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벌써 시작됐지만 마치 오늘이 9월의 첫 날인 듯 8월의 달력을 넘긴다. 시골에 전화하니 엄마는 고추 말리느라 정신이 없다는데. 가을 햇볕에 말리는 붉은 고추라. 제대로 가을 냄새가 나긴 난다. 간만의 외출에는 8월 내내 입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딱 달라붙는 스타일의 청바지와 긴팔 셔츠를 꺼내 입고. 눈까풀에 엷은 아이섀도우도 발라본다. 힐과 운동화 둘 중에 뭘 신을까. 정확히 3초쯤 고민하다 흰색 스니커즈를 신은 발을 탁탁 굴러보고. 우체부 아저씨의 가방을 둘러매면 준비 끝.


그러나 실상은 몸과 달리 천근만근 마음이 무겁다. 달 반 가까이 벼른 치과 가는 날. 오늘날짜의 달력에 빨간 사인펜으로 밑줄이 좍좍 그어졌으니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산부인과도 아니고 비뇨기과도 아닌 기껏 치과잖아. 솔직히 그 흔한 내과, 외과보다도 간편한 게 이빨 치료 아닌가. 어떤 병인들 그 만큼 아프지 않겠어. 엉덩이에 주사 한 대를 맞아도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면서. 이런저런 설득에 충고에 납득을 거듭하여 내린 치과 행은 그럼에도 역시 죽음이다.


벌건 대낮의 병원은 낯설어서 얼떨떨한데, 무엇보다 보이지 말아야 할 결점들이 보였다. 유난히 비위가 약한 탓도 있지만 양치하는 곳의 얼룩과 흘낏 바라본 옆자리의 피투성이 화장지며 타월, 자잘한 부스러기들까지, 차라리 눈을 감아버릴 껄 싶도록 더럽다. 이건 병원이 아니라 이빨 수리공장이다. 또 치료받는 내내 옆자리에서 들리는 견적 뽑는 과정이라니. 몇 십만 나온 것도 억하고 소리를 쳤는데, 조족지혈이다. 앞에 네 개, 뒤에 두 개하면 천 이백이구요. 몇 개 씌우는 것까지 해서 천 삼백 얼마라나. 치료산지 경린지 상담원인지 틀니의 유해함과 불편을 끝도 없이 나열하면서 임플란트의 놀라운 세계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아픈 사람이 죄인이지. 인생은 60부터인데 먹는 걸 빼면 사는 재미 당연히 없다. 집이건 땅이건 팔아서라도 청춘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랴.


그 병원, 전문의는 달랑 한 사람에 나머지는 간호사복장의 남녀가 분업을 하는 시스템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누가 와서 하는지도 모르겠고, 유난히 목소리 큰 여자만이 얼마짜리 할 거냐고 묻는데, 싼 거, 비싼 거 알아서 선택하시라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겪을 때마다 기분이 영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약자로서의 환자, 강매 당하는 손님 같아서 씁쓸하다. 그럼에도 앞으로 몇 번은 더 다녀야 할 곳이고, 일 년이 지나면 또 어딘가 탈이 나겠지. 그 때마다 짙은 화장의 사모님이라 불리는 여자는 열심히 카드를 받아 긁어댈 것이다. 최소한 접수창구만은 제복의 전문 간호사에게 맡기면 안 될까? 돈독 오른 아줌마가 금고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은 인상만은 안 풍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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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9-06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치아 아프면 정말 열불나요. 치과는 보여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섭잖아요
쇠붙이 연장 도구들이 쭉 나열되어 있고. 그게 두 눈 껌뻑이는 내 입 속으로 침입하고.
개인병원 방문해서 카운터에 원장 싸모님이 계시면 거 참 기분 이상해지죠.
먹는게 사는 낙인 저로서는 번거로워도 인내심을 갖고 치료받으시라고 권합니다.
아. 여담으로 오늘 아침은 정말 바람에 가을 냄새가 완전히 났어요.

겨울 2006-09-0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 온 뒤의 하늘이 꽤나 높아졌어요. 주변엔 벌써 감기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치료는 이왕 시작한 거 열심히 받을랍니다. 문턱을 넘기가 어렵지 일단 넘어서면 부지런을 떠는 편입니다. 이 가을, 건강 챙기셔서 근심없이 지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