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니 살 것 같다. 검은색 짧은 바지에 진한 핑크색 셔츠 그리고 초록의 배낭을 둘러매고 거리로 나서니 사람들의 시선이 무심코 왔다가 간다. 내가 생각해도 눈에 확 띄는 배색이다. 어째 나이가 들수록 옷차림이 애 같아지나. 좍좍 쏟아지는 빗속을 신이 나서 걷는 행복한 하루, 살 것 같다. 화사하고 밝은 옷을 입으니 사람도 싱싱해 보인다는 지인의 한마디에 한참을 웃었다. 이상해 라는 말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좋기는 하나 아무렇지도 않게 핑크를 입고 나선 스스로의 심리가 무척이나 아리송하다. 어쩌면 옷조차도 어둡고 눈에 덜 띄는 색만을 골라 입으며 삶과 세상을 비관하고 그것에 취해 살았던 건 아닌지. 누구보다 자유로운 척 했지만 실상 내 영혼은 억압과 구속으로 비뚤어져 있음을 안다. 틀이나 규격이 싫다고 몸부림쳤지만 결국은 거기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빌어먹을 착한아이 콤플렉스 그리고 장녀 기질,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려지지도 않는 것. 비가 오니 바짝 말랐던 감성이 젖나보다. 내 안에는 어느 시점에선가 성장을 멈춘 어린아이와 성인이 된 내가 공존한다. 그리고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