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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클럽
배수아 지음 / 해냄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내가 이제까지 읽은 배수아의 '작가의 말' 중 이 책의 '작가의 말'이 가장 신선했던 것 같다. 우선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솔직해 보였다. 특히 이제는 '독특함'이라는 표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토로. '단지 '독특함'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엽기적인' 작품이 '연애소설'이라니! 어쩐지 유머 같으면서도 진지했다. 난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런 연애는 흔할 것이다'라는 그의 말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
그렇다. 이것은 연애소설이다. 어찌 보면 아주 통속적인, 그래서 지독한. 사람은 만났다가 헤어지고 사랑을 나눈 후에 거울을 보며자신의 상처를 살피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치마의 튿어진 단을 떠올린다. 그것이 연애이며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삶이다. 한나나 이반이나 무열이나 아방가르드 잡지 편집장이나 그러한 연애 공식에 투철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난 갈비뼈가 부러진 채로 죽어가는 한나보다 안락한 집으로 돌아가 여행을 꿈꾸는 무열이 더 안쓰럽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붉은 손 클럽'에 들어가기에 난 자격 조건이 해당되는가. 난 그 정도로 자유를 꿈꾸며 그 정도로 외로워하며, 그 정도로 이기적인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나만의 신이 없다. 한나에게는 분노와 조급함, 결핍과 냉소의 신이 있다. 그래서 그는 '붉은 손 클럽'의 회원으로 초대받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나태함과 무기력의 신이 있지 않을까?
숨차게 갈증을 달래려는 듯, 후루룩 읽어버렸다. 그래서 시집과 다른 소설을 일단 뒤로 미루고 다시 읽는 중이다. 만약 내가 배수아의 전작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수>를 읽고 <은둔하는 북의 사람>을 읽고 <프린세스 안나>를 읽었기에 이 책을 기다렸던 것이다. 여전히 배수아의 인물은 결핍되어 있고 냉소적이고 그림자도 없어 보이지만 이제는 더욱 구체적이다. 그래서 반갑고 나의 느낌도 구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