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5일 오후 비가 내려 몹시 걱정을 했다.

강압적인 폭력 진압과 종교인들의 참여에 뒤 이은 ''국민 촛불 대행진'이 저녁 6시에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청와대에서 날마다 기우제를 지낸다더니......) 다행히 오후 4시 무렵부터 비가 멎었다.

5시 50분에 시청앞에 도착해 상황을 살펴보니 덕수궁 대한문 앞의 중앙 무대를 중심으로 태평로 쪽과 시청 앞 광장에 한 무리의 시민이 자리 잡고 있었고 남대문 방향의 큰 길도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람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으며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지난 6.10에는 조금 못 미치는 규모였지만 정말 굉장했다. 짭새 추산 5만 주최측 추산 50만 명. 그러니 대략 (둘을 더해서 이로 나누고 조금 더 더하면) 30만명 가량은 족히 될 터였다.

곳곳에서 나눠주는 촛불과 정권반대 광고물을 들고, '7.30 서울시 교육감 직선' 공고 스티커를 티셔츠 뒤에 붙이고 나는 또 촛불 시위에 참여하였다.

예의 그 '헌법 제1조'로 시작해(집회 내내 한 열 번은 들었다 ㅜㅠ 이제 좀 다른 걸 듣고 싶다) '님을 위한 행진곡' '재협상가' 등이 이어지고 (섭외된) 청소년 발언(청소년 <다함께>란다. 난 청소년도 <다함께>가 있는지 몰랐다 ㅠㅜ), 원불교 교단 발언(전날의 불교 다음으로 오늘 타자는 원불교, 사제단이 가장 재미있고 장엄했으며 그 다음부터 효과 급락, 이날 원불교계의 길고 지루한 낭독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민주노총, 전교조 등 많은 단체와 집단이 무대위에 올라 노래하고, 춤추고, 말했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무대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날은 좀 특별한 의식이 있었다. 예고된대로 '국민승리' 선언이 5분을 멀다하고 이어졌다. 특히 두 명의 사회자 중 최광기가 '국민승리'라는 수사를 많이 활용했는데. 그녀는 그저 "국민이 승리했다!"라고만 고함칠 뿐 그 뒤에 뭘 어떻게 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기대했지만 끝까지 없었다. 그로 인한 혼란은 바로 드러났다. 이날 집회 직후 어제까지는 국민대책회의가 "촛불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또 오늘 오전에 바로 말을 바꿔 "피로감의 극대화와 집회의 동력상실로 촛불을 계속이어가야 할지 논의중"이라고 발표해 버렸다. (이런 된장. 이 새끼들 어쩌자는 거야.)

나는 '국민승리' 선언이 며칠전부터 이어져 온 "이제 그만 집으로 들어가라"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으로 알고 있어 기분이 좀 께름칙했다. 다행히 그런 뉘앙스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뒷맛이 좋지 않았다. 물론 싸움에서 승리의 감각은 무척 소중하고 필요하지만 그것이 과포화되었을때 나타나는 부작용을 우리는 지난 역사(1960년과 1987년)를 통해서 충분히 겪어왔다. 나의 우려는 그런 것이었다. 물론 지난 역사적 경험과 이번 촛불집회를 그대로 포개어 사고하자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을 제대로 작동시키고자 한 것이 지난 역사적 저항들의 모티프였다면 이번 촛불 집회는 시스템 자체의 기능이 정지된 상황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모색하는 시도니까 달라도 많이 다른 것이다) 그래도 강력한 제도와 권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물스물 기어나와 기어코 승리의 달콤함을 사취해간다. 이것을 경계하자는 이야기다.

대책위 측에서 '국민승리'를 외쳐 다수의 시민들을 고무해야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지만 나는 여전히 조금 성급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날의 더위와 습도는 끔찍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엄청나게 모여든 시민들에게 어떤 성취감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낳은 '국민승리' 선언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말은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의 '국민승리'는 정권과 보수진영의 "집으로 들어가라"에 대한 진보진영 선생님들의 다른 버전 "집으로 들어가라"로 들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나처럼 게으른 촛불이 주장하기에는 좀 뭣하지만 나는 "좀 더 계속해야한다"가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명한 태도인 것 같다.

9시가 될 무렵 행진은 시작되었다. 남대문쪽으로 방향을 잡아 을지로 종각을 지나 다시 시청앞 광장으로 모이는 코스였다. 행진의 규모는 대단했다. 행진중 나는 그날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목격했다. 신세계 본점 앞과 한국은행 사이의 분수대 위에 올라 수십명이 '브이 포 벤데타" 코스프레를 한채 침묵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행진의 절정 순간 이들이 쏘아올린 폭죽은 정말이지 이날 가장 아름답고 시원한 광경이었다.  (대부분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그들을 '저승사자'(?)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명박 지옥으로 잡아가라"고 고함치는 분들이 많았다. 이것은 오해로 인한 가외의 효과인 셈이다.^^ ) 그들은 완전 통제사회가 된 미래 영국의 반정부 투쟁의 상징인 '브이포 벤데타'를 코스튬 플레이함으로써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알아보기로 기특하게도 어떤 인터넷 동호회에서 자발적으로 모여, 특별히 의상도 해외에 주문해 갖춰입고 나온 것이라는 데 이날 끔찍한 더위 속에서 정말 고생했겠지만 효과는 만점이었다. 나는 촛불집회의 모습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본다.

