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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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아무리 노동운동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일 것이다. 자신의 이기가 아닌 오로지 핍박받던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1970년 11월13일 22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외침과 함께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붇고 불을 붙여 분신투쟁하며 성직자와 같이 죽어간 말그대로 불꽃같이 살다간 청년 전태일...

 

그동안 노동문제에 대해 얘기할때면 으레 입에서 나온곤했던 낯익은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전태일열사의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는 도통아는 것이 없었음을 시인한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단지 근로조건개선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받친 즉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단지 그부분에만 관심을 가지고 초점을 맞추어 전태일열사를 가슴속이 두지 않않나하고 내 자신을 반성해보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전태일열사에게 그런 극단의 결정을 할수 밖에 없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도대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이기에 아무리 당시 상황이 최악이었다곤 하나 분신이라는 끔직한 방법을 생각하고 실천할수 있었는가라는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그로 인해 열사의 이름을 입에 올릴 자격도 없는 놈이라는 내 자신에 대한 비난이 결국 이 책 '전태일 평전'을 선택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조금은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무지한 노동역사와 노동운동에 대한 지식의 허영심을 채운것은 차재로 하고라도 열사 또는 투사가 아닌 전태일 이라는 하나의 인간을 만나면서 가슴 벅차면서 많은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열악한 환경속에서 생존해나가는 유년시절....너무나 배움에대한 열망이 커 하루에 14시간이나 지옥같은 공장에서 일을하면서도 최저생계비를 털어 구입한 책을 공부하며 밤을 지새웠던 그러면서 언젠가는 꼭 대학교를 가겠다는 현실불가능한(?)희망을 놓지 않은 청년시절...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가장 놀란것은 바로 전태일의 필력이었다. 물론 예외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고정관념의 눈을 가진 나는 이 책을 읽기전에는(책서평에따르면 대부분의 글이 전태일열사의 일기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한다) 그래도 초등학교와 중학교1년 정도만 마친사람인데 필력이 그리 감동적이이기야 하겠어?라는 무의식적인 생각이 있었던걸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몇페이지도 읽지 않아 큰 오산으로 밝혀졌다.

그동안 많지는 않지만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집필한 노동에 관련된 책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않을 아니 그들과 비교해서도 한참이나 상위의 필력을 가졌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을 정도로 전태일 열사의 필력은 나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였고 눈물흘리게 하였다.

 

단지 이것이 그의 글쓰는 재주가 선천적으로 뛰어나서 그런것인가? 결단코 그건 아니다. 전태일의 일기에 수록된 글을 보면 '참된' 진심이 느껴진다. 단지 남들에게 잘보이고 유혹하기위해 화려한 수식어로 장식된 그 어떤 책보다도 훨씬 크고 참된 진심이 느껴진다. 그렇다. 진심이란것에 그어떤 장식이 필요하겠는가? 진심이란 말그대로 화려하게 장식된 가식이란 굴레를 벗어던져야지만이 탄생할수 있는 것이지 않은가?

 

희망의 가지를 꺽인채 존재의 대가로 물질화된 인간상을 나는 증오합니다....라고 정확하진 않지만 전태일의 일기속에 적혀있는 이 한마디가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내내 내 머리와 내 가슴속에 메아리친다.

존재하기위해 스스로 물질화되어가는 인간들...자기 자신에 대한 주체성을 부정하고 아니 부정해야만하는채 굴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

그리고 그런 선택을 용이하기위한 촉매제 역활을 하는 인간을 물질화하는 사회 혹은 시대...

 

과연 전태일이 바라본 이런 사회현실과 이에대한 분노가 비단 그시대 즉 암울한 군사독재시절이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인간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가 비단 그때 뿐이었는가?....나는 자신있게 말할수 있다...아마 현재가 10배 아니 100배는 더할거라고...

