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든 라일락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밤에 만나는 라일락은 연보랏빛의 소우주다. 봄밤의 고즈넉하고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꽃잎을 보노라면 인간세상의 근심과 걱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라일락의 깊고 진한 향에 취한 탓이다. 하나의 계절이 가고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하려고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는 거대한 생명들의 향연을 아낌없이 즐기는 밤이다.

 

봄의 밤은 나의 곁을 함께 걷는 그 사람의 상처를 살피고 보듬어 주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내 숨겨둔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등가교환이 이루어진다. 더이상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 울지 말기를, 낙관은 할 수 없어도 닥치지 않은 미래 때문에 두려워 도망가지 않기를 기도한다.

 

겨울 지나 봄이 오고, 곧 여름이 밀려들 것이다. 낯설지 않다. 혹서에 묵은 상처가 덫나 붓고 열이 날 수도 있다. 염증을 치료하는 고통에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증을 외면하거나 놀라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상처는 칼로 째고 약을 바른 뒤, 천천히 기다리면 낫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수없는 봄의 밤을 지나왔다. 이제 여리여리하던 마음은 돌처럼 단단해졌다. 경험과 시간은 무기가 되었고 이기적인 고집은 배려하고 살피는 이타성을 습득했다. 어떤 날, 어떤 계절, 시간이라도 견디고 버틸 준비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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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느리고 여유롭게 흐른다.

모든 사념을 내려놓은 몸과 맘이 완벽하게 쉬는 때이기도 하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만 굳이 떠오르지 않는 말을 이어가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여백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놔둬도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는 건 커피를 가운데 두고 있어서다.

무언의 약속처럼, 테이블 혹은 아무 공간 어디라도 한 잔의 뜨거운 커피가 존재하는 순간, 주변은 고요해지고 일시정지 상태가 된다.

커피는 당신과 나의 무중력의 공간이자 쉼터다.

 

커피는 고대로부터 전해 온 마법이다.

심연에 깃든 검은 영혼의 손짓과 향을 거부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끌리는 이유다.

사랑한다, 동경한다, 라는 감정 그 이전의 태생부터 혼에 새겨진 인과 같다.

이 드넓은 우주에서 길을 잃었을 때, 홀로 고독이 사무칠 때, 기쁠 때, 혹은 슬플 때,

커피는 어김없이 검고 뜨거운 숨을 내쉬며 다가온다.

마치 통속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영원히 언제까지나 너와 더불어 살겠노라고

살며시 손을 잡고 안겨드는, 유일한 내 삶의 반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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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반복이 무너지기 시작할 즈음, 몸이 아프다는 걸 마음이 가장 먼저 알아챘다. 몸의 무거워지면 마음은 하던 일을 중단하라고 지시한다. 가만히 가만히 쉬면서 기다리라고, 함부로 행동하고 센 척하지 말고 몸의 고장을 찾기 전까지는 꼼짝도 못하게 한다. 그러면서 혼낸다. 무리했던 일들을 끄집어 내어 조목조목 따져들며 큰 목소리를 낸다.

 

몸과 마음은 수평적 관계인 동시에 수직적 관계다. 동등하지만 상대방이 하는 명령과 지시를 무시하면 곧바로 탈이 나기 때문이다. 마음의 위로와 간호가 약해진 몸에게는 즉효약이다. 마음을 받아들인 몸이 느슨하게 긴장을 풀고 쉬노라면, 아팠던 곳이 조금씩 느리게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몸과 마음이 어울려 사는 방식이었다.

 

운동, 즉 요가를 시작하면서 내 몸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혐오하고 무시하는 쪽이었다. 몸을 생각하면 불편하다가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약해 빠져서 걸핏하면 아파하고 탈이 나고 주저앉아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런저런 알러지에 괴로워하는 몸 따위는 차라리 없어지길 바랬다.  

 

그러나, 요가를 시작한 지금은 몸을 아끼고 사랑하지 못하면 마음이 병든다는 사실을 안다. 몸의 컨디션이 가볍고 유연하면 할수록 마음이 건강하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찼다. 몸을 쓰는 건 마음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명상을 하노라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들이 온다. 그 찰나의 시간들이 보석이 되어 멋진 집을 완성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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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아오리 사과다.

겨우내 저장된 묵은 사과가 시장에서 사라질 즈음

짠하고 나타나는 사과 중의 첫 사과

 

달콤새콤한 사과 조각이

아삭아삭 부서지면

메마른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이며

청랑한 사과향이 머리 끝으로 달린다.

 

내 생애 가장 빛났던 유년, 

사과나무에 사과꽃이 피어나는 시절

상처 하나없이 단단하고

푸르렀던

여름 날의 첫 기억

 

너와 나, 우리의 삶도

그 여름의 폭염을 견디고 익어가는

푸른사과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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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날씨는 엄청 추웠다. 봄옷은 아무리 껴 입어도 입은듯 만듯 어설프다. 센 바람에 덜덜 떨면서도 산책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약속이기 때문이었다. 몸을 녹이려고 들른 편의점은 깨끗하고 번듯한 모양에 어울리지 않게도 강아지들의 출입을 거절했다. 솔직히 인간이 개보다 못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늘 그렇듯이 참았다. 개를 싫어하는 이유는 다양하고 그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다리가 아플만큼 걸어도 꽃들이 지고 피는 광경은 근사했다. 반쯤 꽃잎을 떨군 나무들이 여린 초록잎을 내어놓는 모양은 신비롭다. 어여쁜 게 어찌 꽃 뿐일까. 꽃 뒤를 따라서 피어나는 잎이야말로 계절의 정중한 마중이 아닐까.  

 

블루문은 아주 잘 생긴 젊은 청년이 주인인 카페다. 가끔 들러도 기꺼이 웃어주고 들어오라 문을 열어주는 고마운 곳이다. 커피를 주문하고 피곤한 몸과 마음을 내려 놓으니 행복했다. 뜨거운 커피와 따뜻한 공간에 감사하고 마음이 너그러운 멋진 주인의 미소에 고마움을 표했다. 친절한 사람을 정말 필요로 할 때 만나기란 쉽지 않다. 오늘의 기억은 절대 잊을 수 없을 추억으로 소중에 곳에 보관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늘 길에 달래와 달이, 두 마리의 개를 키우는 그녀를 만났다. 부산이 고향이라는 그녀는 이웃에 살며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관계다. 개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특별해서 만나면 반갑고 안부를 주고 받았다. 하나도 아닌 두 마리의 개라는 공통점과 늘 웃는 모습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 디스크를 앓는 푸들 달래도 주인을 닮아 붙임성이 좋고 활달하다. 시추 달이는 정반대로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살짝 뚱보인 무뚝뚝이다. 좋은 주인과 좋은 개들이다. 

 

그녀는 바쁜 직장 생활 중에도 아이들의 산책을 빼먹지 않는다. 일하는 시간 외에는 오직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병원에 데려가는 일로 바쁜데 한번도 힘들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무엇보다 사랑스럽다. 잘했어요, 라고 마구마구 칭찬하고 싶다. 그녀가 지치거나 아파하는 일 없이 건강하길 바랜다. 그래서 달래와 달이랑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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