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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안 -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 9인의 단편집
미야베 미유키 외 지음, 한성례 옮김 / 프라하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혈안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 9인의 단편집 『혈안』이 출간되었다. 개인이 아닌 여러 명이 모인 미스터리 단편모음집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그 동안 줄곧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국내의 특정 소설상 수상 작품집이 아닌 장르문학으로 단편집을 낸다는 점은 늘 신선하다. 아직까지 국내에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이상한 편가르기 현상이 이런 책을 이른바 마니아만 읽는 책으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장르문학 단편집이 나왔다는 점은 이런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다. 장르문학에 조금 더 다가서고 그 세계를 이해하는데 긍정적인 기회로써 분명하다.
한 작가의 작품을 여러 편 읽어야 그 작품 세계를 헤아릴 수 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단편소설 한 작가를 만나는 건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일지도 모른다. 사실 한 작가의 장편소설을 읽기보다 여러 작가의 단편집을 보는 게 더 힘든 면도 있다. 가독성은 높을지 모르지만 방금 읽은 앞의 소설과 이야기가 중첩되거나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어야 하는 비효율적인 독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작품씩 곱씹어보면 읽어야 그나마 작품을 이해하고 생각하는데 알맞을 테다.
「혈안」
미야베 미유키
단편집 『혈안』은 작가 9명이 모였다. 마치 야구의 타순과 같다. 1번 타자는 「혈안」이다. 요즘 들어 국내에서 유명한 해외 작가가 있다. 바로 미야베 미유키이다. 지난 해 작가의 소설로 만든 영화 <화차>가 이름값이 부쩍 치솟았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익히 알고 있는 존재였지만 잘 몰랐던 독자들에게는 영화로 작가의 존재가 분명해졌다.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면 다양한 장르를 넘다 들며 굉장한 필력을 선보이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름값을 기대하는 듯 야구의 1번 타자처럼 출루를 위해서 미미 아주머니가 선봉에 섰다.
「혈안」은 ‘혈안’이라는 요괴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요괴보다는 가상의 신, 사람들이 만들어 낸 무형의 신이나 마찬가지이다. 혈안은 눈이 50개이며, 혈안과 약정을 맺으면 도박에서 끗발을 날리고 딴 돈은 흥청망청 써야 한다는 이상한 속설이 전해 내려온다. 특정 집안만 아는 혈안은 가훈처럼, 집안 내력처럼 이어져 내려오면 틀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재미있는 점은 미신에 이야기를 붙이고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면 그것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다는 현상이다.
「혈안」을 읽으면 이웃동네 어느 집을 연상케 한다. 이 이야기는 작가는 지어냈는지 실제로 일본 어느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통설화인지는 모르겠지만 토속신앙에 가까운 이야기여서 조금 더 관심이 간다. 역시 미미 아주머니라는 말을 나오게 한다.
「미도로 언덕 기담 - 절단」
아야쓰지 유키토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 9인의 단편집 『혈안』은 일본 추리소설의 명가 ‘카파 노블스’가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하였다. 각 단편에 숫자 ‘50’이 눈에 띄는 이유도 그러하다.
사실 「미도로 언덕 기담 - 절단」의 아야쓰지 유키토는 생소한 작가다. 책 날개에 있는 작가 약력을 살펴보고서야 얼추 이해할 뿐이다. 전혀 모르는 작가를 만날 때의 기분은 소개팅에 어떤 이성이 나올지 만큼이나 궁금하다. 주인공은 본격 추리소설 작가이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점점 감퇴한다. 줄곧 살아온 곳에 대한 이른바 도시 정보가 대학 때 온 부인보다 없다. 기억력 때문인지 관심이 없는지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가 급선무다. 주인공은 일종의 직업병처럼 누군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그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낱낱이 물어보는 성향의 소유자다. 남들이 보면 꽤나 성가셔 보이지만 추리소설 작가로서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 문장이라도 작품을 쓰는데 도움이 되면 어느 것도 가리지 않는다. 그가 기억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현상은 나이 탓이 아니라 너무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시키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병원에서 들은 엽기 토막 살인사건이 그의 귀를 쫑긋하게 한다. 시체를 무려 50조각으로 자른 무시한 사건의 이야기다. 작가는 시체 토막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가끔 뉴스에서 들려오는 토막 살인의 방법을 조목조목 알려주는 불친절한 내용을 서술한다. 주인공은 그냥 넘기지 못한다. 추리소설 작가이기 때문이다. 형사와 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숫자가 50이 아니라 51이 맞지 않느냐는 등 형사 앞에서 더 형사다운 추리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할 일 없어 보이지만 직업의식이 투철한 작가가 확실해 보인다. 머릿속으로 계속 사건의 결말을 풀어내려는 의지는 참으로 독특해 보이기도 한다.
「신신당 세계일주 – 영국 셰필드」
시마다 소지
개인적으로 단편집에서 가장 눈여겨본 작품이다. IQ가 50에 시력이 좋지 않아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지만 꿋꿋이 버텨나가는 개리의 이야기는 가슴 뭉클하다. 요즘 국내에 학교 폭력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점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한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개리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어린 시절, 지금의 아이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에서 핵심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이다.
