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은 자연에 대해 경박한 권위를 행사하여 살충제를 생명들 간에 끊임없는 순환 속으로 유도해 재앙이 확대 재생산된다. 조급한 인간들은 효과도 거두지 못하는 살충제로 천적들만을 없애는 코미디를 만든다.
비용이 얼마가 들건 즉각적인 결과를 원하는 사람들은 의문의 여지 없이 화확살충제를 사용할 것이다...거듭 비싼 비용을 들여야만하는 무제한적 화확방제를 계속 시도할 것이다... 자연 방제법은 한 두 철을 기다리더라도 시간이 갈수록 더욱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결과를 얻을 것이다.p131
원하는 식물만을 먹이로 삼는 곤충의 제한적인 식성을 이용하거나,뿌리에서 곤충을 죽이는 물질이 분비되는 식물을 이용하거나,풍뎅이 개체수 조절을 위해 말벌을 이용하거나...등등 자연적이고 효과적이며 영구적인 방법들이 있지만 살충제 제조업체들은 정부와 유착되어 점점 더 광범위한 해충 구제 계획을 펼치며,뛰어난 곤충학자들은 화학회사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다. 고착된 현실이다.
현대인들의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질병들.그 양상은 다양하나 원인은 단일하다. 질병치료에 쏟는 노력대신 원인 제거가 우선임에도 한 편에선 무자비한 재앙의 씨 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파렴치한 소수가 던진 부메랑을 왜 힘없는 다수가 맞아야 하느냐 말이다.
노자도 도덕경에서 이상으로 삼는 공동체를 '작은 나라에서 적은 백성 수에 남보다 열 배,백 배로 그릇이 큰 사람이라도 쓰지 않고 배나 수레가 있어도 타지 않고,군대가 있어도 진칠 곳이 없고,버린 끈을 이어서 쓰고,거친 음식 달게 먹고,허름한 옷 기꺼이 입고,작은집 편히 여기고,새것이 눈돌리지 않고 살되,이웃나라가 빤히 건너다 보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어도 늙어 죽도록 오고감이 없는 세상'으로 정의했다.
현대 우리의 고민들은 대개 기계에의한 대량화,대규모에서 기인한 것 같다. 인간의 노동력이 충직하게 반영된 물질과 노동의 가치가 성실하게 인정받는 사회와 부패가 쉬 드러나는 집단의 규모. 지구와 인류를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작은 아이가 얼마전 학예 발표회를 했다. 1학기 초에 동아리 활동 부서를택 선택했는데 난 그저 취미활동 내지 특별활동 정도로 이해했었다. 이번 행사와 이런 식으로 연결될 지는 몰랐다.
진행자를 외부에서 섭외했다. 난 멍~함과 어이없음 사이를 오갔다.
1학기 운동회에서 이미 외부에 맡겨진 행사를 경험한 바 있었는데,그 당시엔 요즘엔 다 이렇게 하는가 보다 생각했으나, 변화에 가장 둔감한 영역인 줄 알았던 교육계의 빠른 적응이 좀 썼다. 언젠가 공개수업에 갔을 때 수업이 교사 대신 컴퓨터 화면에 의해 진행됨을 목격후 충격과 거부감,교사의 방만함등 편의주의를 탄 학교의 퇴보가 준 소용돌이로 어지러웠다. 이런 수상한 변화 앞에 학부모들은 아무런 저항이 없었던 것일까.학부모회의에선 대체 어떤 소통이 오가는 것일까. 혁신이 이런걸 의미하는 걸까...
하여튼 이번 발표회 진행자의 저럼한 멘트는, 풋풋하고 생기 넘쳐야 할 발표회를 저렴한 동네 행사로 전락시켰다. 아이들의 수련을 지도하고 현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담당교사는 왜 진행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일까.
작은 아이의 경우는 난타 공연을 했는데 난타 공연은 그날 총3회나 진행되었다. 학년별로 분리시켰다. 인원이 많아 분반했는가 보다. 그런데 왜 학년별로 나눴을까. 난이도 때문일까. 평소에 타 학년과 섞이는 경험이 없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타학년과 어울릴 수 있는 드문 기회였을텐데. 연령대가 다른 이들과 어울리면서, 고학년은 동생들을 지도하며 자존감을,동생들은 동질감이나 소속감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 학생을 죄다 유사한 것들로 칸막음하면서 통합적 사고를 지닌 인재육성이란 목표엔 무슨 신묘한 방법으로 접근하려는걸까. 이런 습관적 분리는 누구의 편의를 쫓는가. 가르치는 자들을 위한 것인가, 배우는 자들을 위한 것인가. 학교가 가르치는 자와 관리하는 자의 편의에만 노골적으로 편중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획일화된 행사들.행사들.
동일 프레임안에 갇혀 갑갑하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