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문학의 공간 L’espace littèraire』 中, 「Ⅰ부 본질적 고독」

《죽어야 끝나는 이야기와 죽어서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괴수 • 공포 영화 등을 보면, 누군가 죽어야 이야기가 끝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주인공은 최후에 살아남는 확률이 높고, 주위의 인물들만 자의든 타의든 생을 달리한다. 흔히 ‘죽어야 이야기가 끝난다’라는 식이다. 일종의 ‘러시안 룰렛(Russian roulette)’ 게임과 같다. 한 사람은 분명히 극단의 결말에 이르러야 한다.   

문학도 누군가 죽어야 하는 게임이다. 작가는 문학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그것에 의해 뒤로 물러서야 한다. 대체로 러시안 룰렛의 총알은 작품이 아닌 작가로 향한다. 작가의 본질적 고독은 작품과의 힘겨운 줄다리기에서 뒤로 물러나야 하고, 죽어야만 하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생기는 심리적 압박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매번 사점(死點 • dead piont)을 많이 겪으면서, 한 편의 작품을 마무리 짓는다. 다음 작품에서, 그 다음 작품에서 재생 – 창작 / 살아남 - 과 소멸 – 작품 속으로 밀려남 / 죽어야만 함 - 의 반복적인 과정을 겪는다. 작품은 작가의 분신이면서, 다른 개체이기도 하다. 다만 홍길동의 분신처럼 한 명이 사라져도 마지막에 원형 – 작가 - 이 남는 경우와 다르게, 작품은 새로 늘어나지만 원형 – 작가 - 이 희미해진다. 작품은 작가가 어떤 식으로든 죽어야만 끝나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죽을 수도 없는 존재이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없는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할 말이 없으면서도, 작가가 되길 원하거나 작가로 남길 원한다면,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문학의 공간』 中, 「Ⅰ부 본질적 고독」에서 작자는 쓴다는 것에 대해서, 말을 내뱉는 사람에게서 비롯하고, 이 말은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말은 본질적으로 끊이지 않으므로, 이것을 못하도록 막거나 침묵을 강요할 수는 없다. 마치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는 말처럼, 작가는 할 말을 가지고 끊임 없이 이야기를 써야 하므로, 죽어서도 할 말은 끝나지 않는다. 작가 생전에 남긴 작품이, 사후에 다른 의미를 갖고 여러 해석이 가해지는 건, 역시 작가의 이야기는 죽어서도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고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자신의 작품 활동을 멈출 수 없는 현실이다.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눈을 감아야 하는 부모는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작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작품을 남겨두고 죽지 못하는 기로에 서 있는 존대들이다. 작가들의 욕망은 바로 그것이다. 아직까지 자신의 언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포기하지 못하고, 죽지 못하는 것이다. 

작가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은 작가들의 글을 쓰는 동기는 대체로, ‘순전한 이기심 –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 -,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 -, 역사적 충동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 -, 정치적 목적 –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 –‘  때문이라고 한다. 위에 언급한 네 가지는 작가를 끊임없는 미로 속으로 빠뜨린다. 작가의 욕망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할 말이라는 대체물로 나타난다. 할 말은 죽어야 끝나거나 죽어서도 끝이 나지 않는 양가적 특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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