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니 살 것 같다. 검은색 짧은 바지에 진한 핑크색 셔츠 그리고 초록의 배낭을 둘러매고 거리로 나서니 사람들의 시선이 무심코 왔다가 간다. 내가 생각해도 눈에 확 띄는 배색이다. 어째 나이가 들수록 옷차림이 애 같아지나. 좍좍 쏟아지는 빗속을 신이 나서 걷는 행복한 하루, 살 것 같다. 화사하고 밝은 옷을 입으니 사람도 싱싱해 보인다는 지인의 한마디에 한참을 웃었다. 이상해 라는 말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좋기는 하나 아무렇지도 않게 핑크를 입고 나선 스스로의 심리가 무척이나 아리송하다. 어쩌면 옷조차도 어둡고 눈에 덜 띄는 색만을 골라 입으며 삶과 세상을 비관하고 그것에 취해 살았던 건 아닌지. 누구보다 자유로운 척 했지만 실상 내 영혼은 억압과 구속으로 비뚤어져 있음을 안다. 틀이나 규격이 싫다고 몸부림쳤지만 결국은 거기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빌어먹을 착한아이 콤플렉스 그리고 장녀 기질,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려지지도 않는 것. 비가 오니 바짝 말랐던 감성이 젖나보다. 내 안에는 어느 시점에선가 성장을 멈춘 어린아이와 성인이 된 내가 공존한다. 그리고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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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5-07-28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만 오면 의욕이 솟구치는 좀 특이한 습성을 가진 사람들, 반갑습니다. 이런 날에 생계를 위해 온 몸을 적시고 한기를 참으며 일을 하는 지인에게는 참 미안하지만, 저는 좋아서 얼굴에 미소가 내내 가득했네요. 아, 검은비님의 섬뜩한 '죽음의 소리'도 뇌리에 짱 박혔습니다. 내 속에 웅크린 어떤 이와 닮아서요.

비로그인 2005-07-29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뜨거운 비가 와서 열을 좀 냈는데..
이제는 제대로 된 비가 와서 좋네요.
어서 가을이 왔으면...;;;

겨울 2005-07-29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입추라는 붉은 글자가 성큼 다가 선 8월의 달력을 보고 위안을 삼으세요. 말복의 고비가 남아있긴 하지만, 머잖아 이 무더위가 그리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