 

그 시대에는 그래도 인간을 물질화시키며 고립시킬려고 하는 주체는 분명했다. 그렇기에 전태일은 싸울수 있었다. 바로 자본가들과 그들을 비호할려고 하는 국가를 상대로 싸웠다. 이와 같이 싸울 상대가 분명했기 때문에 전태일은 진정하고 호소하고 설득하고 싸울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너무 거대하고 강했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몸을 던질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태일은 '상대를 가지고'싸운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인간을 물질화 하는 세상이란것은 누구나 인정할것이다. 그 사실에 분노하고 바꾸고 싶은 마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지고 있을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가지수밖에 없는 주체성조차 없어져서 굳이 그런 마음조차 들지않는 사람들도 최소한 부정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럼 이제 Ъ싸울 상대 즉 인간을 물질화하는 아주 고약하다 못해 악마같은 상대....누구인가? 눈에 보이기만 하면 전태일열사와 같이 분신투쟁은 못하더라도 내 몸 아끼지 않고 물어뜯고 싸울준비가 되어있는데...그 상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가?

 

세상이 많이 발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이 살았던 시대에 걱정했던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전태일이라는 한 인간은 그 당시의 암울하고 빈곤한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이라고 떠드는 인간들도 있다.

 

과연 전태일이 돈좀 더 받겠다고 그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끝내 자신의 생명까지 받쳤을까? 그깟 돈이란것이 전태일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게 만들었을까?

물론 돈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은 간혹 있기는 하다. 물론 아픈현실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때문이었다면 전태일이라는 한 인간이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들 머리와 가슴속에 남아있지도 회고되지도 았았을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태일은 위에서 언급했던 바로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를 증오하고 그 존재의 대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가지고 살아가야할 주체성을 버리고 스스로를 물질화하는 인간상에대해 환멸을 느끼고 거기에 대항하여 투쟁한것이아닐까?

 

그럼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있는 시대는......?? 시대까지 거창하게 갈필요도 없이 당장 대한민국은?? 더 좁게는 우리 주변은??

 

답답하다. 차라리 아무리 강해도 너무 강해서 전태일열사처럼 자기의 목숨을 던질수 밖에 없는 상대일지라도...Ъ?상대가 있었으면 이렇게 답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떤 국가기관이나 어떤 기업나...이런것들은 요즘세상에는 적으로도 보이지 않는다..상대적으로 말이다...누구랑 비교해서?? 먼 사람부터 가까운 사람들인 가족 친구 심지어 배우자까지 물질화시키고 있는 우리 하나하나랑 비교해서 말이다...

 

요즘사람들 권리의식 높아졌다고 각종 신문과 방송에서 떠든다..웃음밖에 안 나온다. 주체성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자기애 자존심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을, 주변 사람을 물질화하는것 자체에 모자라 축산된 소고기 돼지고기에  하듯이 자기자신과 사람들에게 등급과 값을 매기는 우리들 자신들을 보고 있으면 차라리 배고프고 억울하고 싸울 상대가 분명했던 그 시대가 그립다.

 

마지막으로 책커버에도 기재되어있는 전태일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결정을 한 그당시의 심정을 표현한 자신의 일기 한 구절을 적으며 글을 마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전태일의 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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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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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대한 무지때문이겠지만 이 책을 발견하게된건 최근의 일이었다. 그것도 어떤 계기에 의한 문학소설에 대한 관심때문이 아니라 영화개봉소식지에서 이 보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이 책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는 1985년에 출간되어 저 세계적으로 천만부 이상 팔린 말 그대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존재를 지금에서야 인지한것만 보아도 나의 문학소설에 대한 의도하지않은 배타심을 옅볼수 있었다.

 

 물론 문학소설을 즐겨읽는 일반독자들이 문학소설을 읽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대상과 방법과는 약간은 다른방식으로 그것들을 해석하고 받아들인것은  읽기 전부터 예상했었고 읽고 난 후에도 그 예상을 깨뜨릴수 없었다.(언제쯤 문학을 문학자체로 받아들이고 가슴따듯해질수 있을까? 희망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인거같다)

 

우선 이 책 서문 아니 저자소개란에서 난 적잖은 시간을 보냈다. 정확히 말하면 흥미롭게 생각할 시간을 보냈다고 해야겠다. 일단 대부분의 문학소설에서 처럼 작가 사진이 없었다. 단지 책표지 디자인측면에서 그런것인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난후 작가 소개란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일단 작가가 사진찍히는걸 싫어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각종 문학시상식에서 많은 수상을 했음에도 단 한번도 그 자리에 모습을 나타낸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울증같은 정신적인 병이 있는것도 아니다. 친구들 아니 진짜친구들(그냥 친구들이라고 하기에는 사회통념적으로 친구라는 개념이 너무 평가절하되어있기 때문에 부득이 앞에 진짜라고 붙인다) 사이에서는 굉장히 다정하고 유머스러운 사람이라고 한다.