촛불집회는 밤새 평화롭게 이어졌다. 며칠전부터 경찰에 의해 시민들은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지만 시민들은 그 광장을 폭력으로 되찾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충돌이 없어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지만 계속 밀려나 자리를 잃어버릴까봐 조금 걱정도 되었다. 마침 오늘 아침 대책회의와 종교인들이 시청앞의 천막을 뜯고 나가거나 내쫒겼다는데 앞으로 삼성본관 뒤쪽까지 밀려려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와 서울시의회를 내줬으니까 남대문 앞까지 밀려나는 것도 전혀 예상못할 바가 아니다.

나는 누차 밝혀왔지만 이번 촛불집회가 거대한 승리의 일환으로 마지막에 모두가 패배했다고 할 수 있는 순간까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언젠가 들어가야 할 촛불이고 그 명분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논의된 대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의 의미를 가지고 나와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재미없게 옛날 노래와 똑같은 발언만 하는 그분들의 '국민승리' 선언은 그 사람들만 집으로 돌아가는 명분이 될 것이다. (온갖 재야인사들의 시국선언과 최장집을 위시한 선생님들의 걱정과 발언들을 상기하자!) 이제 학기말고사도 끝나가고 곧 중고등학생들의 방학이다. 이제 또 어떤 새로운 촛불이 타오를지 모르는 일이다. 그날 여러 시민들에게 감동을 준 '브이 포 벤데타'의 퍼포먼스처럼 새로운 도전과 첨단의 저항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파시즘 정치에 대항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미학을 정치화하는 것 뿐이다. 온갖 예술적 감성과 행위들을 정치적 감각으로 예민하게 다듬어 내보이자.

* 보태기

그리고 그날 최광기는 또 엄청나게 어려운 주문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크게 말하기도 했다. "화물차 운전하시는 분들 미국산 쇠고기 나르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산 쇠고기 판매하는 가게 팔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깜짝 놀라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건 사실 대단히 어려운 생활과 윤리의 문제를 수반하는 고민이어야 한다. 당연한 것 같지만 "나는 그것을 사거나 먹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너는 그것을 옮기거나 팔지 말아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엄청나게 다르다. 나는 지난 대선때 이명박을 지지한 사람도 현재 '반 이명박' 구도에 설 수 있고 어쩔 수 없이 먹고사는 일에 쇠고기가 걸쳐 있는 사람들도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 그들을 전선에서 이탈하게 하는가. 그게 단순히 최광기의 개인적인 발언이었다면 별반 상관없겠지만 국민 대책회의쪽의 공식화된 의견이라면 나는 분명히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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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7-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보태기에서 더 크게 공감했어요. 추천이에요.

나비80 2008-07-07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일전에 마노아 님께서 보내주신 책도 받은 인연이 있는데(기억하실지...) 이렇게 또 인사드리네요. ^^ 뭘 좀 잘 하려고 하는 일에 계속 딴죽만 걸려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걱정인데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있어 다행입니다. 정치적 입장을 정하는 문제에 생활의 문제가 개입될 때가 가장 어렵죠. 앞으로 넘기 어려운 고비들은 계속해서 출현할텐데 걱정입니다. 제도가 전면화 될 때 무너지는 건 가장 약한 고리일텐데 말이죠.

마노아 2008-07-07 19:42   좋아요 0 | URL
<오디세이아>, <사랑해 파리>, <소년의 눈동자 1939>, <마키아벨리 어록>
요렇게 고르셨어요^^
근데 그 후 제가 처음 남긴 댓글이란 말인가요? 어머 세상에! 줄곧 즐찾이었는데 말이죵^^;;;;

나비80 2008-07-0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맞습니다.
사실 제가 남의 집에 몰래몰래 드나드는 버릇이 있어서 흔적을 잘 남기지 않습니다.
체형은 곰인데 하는짓은 고양이랍니다. *^^*

네꼬 2008-07-08 15:42   좋아요 0 | URL
뭣이? 행동은 고양이라고요? =^^=

*
저도 저 승리 얘기 좀 그만 했음 좋겠다, 귀 따가워 죽겠네, 그리고 발언 시간 좀 정해놓고 하면 안 돼? 애들은 짧게 잘도 하는데 "우리 방학했다. 긴장해라" 이렇게, 노래 좀 바꿔 주지.... 등등으로 입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글에 추천을 안 할 수가 없어요.

:)

나비80 2008-07-09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 님 앞에서 고양이 주름 잡았네요.

유쾌하고 발랄한 상상력은 어떤 영향력에도 구속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 좀 철없는 이야기 같지만 저는 그래도 계속 그 상상력을 지지할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