“뭔가 하나라도, 다른 사람들은 불가능하지만 너만 가능한 일이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162쪽)
바로 이것이다. 남들과 다른 무엇, 남들보다 잘 하는 무엇 찾기이다. 실제로 사람은 남들보다 나은 것 하나쯤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본다. 환경에 따라 도드라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열쇠일 테다. 더불어 이것을 끄집어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식구든, 친구든, 선생님이든 누군가가 건드려줘야 빛을 발하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개리의 아버지가 이 역할을 한다. 아버지는 개리의 힘을 보고, 역도를 시킨다. 개리는 누구보다 힘을 잘 쓴다. 좌절하려고 할 때는 그 동안 짓밟힌 세월과 사람을 상기시킨다. 개리에게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힘만큼이나 설움이 있다. 두 가지가 합해서 누구보다 센 모습을 드러낸다.
이 소설을 읽으면 미스터리라는 장르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단편소설처럼 추리, 신비, 살인 등 아무것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가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 현실을 미스터리로 등장시키는 듯하다. 불편한 진실처럼 말이다.
「여름의 빛」
미치오 슈스케
미치오 슈스케는 최근 일본에서 가장 주목 받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문장이나 전체 흐름을 보면 이 작가가 장르문학 작가인지 갸웃하게 한다.
소설은 오이할멈과 완다의 앙숙관계를 주로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빛이라는 자연 물질이 어떤 현상을 빚어내는지 카메라에서 빛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만큼인지 드러내고 있다. 어느 날 오이할멈과 완다가 시끌벅적히 싸움을 벌인다. 문제는 완다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한 사진으로 완다가 죽었다는 걸 확신하는 주인공은 범인을 찾는다.
장르문학보다는 청소년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흔히 장르문학은 문장이 조금 떨어진다는 선입견을 주저 앉힐 정도이다.
「하늘에서 보내 준 고양이」
모리무라 세이치
국내에는 증명 3부작으로 유명한 작가 모리무라 세이치.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면 촘촘히 얽혀 있는 내용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하늘에서 보내 준 고양이」는 6~70년대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하는 농어촌 청년을 연상케 한다. ‘집 떠나면 개고생한다’는 광고 문구처럼 아오바 요시오는 성공을 쫓아 도쿄에 온다. 지방에서 대학까지 나왔지만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다. 큰 결심을 하지만 고생 길만 훤하다. 막상 도시로 오면 살 길이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기대만큼 실망도 크다. 도시는 도시만의 법칙이 있는 듯하고 자신보다 잘 난 사람으로 가득하다. 자신가 처지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만 눈에 더 잘 띈다. 심지어 돈을 소매치기 당하여 첩첩산중이다. 어느 날 자신이 우연히 말을 걸었지만 의외로 친절을 베푼 스기무라라는 여자가 죽는다. 이 일로 여러 사람이 걸려들고 진술을 해나가는 과정이 전개된다.
사회범죄 소설로 앞서가는 작가답게 사회문제를 소재로 삼아 독특한 이야깃거리를 배치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미치오 슈스케와 모리무라 세이치는 단편집의 4, 5번째에 자리를 잡아 야구에서 4, 5번 타자처럼 힘 있는 한방을 날려주는 듯하다.
「눈과 금혼식」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 소설은 역시 50이라는 숫자에 맞게 금혼식이 등장한다. 금슬 좋은 부부의 이야기, 동서의 살인이 제재이다. 가장 좋은 날에 최악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범인은 누굴일까.
사건을 풀려면 실마리를 찾아내야 한다. 먼저 제목에 나왔듯이 눈이 있다. 눈에 찍힌 발자국, 눈을 덮은 눈, 남편의 기억상실, 기억상실은 기억이 새하얗게 된 것과 같다. 이것들을 나열해보자 사건을 풀기가 여간 쉽지 않고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듯하다. 비(雨)를 소재로 하여 글을 쓸 수도 있겠지만 눈은 수분이 빙결되어 생긴 물질이다. 녹으면 다시 액체가 된다. 고체이지만 액체라는 성격을 둘 다 지녔으니 사건은 확실히 굳은 일이지만 자칫 물처럼 어딘가로 스며들지 모른다.
소설을 끝까지 읽으면 마지막 부분에 뭔가 재미있는 실마리가 나올 것이다. 기대하라.
「50층에서 기다려라」
오사와 마리마사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를 보면 ‘카이저 소제’라는 인물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영화를 봤다면 결말을 알 테다.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가 실제로 드러난다. 「50층에서 기다려라」는 ‘드래곤’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실체는 없다. 소설을 읽어가면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 유명무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입 소문 마케팅이 활발하다. 보이는 광고보다 들리는 광고가 더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기법으로 활용하고 있다.
「오래된 우물」
다나카 요시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유령도, 저주도, 재앙도 믿지 않아. 오로지 인간의 악의를 믿지. 인간의 악의는 밤보다도 어둡고 오래된 우물보다도 훨씬 깊어. 거기서 검은 손이 뻗어 나와 갑자기 사람의 발목을 잡는 거지.”(417쪽)
한참 이 소설을 읽고 있다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지 하는 생각을 했다. 끝부분을 읽고 나서야 작가 하고자 하는 말을 십분 헤아렸다.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이를 염두하고 책을 읽으니 이해의 폭이 조금 더 넓혀졌다.
우물이라는 소재가 화수분 같기도 하지만 메우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한다. 계속 읽어보자.
「미래의 꽃」
요코야마 히데오
흔히 말하는 보험금을 타려고 남편을 죽인 아내의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뭔가 다르게 재미있게 보려는 시도를 한다. 갈수록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