 

그럼 이유가 뭘까?? 도대체 이유가 뭐길래 의도적으로 세상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을 피할까??답은 이미 정해져있고 물론 나도 그 답을 잘 알고 있다. '인간에 대한 환멸'

결국 자신이 신뢰할수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진실되고 진정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극히 배타적인 설사 그들이 부와 명예라는 꿀을 준다고 해도 마다하는...그 꿀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위해 주는것이 아닌걸 알기에...

단지 책이 성공해서 자기네들에게 많은 부와 명예를 안게 해주었기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의 작가에 대한 나의 평가는 내 자신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 책의 저자 생각 또는 가치관일수도 있다는 것이 이 책을 다 읽고 난후 확신이 생기게 되었다.

 

이 책이 여타 문학소설 구성 방식과 또 다른 점은 바로 서문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서문이 없는 이유를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알게된다. 서문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앞으로 진행될 책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주고 나름대로의 복선을 제공하는것이 그 목적아닌가?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미 이 작가는 작가 소개란에서(물론 형식적으로는 자신이 작성한것은 아니지만) 그 서문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본다.

 

이 책에 등장하는 향기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주인공인 쟝 바스티스 그루누이를 통해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주인공인 그루누이는 위에 언급한것처럼 향기에 대해서만큼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니 태어난것이라기 보다는 생존해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태아상태로 쓰레기통에 버려진상태에서 울음을 통해 살아남았기에....

 

처음에는 왜 하고많은 천재들중에서 왜 향기 즉 냄새에 대한 천재일까?하고 의아해 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석견과 그 재능에 찬사를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왜 향기일까'가 아니라 '아! 향기일수 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누구나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고유한 냄새 즉 향기가 있다. 즉 50억인구가 생김새가 똑같이 않듯이 그 냄새도 마찬가지로 모두 다르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유없이 호감을 느끼고 또는 이유없이 혐오감이 느껴지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유없이 신뢰감을 가지게 되고 또는 그 반대로 불신을 가지는 것을 종종 관찰하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도 경험하는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이유없이라고 표현했지만 굳이 그이유를 설명해보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사람들이 시각에 그 비중을 둔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은 호감가는 생김새를 가져서 혹은 혐오스러운 생김새를 가져서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때로는 객관적으로 혐오스럽게 생겼지만 이상하게 호감가는 사람이 있다. 물론 어떤 대화도 하지않고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정보도 없는데도 말이다.

작가는 그 이유를 시각이 아닌 후각에 그 비중, 아니 그 이유 전부를 둔다. 전부 각각의 저 마다의 사람들이 가지는 고유한 향기때문이라고 저자는 그 전제를 두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다시말하면 호감가는 향기를 가진 사람은 그 어떤 추악한 외모를 가지더라도 사람들에게 호감을 끌어낼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향기를 자유자재로 인위적으로 만들수 있다면? 위에서는 단순히 호감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강도를 심하게하여 호감정도가 아니라 자신에게 굴복하고 미치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자기 몸에 뿌려 사람들로 하여금 맡게한다면? 아마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 어떤 전쟁 테러보다도 무섭게 하지만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할수도 더 나아가 지상의 신이 될수도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을 통한 정복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지만 이 향기를 통한 지배는 순전히 자의적이기에....

 

바로 이책의 주인공인 그루누이가 바로 이걸 깨닫고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그런 향기를 만드는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살아가는 아니 생존해나가는 향수제조자이다.

 

일단 그는 고독하고 세상과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지않는다는 점에서는 다른 여타 천재들과 비슷하다. 보통 천재들은 자신만의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그 어떤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학문적 성과를 이루기 위해 몰두한다. 즉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한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원한다. 하지만 이점이 이 책에 등장하는 천재인 그루누이와의 차이다. 

