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름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면 길은 내게 진짜 지름길을 일러준다. 진짜 지름길이란 다만 질러가는 길이 아니라, 질러감으로써 내밀하고 충만해지는 길이다. 닿아야 할 곳에 나를 데려다주되 조급하게 미리 마음만 가닿지 않도록 몸과 마음의 시야를 함께 틔어주는 길이다. 걷든 버스를 타든 진짜 지름길로 접어들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길을 발견하고도 굳이 `빠른 길`로 에둘러가는 이 아둔함을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
- 120쪽

신해욱 시인은 산문집 <비성년열전>으로 먼저 알게 되었다. 이후에 최근 시집 <syzygy>도 알고는 있는데, 시인께는 죄송하지만 산문과 시 모두 나에게는 조금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의 글을, 시를 좀더 알고 싶어지긴 했다. 그래서인지 신문에 쓴 짧은 칼럼들은 유심히 읽어보려고도 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이 산문집은 단순하고 깨끗한 그 제목이나 책의 모양 때문에 호감이 확 생겼다. 아마 내가 유심히 본 그 칼럼들을 갈무리한 것일 텐데, 일정한 분량의 짧은 글들이 꽤나 친근하고 담백하게 잘 읽힌다.

역시 인상적인 한 문단 더.

그러니까 `ㅢ` 위의 `ㅇ`이란 단순한 묵음이 아니라 의자 위에 앉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호일지도. `ㅢ자`에 빈 의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면, `의자`에는 의자에 앉은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일지도. 오늘의 갸륵한 오타가 불어넣어준 소박한 환상이다.
-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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