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된장을 단지 째로 업어다 놓은 후로, 요즈음 엄청난 후회를 하는 중이다. 한 달 전, 기온이 갑자기 오르기 시작하면서, 된장독 잘 살피라는 성화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날씨의 변화와 함께 된장이 끓어 넘치는 현상을 가끔 보았으므로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솟구치는 느낌에 서둘러 전화를 드렸더니, 바가지 가득 덜어 내라신다. 덜어낸 된장을 냉장고에 보관하고 한숨을 돌렸는데, 이제는 웬걸, 된장에 소금을 듬뿍 뿌리란다. 그전에 생된장을 찍어 맛을 보라 하셨는데, 하란다고 해서 손가락에 쿡 찍어 맛을 볼 손녀딸이 아님을 모르시나. 아무래도 올 된장은 싱거운 것 같다고 시금털털한 맛이면 소금을 넣어 잘 섞어주어야 한단다. 난 한여름도 아니고 이만한 기온에 별일 없을 거라고, 시간이 없다는 둥의 핑계를 대며 장독대에 오르는 걸 계속 까먹고 있었다. 아침이면 아침대로 정신없고, 저녁엔 해질녘에 들어와 어두컴컴한 장독대에 오르는 일 따위를 기억할 리가 없다. 하루걸러 하루를 그렇게 할머니의 전화를 받고 알았다고 끊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드디어 일요일 아침에 작심을 하고 장독대에 올라가 노란 송화 가루 쌓인 독들을 씻어주고, 닦아주고 할머니의 염원인 된장독을 열어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할머니에게 있어 고추장과 된장은 또 한 해를 살아가는 목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 그 된장 맛이 변하여 망치는 것은 할머니를 고뇌의 나락으로 미끄러트리는 일이다. 하지만 건성건성 덜렁이인 내가 노란 된장을 뚫어져라 바라본들 무엇이 잘못되어 가는지 알 턱이 없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원래 그 맛인 것 같기도 하고, 할머니의 당부대로 소금 두어 주먹을 넣어주고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다 저녁에,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어댄다. 내 전화기지만 정말 시끄럽고 듣기 싫은 소리다. 화들짝 놀라서 달려가 식탁 위의 휴대폰을 열자마자, 된장이 어쩌구 하는 할머니의 긴 사설이 다시 시작이다. 그놈의 고추장 된장을 주식으로 먹는 것도 아니고, 할머니처럼 끼고 앉아 매일 바라볼 수도 없는 일이라고, 그렇지만 잘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행여 일이 생기면 전화드릴 터이니 저녁이나 맛나게 드시고, 따뜻하게 주무시라고, 높았던 목청이 점점 가라앉아가면서 안부 인사를 마쳤다. 울컥하니 솟구치는 무엇 때문에 기분이 눅눅해졌다.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저녁 바람이 찼다. 감기 조심하시라 했더니 당신보다는 내가 걱정이라고 기어이 한 말씀을 하신다. 속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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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5-16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걱정하시는 할머니가 계시니 좋으시겠어요. 된장에 웃소금치는 거 번거로운 일도 아니니 잘하시고 맛난 된장 드세요^^

겨울 2005-05-1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를 생각하면 결국 뒤에 남겨지는 것은 나라는 걸 깨닫게 되어 서글픕니다. 내가 살 몫을 뚝 떼어 드리고 싶어요.

물만두 2005-05-1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어쩝니까. 그게 사람 사는 것인 것을... 계실때 많이 잘해드리는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