 

이 세상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혐오하고 쓰레기 오물보다 더 못한 존재로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부대끼며 산다는 사실 그자체를 큰불행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는 그속에서 생존해나간다. 그들에게 그 어떤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랑속에서 태어나야될 태아상태에서도 버려졌고 살아가면서 단 한번도 인간이라면 느껴야될 그 어떤 따뜻한 감정도 가져보지 못한 그루누이가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다만 자신이 생존했고 생존해나가는 이유, 즉 소명이라는 것이 바로 더럽고 혐오스럽지만 그안데 조재하기때문이다. 그 악취가 나는 사람들속에 간혹 아직 그 악취에 물들지 않은 향기가 있기에....(이부분에서 내 자신도 악취를 많이 풍기는 사람인줄은 알지만 왠지모르게 주제넘게 희망을 느꼈다.)

 

하지만 그 향기를 찾고 그 향기를 만드는 기술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향기를 사용하는 동안 주인공은 철저히 고독하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제3가자 봤을때 쓸수 있는 단어일 뿐이고 정작 주인공 자신은 그렇게 지내는 것이 행복했다.(이부분에서 주인공이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도 그럴것이 악취를 풍기는 대부분의 사람과 함께 뭔가를 한다는 것이 즉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그에게는 얼마나 큰 고통이겠는가?

 

절대적 이기심! 이런 주인공을 두고 감히 쓸수 있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소한 자신의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개념인 이기심이 아닌 순수하고 절대적인 이기심....너무나 순수하고 절대적이라서 악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갓태어난 애기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책은 재미라는 측면에서도 큰 점수를 주고싶다. 작가의 훌륭하고 거침없는 문체로 진행되는 스토리는 잠시라도 눈을 땔수가 없을 정도였다.

 

진정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친구 아니 진정한 친구가 아니기에 모른다. 하지만 책을 출판했다는 것은 그 해석은  최소한 이 책을 본 독자에게만큼은 자유를 허용한것이 아니겠는가? 난 이 책을 통해 이 작가를 나의 진정한 친구로 삼기로 결심했다. 아니 정확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이 작가의 생각과 그 세상속에서 살아가기위한 가치관(물론 내 멋대로 추측하는 생각과 가치관이기는 하지만)을 진정한 친구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빠른시일안에 이 친구의 다른 작품들을 모두 경험하고 그 자품들을 통해 그 친구와 좀더 깊은 교감을 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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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웨이트트레이닝
삼호미디어 편집부 / 삼호미디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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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림을 통해 일일이 자세하게 설명되있어서 보기 너무 편했다.

그리고 단순히 운동 폼을 가르쳐주는 것 뿐만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어떤 형태로 얼마나 해야하는지 어느정도로 쉬어야 하는지 그리고 각각의 운동사이의 상호관계를 알려주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데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인 것 같다.

그리고 초보자 중급자 고급자 각각을 분류하여 단계별로 운동을 배울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책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운동을 하는데 필요하거나 해가되는 식이요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감히 웨이트트레이닝 종합서라고 부를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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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스펜서 존슨 지음, 형선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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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한창 베스트셀러에 등재되었던 약 5개월전에 읽어 보았던 책이다. 그 당시에도 이 책의 약발(?)이 떨어질때 쯤이면 꼭 다시 읽어봐야지하고 생각하고 예상했긴했는데...5개월이라....선방(?)했는거 같기는 하다..^^

 

 그렇다고 현재의 내가 이 책을 읽을 당시처럼 과거에 얽매여서 허우적거리거나 미래에대한 불안함으로 스트레스의 나날을 보내고있는건 아니다. 단지 그 구렁텅이로 가는 초입단계쯤에 있다고 해두는게 솔직한 대답인거 같다. 내 인생의 커다란 장애가 될 그 구렁텅이에 다시 한번 빠져 고통을 경험하기에는 너무 무섭고...사실 그럴 시간도 별로없어서 경험보다 더 큰 인생의 보약(?)은 없는줄 잘 알고 있지만 차선책으로 다시 한번 이 책을 읽는것을 택했다.

