수있도록."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불행을 넘어선 불행에 차마 불행이란 단어를 입에 담기조차 망설여지는 이야기...그 여운이 오래도록 가시질 않아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서평을 어떻게 작성해야 세 모녀의 사랑 앞에 내가 느낀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다. 닻별이와 닻별의 엄마 영주, 그리고 영주의 엄마인 선영까지.. 세사람은 서로에게 상처인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세상에 붙잡아두는 닻이었다. 영주에게는 닻별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유였고, 선영에게는 그런 영주가 자신의 존재이유였다. 모질다 못해 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힘든 삶 속에서 그녀들이 견뎌야 했던 상처가 얼마만큼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아픈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니 나 또한 신이 원망스러웠다.
강간당해 영주를 낳고는 미쳐버린 영주의 바보엄마 선영, 언니인줄 알았던 선영이 실은 자신의 엄마였음을 알게 된 후 어떤 호칭으로도 부를 수 없어 마음의 문을 닫은 영주, 그런 영주가 자신을 둘러 싼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듯 결혼한 후 결코 엄마같은 엄마는 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낳은 딸 닻별, 그런 두 사람의 상처를 그대로 물려받아 열살이란 나이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어린 닻별. 세 모녀의 상처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을만큼 그녀들의 줄곧 삶을 따라다녔다.
어린 시절, 우연히 듣게 된 친척들의 수근거림으로 자신이 선영의 동생이 아닌 딸임을 그것도 사랑의 결실이 아닌 범죄의 결실로 생겨난 딸이었음을 알게 된 영주는 그제서야 모든 의문의 풀렸다. 늘 의아했다. 늦둥이로 귀여움을 독차지해야 할 자신이 왜 늘 천덕꾸러기로 미움을 받는지, 어째서 선영을 제외한 가족들이 모두 자신을 멀리하는지도....어쩌다 모인 친척들이 자신을 흘깃대며 지었던 까닭모를 야릇한 미소의 의미를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저 늦은 나이에 자신을 낳은게 민망해서 엄마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가 실은 외할머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엄마라고 부를 때마다 매를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엄마소리를 포기하지 않던 영주는 그 의문이 풀린 후 더이상 엄마라는 말도 언니라는 말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가족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싶었던 영주는 대학도 졸업하기 전 결혼한 후 닻별을 낳는다. 혹시나 하는 우려와 달리 닻별은 아이큐 측정이 어려울만큼 뛰어난 천재로 태어났지만 열살이 되자 세상을 놓아버리려 자살을 시도 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게 된다. 영주가 선영의 맹목적인 사랑이 무서웠던 것처럼 닻별 또한 영주의 사랑이 갑갑하고 부담스러운 동시에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양심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영주의 남편은 수없이 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고 뻔뻔하게도 이혼을 요구한다. 그리고 영주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라고 불러야할지 언니라고 불러야할지 모를 그녀를 데리고 가라는 전화였다. 강간으로 인한 충격에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선영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외삼촌들은 모두 외면했고 영주는 선영을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렇게 10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녀의 병이 모두 나았으니 데려가는 전화에 영주는 선영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영주에게는 차갑게만 대하던 닻별이 선영과 스스럼없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에 영주의 닫힌 마음은 조금씩 열리는데 이제 조금씩 행복해지려는 영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시한부 선고였다.
p.222 그만두고 싶었다. 닻별이가 자살 시도를 할 때마다 빌었다. 그만하고 싶었다. 남편이 바람피울 때마다 빌었다. 차라리 다 그만두게 해 주세요. 내 안에 갇혀있는 엄마가 생각날 때마다 빌었다. 모두 그만두고 싶어요. 다른 기도는 안 들려도 그 기도는 들렸니 보다. 그 생각에 우스웠다. 신은 있을지도 모른다. 미친 엄마 대신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엄마였으면, 천재가 아니라도 좋으니 밝고 건강한 딸이었으면...내 다른 기도는 다 못들었어도 그것만은 들은 모양이었다. 제발 소름끼치는 이번 생을 그만두게 해 주세요. 신에게는 그 기도만 들린 모양이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와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랑도 자식을 향한 엄마의 사랑과는 견줄 수가 없다. 그녀들은 사는 내내 자식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살아가다 죽는 순간에도 남아있을 자식을 걱정한다. 그녀들의 인생에 어느날 갑자기 생겨나 자식이란 이름으로 온갖 생채기를 내고 헤집어도 오로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덮어주고 용서해준다. 사는 내내 쏟았던 사랑만으로도 부족한지 죽어가면서도 자식을 생각한다.
엄마를 이야기한 책들의 대부분이 슬프고 아프다. 가슴을 먹먹하게 울리는 그 숙연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책에는 두 엄마가 등장한다. 그래서 슬픔도 더욱 컸다. 영주는 닻별의 엄마인 동시에 선영의 딸이었고, 닻별을 보며 자신을 향한 선영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제는 엄마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걸 깨달은 순간 이별이 다가왔다. 영주를 통해 세 모녀의 살아온 시간들을 지켜보는 내내 가슴에 돌맹이를 얹은 것 마냥 아파왔다. 이제는 모두가 행복해져도 좋으련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한 평범한 가족이 이들에게는 끝까지 허락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 사랑이 너무나 커 잊는 것조차 쉽지 않겠지만 부디 떠나간 이에 대한 후회와 아픔은 버리고 고마움과 사랑만을 남겨두길 바라본다.
p.267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이 하는 거짓말일 터였다.자장면보다는 찬밥이 훨씬 맛있다고,새 옷보다는 헌 옷이 편해서 좋다고,구멍 난 양말은 바람이 잘 통해 좋다고...말도 안 되는 그 거짓말들을 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중략)...우스웠다. 어쩌면 한 번도 그 쉬운 거짓말들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왜 엄마는 그런 손해나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을까.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엄마니까. 그게 답이었다.그 많은 질문들의 답은 하나였다. 엄마니까. 하지만 내 머릿속엔 아직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 하나가 맴돌고 있었다. 엄마는 내게 얼마나 얼마나 더 많은 거짓말들을 했을까. 나를 위해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삼키며 거짓말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