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내가 흠모하는 필립 시무어 호프만의 [카포티Capote] 때문이었다. 못생겼지만 연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카포티]가 동명 작가에 대한 영화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지인은 그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소설을 썼으며, [앵무새 죽이기]로 유명한 하퍼 리(본명은 넬 하퍼 리)와 친분으로도 유명하다고 귀뜀해 주었다. 마침, 알라딘 대문은 카포티의 걸작이라고 회자되는 [인 콜드 블러드]가 출간되었음을 나에게 알려주고(혹은 요즘말로 뽐뿌질해주고) 있었다. 이때부터 책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연쇄살인, 잔혹살해는 최근 개인적으로 대중문화 섭렵의 중요한 코드/기준의 하나가 되었다. TV 시리즈건 영화건 소설이건 이런 내용이면 꼭 챙겨본다. 과학수사와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프로파일링의 세계는 레슬러의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를 본 후 나의 한 구석을 강하게 사로 잡았다. 물론, 프로파일링은 호기심의 단계일 뿐 그것을 넘어서는 지식이나 식견이 나에게는 없다. 레슬러의 책, 그리고 프로파일러들의 삶을 과장해 보여주는 [크리미널 마인드]만 봐도 그 세계는 감히 ‘범인凡人’이 넘기 두려운 뭔가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넘을 수 없는 선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은 항상 나를 유혹한다.
트루먼 카포트의 [인 콜드 블러드]는 1959년에 미국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해사건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화자를 거의 배제한 서술과 빠른 호흡으로 연결되는 장면들 덕분에 읽는 맛이 남다르다. 영화 대본 작업을 많이 해본 사람이어서일까? 장면 전환의 묘와 이야기 서술의 명료함이 두드러진다. 특히, 초반 전반부, 즉 살인 사건의 두 범인인 리처드 히콕과 페리 스미스, 그리고 희생자인 클러터 가족에 대한 서술은 거대한 비극으로 치닫는 두 집단의 궤적을 잘 재현하고 있다. 직접 읽는 것 자체가 커다란 즐거움인 이런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무모하고도 불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책에 대한 느낌은 크게 두가지다. 우선, 트루먼 카포티의 탁월한 저널리즘적 상상력이다. 역자의 후기에도 드러나지만, 카포티의 이 책은 철저히 ‘사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책에 소개되는 대화나 묘사가 취재에 기반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사실인지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때로는 상상이나 창작이 사실을 넘어서기도 한다. 특히, 사실만으로 사건을 이해하기 힘든 경우에 그러한데, 이때 상상력의 역할은 사실 만큼이나 중요해진다. 이러한 상상력의 개입은 도가 지나치지 않는 다면 사실을 재구성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한다. 상상력이 지니는 이러한 역설적인 구성의 힘을 느끼기에 이 책만큼 좋은 표본도 없을 터다.
둘째, 두 범인이 클러터 가족을 살해하고 잡힌 이후 부터의 서술은 그 밀도가 다소 떨어진다. 책 제목처럼 “냉혈한”을 다루려는 카포티의 시도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는 흔적도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범인들을 동정하게 된 것일까? 리처드 히콕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인디언 태생에 외모와 가족에 대한 복잡한 컴플렉스를 지닌 페리 스미스에 대해서는 동정어린 시선이 분명히 느껴진다. 사법 체계 내에서 범인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카포티는 인간적으로도 그러할까,라고 묻고 또 묻는다. 재판이 보다 뒤의 시대에 이루어졌다면, 페리 스미스의 잔혹한 행위가 부분 정신 이상으로 진단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시사하는 부분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 [카포티]는 이 책을 쓰면서 트루먼 카포티가 느꼈던 이러한 인간적인 떨림을 보여주고 있다. 클러터 살해사건은 야심적인 저널리스트로서 가장 먹음직한 사냥감이었을 터다. 하지만, 그 사건의 속살은 관찰자에게 말할 수 없는 고뇌를 안겨주었다. 어찌보면, 저널리즘의 걸작 [인 콜드 블러드]는 악마와의 계약이 만들어낸 저주다. 카포티는 자신의 남은 인생을 담보로 이 책을 완성했다. 영화는 이러한 카포티의 변화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책과는 다른 방향에 놓여 있다(아마도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화는 다소 무덤덤하고 어설퍼 보일지도 모르겠다). 악마의 도움으로 금단 너머를 기록한 카포티는 책 이후 단 한 작품도 쓰지 못했고 1984년 약물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당신이라면 이런 계약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