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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
오다 마사쿠니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배경인 후카이가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그것은 책들의 자리를 함부로 바꾸지 말 것. 책들에도 암수가 있어서, 책들의 자리를 함부로
바꾸었다가는 새로운 책들이 탄생하고 만다는 것이다. 처음에 책 소개를 들었을 때 나는 '학문의 경계를 넘은 지식의 융합'정도를 생각했다. 과연
책들이란 실제에서도 교접을 하고 새로운 지식들을 만들어내곤 하니깐. 하지만 역시나 이런 지루한 명제를 가지고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450페이지에 걸쳐서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책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단순한 명제를 넘어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고 있었다.
속세는
물론 현세마저도 벗어나 지에 대한 집념으로 사후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이니, 이 도서관에 딱 맞는 비유 아닐가. 어쨌거나 영원히 배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예지의 낙원처럼 보이지만, 한펴으로는 역시 지옥이 아닐까. 꿈 속에서 히데노리가 예언했던 것처럼, 이곳은 지식에 굶주린 영혼이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가지고 떨어져 아직도 모르겠다, 아직 부족하다고 미래영겁 고통에 몸부림치는 불가능의 지옥이다.
-337p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책이 가득한 서재는 환상의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책에는 이 세상이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하는 무수히 넓은 세상이 펼쳐져있고, 그 지식들 속에서 향유하는 일은 스스로 영혼을 고양한다는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지식에
대한 갈망, 사랑. 이 책은 바로 그런 이들이 주인공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만, 서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다. 그렇다면 이목을 피해 밀회를 거듭하고, 때로는 서책의 몸으로 페이지를 섞어서 방사에도
힘써, 심지어 대를 이을 자식도 낳는 것이 당연한 이치, 터럭만큼도 기억에 없는 책이 시침 뚝 때고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어라'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일은 간혹 가다 있으나, 꼭 깜박깜박하는 머리가 그 책을 산 기억을 고스란히 상실한 탓이라 할 수는 없으며 실제로는 그 같은
성인의 사정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 -5p
어떠한 깨달음의 내용들이 끊이지 않고 몰아치고 있으나, 내가 이 글에 옮겨쓸 수 있는 문장은 몇
되지 않을 듯 싶다. 이 글을 옮긴이도 그렇게 후기를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남의 입으로 듣는 후기보다 먼저 책을 직접 읽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공감한다. 내가 여기서 어줍잖게 몇 마디 옮기는 행위가 내가 느낀 감동의 일부조차 전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오히려 그 감동을 감소시키고 말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익숙치 않은 일본식 이름과 어디가 내용이고 어디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정신없는 글임에도 불구,
이 책의 흐름은 이다지도 깔끔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매끄럽게 읽혀진다. 자신의 조부인 요지로의 이야기를 자신의 아들인 게이타로에게 전해주는
방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환서에 대해 소개할 듯 시작하여 후카이家, 아니 세상에 숨겨진 어떠한 비밀을 폭로하듯이 결말을 맺는다.
쓴 사람은 없는데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환서. 그 환서는 기이한 탄생과정만큼이나 기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때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이야기, 때로는 장난스러운 거짓말을 담기도 하지만, 숨겨진 과거를 폭로하거나 미래를 예언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 환서이다. 그리고 이 금기와 같은 환서를 접한 자들은 때때로 세상의 역사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담은 환서를 우연히 손에 넣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에 가만히 책을 하늘로 날려보내줄 것인가. 미래를 알고 그 미래의 가능성을 내 멋대로 바꾸어볼수 있다는 것은 조금
두렵기까지한 일인듯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내 책장속에 자리하고 있는 책들을 평범히 볼 수 없었다. 무엇인가
알수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책을 감싸고 도는 듯한 기분이 들어, 책을 덮고 초서를 위한 노트까지 꼭꼭 잘 덮지 않고는 쉬이 잠들지 못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마치 아침에 눈을 뜨면, 책꽂이에 꽂아두지도 않은 이 책이 혼자의 몸으로 잉태하여 기억에도 없는 책이 천장을 파닥거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앞으로 환서에 담긴 비밀들을 엿보게 될 확률도 전혀 없겠지만, 이 책에서 담으려고
했을 (아마도), 책이라는 존재의 놀라운 능력이 새삼 새로이 느껴지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