 

 이 책을 보는 순간 제일 먼저 내 관심을 끈것은 내용보다는 책 제목 이었다. 제목 자체만봐도 내용을 보지 않고도 대부분 이해할거 같은 그런 탁월한 제목이었다. '선물'...영어로는 'present' 제목처럼 선물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현재' 그리고 동사로 쓰일때는 '(선물등을)제공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모든 뜻을 합쳐보면 '당신에게 제공된 선물인 현재'라는 의미로 볼수 있는데...얼마나 탁월한 제목인가?

 

그렇다..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은 얼마나 '현재'가 선물처럼 기분좋고 행복한 것인지...그리고 그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것에만 집중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해가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

 

 물론 현재만 중요하고 과거나 미래는 터부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행복과 성공의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현재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과거보다 더 나은 현재를 위해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 필요하고 현재에 보다 더 충실하기 위해 미래를 계?하는 것이 필요한것처럼 과거나 미래는 단지 현재를 위해 존재하는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잘못되었던 잘되었던 과거에 연연하며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고통받으며 살아간다. 그 원인이 인과적으로 당연히 현재의 삶을 불충실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들고 또 그 현재가 후에 또다시 연연하게 만드는 고통스런 과거가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내가 왜 그랬었지'하며 고통받고  '그땐 잘 나갔었는데 지금은 왜 이모양이지'하며 고통받는다. 이와같은 좋은 과거든 나쁜과거든 불문하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과거를 회상하면 고통만 있을 뿐인것이다. 이런 고통이 현재의 삶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는 간음도 못할정도로 엄청날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일에 실패한 사람은 '내가 다시 한번 성공할수 있을까'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사람들은 '내가 진정한 사랑을 찾을수 있을까' 등을 걱정하며 현재의 삶을 고통스럽게 보내고 그 고통이 현재의 삶을 불행하게 그리고 정작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야될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자 시간인 현재에 불충실하게 만든다.

 

 우린 현재를 살아간다. 이미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순간은 과거가 되버렸고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커서가 움직이고 잇는것이 바로 현재다. 이 글을 다쓰고 난 후 잘 다듬어졌나 확인하기 위해 아마 처음 이 글을 시작한 부분부터 읽어볼것이다. 그리고 다시 다른 글을 쓸때는 보다 완성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정도는 과거로부터 배운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약간 느슨해진 나의 '현재'를 위해 미래를 계?하는일도 과거로부터 배우는것만큼 중요한 일일 것이다. 불안해하든 하지않든간에 미래에 어떤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정도로 유동적이다. 그렇다. 말 그대로 유동적이다. 유동적이란것이 무엇인가? 어떤 영향에 따라서 그렇게 영향을 받는것을 뜻하는것이 아닌가? 그렇다. 이 미래라는 유동적인 물질을 움직이는 영향이 바로 '현재'가 아니겠는가?

즉 미래에 대한 자신만의 로드맵을 그리고 그 길에 따라 충실하게 현재를 운전해 나간다면 반드시 그 로드맵의 종착지인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찾을수 있을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독자들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새로운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어릴때부터 어른들에게 무수하게 많은 말들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적은 글들도 어디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나 나올법한 내용이다. 그래서 '그걸 누가 몰라?' 라고 비웃으며 다시 현실로 돌아갈수 있을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조금 살아본 사람이라면 느낄것이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건 이미 초등학교에서 다 배웠다고.... 그 뒤부터는 올바르게 배운 그것들을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심들을 위해 왜곡시키고 터부시한것 뿐이라는 것을...

 

 이 책 내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아무나 할수 있는건 아니라는 것을...결국 현재 우리가 몸소 느끼고 살아가는 '현재'의 행복을 위해 과거에 연연해 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해서도 불안한 마음을 벗어던지고 현재 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그 중에서 나에게 가장 올바르고 필요한 것들에 집중하며 살아간다면 또 다른 나의 현재가 될 미래가 지금보다는 훨씬 성공적이고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할수 있는 것은 아닐것이고 그 선택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몫일 것이다.

 

 나는 '누구나'처럼 사람이지만 '아무나'가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떤 많은 부와 명예를 원하는 의미가 아니다. 좀더 하루하루가 행복하며 과거에대해 불평하지 않는 관용심과 그리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지 않는 당당함을 가지고 싶은 소망이 있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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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색 - 한국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요즘들어 부쩍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친구와의 술자리에서도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또는 왜 그럴까'라는 주제로 술안주를 삼고있는 중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정답이 없을거라는 것을 알기에 어떤 해답을 찾고자 이 책을 선택한것은 아니고 단지 같은 인간을 이렇게 환멸스럽게 만든 수많은 원인들 중 현대사회가 이에 미친영향 그리고 이렇게 될수밖에없는 인간세상의 역사에 대한 고찰따위정도를 알고싶어였고 과연 이런저런 원인들이 순수하기 그지없는 인간을 변모시킨건지 아니면 원래 인간은 더럽고 추악한 동물인데 단지 환경이란것이 본질을 드러내게 한것인지에 대해 현대사회비평가의 선구자중에 한사람이라고 할수있는 강준만교수의 의견을 알고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간 특히 한국인의 인간관계라는 큰 전제를 깔고 그 인간관계를 구성하고 형성해나가는 구성체중 큰부분을 차지하고있는 사랑 욕망 청춘 진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세부적으로 이들이 현대 우리나라 사회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실제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지에 대해 설명해 나가고 있다.  

 

 사실 인간은 반드시 어떻게 생각해야하고 어떻게 행동해야만한다는 원칙은 없다. 하지만 최소한 그 나라의 관습 또는 수천만년동안 이어져온 역사를 통해 배운 윤리 또는 도리라는 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예를들어 사람이 사람을 죽인것을 보고 나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나쁜것이 아니라 법이전에 인간의 도리에 반하기 때문에 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살인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범죄가 그렇다.

 

 그럼 법에 정해져 있는 범죄 외에도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수많은 구성체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지 않을까?

 

 예를들자면 사랑, 우정 등에 대해서도 누구나가 진실하고 진정한 순백같은 사랑 우정을 원하지 않는가? 계산기를 두드리고 상대방을 기만하고 오만하고 이기적인 사랑 우정을 바라는 사람은 없는게 당연한 사실이어야 되지 않는가? 즉 이러한 감정들을 일컬어 '인지상정'이라고 감히 말할수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현대 우리나라사회의 현실은 이러한 인지상정이라는 개념이 너무나 잘 쓰이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정반대로 말이다.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직업(아니 실제는 직업이 아니라 그 직업이 버는 돈이겠지만 )이 좋은 사람선택하는거 인지상정아니겠어? 라든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거라면 친구 또는 국민에대한 신뢰를 깨뜨려도 인간이 다 그렇게 이기적인거지 즉 인지상정아니겠어? 라든지말이다.

 

 물론 편한건 좋다. 이걸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인지상정이라고 불을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신뢰를 바탕으로 맺는 인간관계에서 만큼은 그 어떤 물질적인 불순한 편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개입하지 않아야하지 않을까?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관계에서 그것들이 없어지면 어떻할건가? 주변을 보면 그런것들로 이루어진 관계에서 그런것들이 사라졌을경우 그들이 저지르는 짓거리(?)가 어떠한것이지 종종 관찰하게된다. 정말 역겹기 그지 없는...물론 상대방도 같은 종이면야 자초위난이겠지만..

 

여기에는 현대사회에서 빠뜨릴수 없는 대중매체의 힘도 한몫한것임을 무시하지 못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영되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불륜만이 진정한 사랑이고 자아찾기라는 식의 스토리, 능력이고 노력이고 성실이고 다 필요없이 돈많은 부모 만난 재벌을 만나 팔자고치는 신데렐라를 조장하는 스토리, 내면보다는 외모에만 신경쓰면 모든것이 해결된다는 식의 사치를 조장하는 스토리,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있으면 배신따위는 별문제가 안된다는 식의 스토리, 정당한 권위는 무너뜨리고 돈 지위가 지배하는 신권위주의를 조장하는 스토리 등등......

이런 정크들이 시청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지는 두말하면 입아플정도로  엄청날것이고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대해 생각하면 현기증이 날 정도이지 않겠는가??

물론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피디들은 변명한다. 드라마는 현실조장이 아니라 현실반영일 뿐이라고.....결국 닭이 먼전지 달걀이 먼전지하는 유치한 순환론일뿐....

 

흔히들 인간의 생명처럼 이 세상에 영원한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곤한다. 영원한 사랑도 영원한 우정도...지극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전제를 인간의 감정에만 두면 말이다. 하지만 이 감정이란것과 진실되고 참된 마음이랑은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불쑥 불쑥 예고없이 나타나고 또한 예고없이 사라지는 감정이란것은 그 속성상 유한것이 당연할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갖고싶던 전자제품을 사도 몇년만지나면 처음샀을때 느낀 그 벅찬 기쁨이 없어지는것처럼 말이다.

 

이에반해 진실되고 참된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동물의 본능과 같은 냄비같은 감정과는 달리 참된 이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이성을 뭍사람들이 혼용해서 사용하는 계산적인것과는 결코 혼동해서는 안될것이다. 참된 이성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수는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신뢰'라고 하고싶다.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신뢰를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는것 이것이 나와 상대방 사이에서 상호작용할수 있다면 사람들이 절대 없고 있을수도 없다는 영원하고 참된 사랑 우정등도 이루어질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의 감정을 두고 사랑이네 우정이네라고 착각하고 여기에 기초해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니 유한할수 밖에...과연 결혼까지 했다고 해서 아님 이혼하지 않고 끝까지 살았다고 해서 이런 냄비같은 감정에 기초한 사랑을 극복했다고 더 나아가 이런 사랑도 영원할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을까?

 

 여기까지는 나의 개인적인 소망 또는 절실히 바라는 유토피아적 꿈일 뿐이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맺어가고 유지하는 인간관계라는 것을 보면 어느새 앞에서 언급한 단어처럼 이룰수 없는 유토피아적 꿈일뿐이라는 생각이 절로 생긴다. 여기에서 '대부분'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아무리 이룰수 없는 유토피아적 상상일 뿐이라도 어딘가에는 예외가 있겠지라는 아직 산날보다 살날이 많은 나의 인생에 대한 배려때문이다.

이런 배려라도 없다면 정말 산에라도 들어가야할 지경이니 말이다.

 

 이글 처음에도 언급했던것처럼 이 책을 통해 해답을 찾을것을 단 1프로라도 기대하지 않았고 역시 이 책도 그런의도로도 쓰여진책이 아니었다. 만약 여느책처럼 일도양단식으로 '내말처럼 생각하거나 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라는 의도로 쓰여진 책이었다면 사보지도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책말미에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해 조금 아니 유토피아적 꿈만이라도 가지고 있는 나 또는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기대치도 않은 해결책(?)이 있어 원문 그대로 인용해본다. 최소한 이 내용만 100프로 이해하고 생각할려고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면 문자그대로 '최소한' 내 자신만큼은 지킬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눈물이 날려고 하는건 왜일까?

 

 배신을 당한 사람들이 꼭 명심해야 할 게 하나있다. 자신이 당한 배신의 상처를 광고하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어리석다는 말만 들을 뿐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다. 아니 원초적으로 동정할 수 없게끔 돼 있다. 이게 바로 배신성의 특수성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에서건 픽션에서건 배신에 대한 응징이 주로 살인으로 나타나는건 배신의 상처가 남의 공감을 받기 어렵다는 점도 크제 작용하기 때문이다.

 

 배신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배신의 주된 이유가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익'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유념하여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이익'의 몫을 키우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는 것이다. 그게 부질없다고 생각한다면 대범한 관용을 키우는 것이다. 배신의 상처에 괴로워하면서 남의 동정심을 구걸하거나 자신을 소홀히 하는 건 자신이 자신에 대해 또 한번의 배신을 저지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배신을 당한 사람은 술 한잔 마신 후 노래방에 가서 배호의 <배신자>를 힘껏 불러보는 것도 좋겠다.

 

정말 석견이면서 통탄할만큼 슬픈 현실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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