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읽기를 주저하는 때가 있다. 내가 먼저 호기심을 느끼기 전에 선택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인가. 이 책 ‘내 생애의 아이들’도 그러했다. 지인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고 뭐냐고 물었다가 확 끌어당기는 대답을 듣지 못한 이유도 변명이 될까. 하긴 그녀도 읽기 전이라 감동을 토로할 단계는 아니었었다. 제목과 겉표지를 보고 그렇고 그런 뻔한 교훈을 주는 책 중의 하나려니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고 놓치다가, 이제야 읽어치우고 이야기를 하자니 민망감도 들지만, 뭐든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즐거움이 요 며칠 내내 등을 떠밀었다.


학교에 첫 발을 디딘 어린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인 첫 글을 시작으로 소소하고 잔잔한 감동이 밀려들기 시작하더니 ‘성탄절의 아이’라는 소제목의 글을 읽는 중에는 몇 방울의 눈물이 뚝 떨어지며 기분 좋은 한숨까지 동반했다. 열여섯의 어린선생님을 향한 꼬마들의 맹목적인 애정공세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요즘 아이들과 비교하고, 머잖아 이 이야기는 동화나 전설이 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도 들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 이 책 속의 아이들과 선생님이 존재할 거라는 확신이 그 보다는 컸다.


내가 문을 열었다. 문턱에 누군가가 와 있었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고약한 날씨에 몸을 감싼다고 어찌나 두껍게 털옷을 껴입었는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내가 그 얼굴을 덮고 있는 목도리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건 분명 클레르의 푸른 두 눈, 기뻐서 춤이라도 출 듯한 두 눈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작은 꾸러미 하나를 끼고 있었다.

“어서 들어와. 얼마나 추울까. 날씨가 이런 날 밖에 나오다니, 너의 어머니는 어떻게 허락을 하셨다니? 들고 있는 건 좀 내려놓고.”

그러나 그 전에 그는 내게 작은 꾸러미를 내밀면서 말했다.

“성탄절 축하해요! ....이건 엄마하고 제가 드리는 거예요...”

나는 그가 껴입은 옷들을 벗도록 도와주었다. 껴입은 저고리와 스웨터가 대체 몇 벌인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윽고 이제 막 빨아 풀을 먹인 새 칼라가 하얗게 빛나는 푸른 제복 차림의 그 낯익은 어린아이 모습이 쑥 나타났다. 그가 소파 한 가운데로 와 앉았다. 나는 그에게 과자를 집어주었다. 싫어? 그럼 우유를 마실래? 그것도 싫어? 온통 행복한 표정인 그는 내가 우선 무릎 위에 올려놓고만 있는 그 꾸러미를 푸는 것이 보고 싶어 안절부절이었다.


선생님을 향한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클레르의 모습 속에서 나는 먼 기억 속의 단편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다. 소박하고 젊은 처녀 선생님은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꺼내놓고 앞자리에 앉은 우리를 불러 반찬을 나눠 주셨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멸치볶음과 계란말이, 햄 등의 진귀하고 낯선 그것들을 얻어먹는 달콤한 순간은 선생님의 얼굴보다도 선명하다. 기껏해야 장아찌나 고추장, 김치를 싸들고 다니던 시골 아이들에게 있어 선생님의 도시락은 신기한 마술 상자와도 같았던 것이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 시절의 유일한 간식이었던 맛난 누룽지를 나는 기꺼이 선생님께 나눠드렸고, 그녀는 몹시도 즐거이 먹었던 듯싶다. 아침마다 무쇠 솥에 눌린 누룽지를 긁어 정확히 네 등분을 하여 학교로 가는 우리들의 가방에 넣어주셨던 엄마의 마음이 어쩌면 선생님께도 닿지 않았을까.


과거에는 학교가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르치느냐는 차선이었다. 선생님은 엄마나 아빠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였고 그들이 입고 먹는 것들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선생님의 차, 선생님의 책상과 의자, 선생님의 노트와 필기도구는 만져보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었다. 숙제를 잘 하거나 받아쓰기에서 만점을 받았을 때 선생님은 상으로 빵이나 건빵을 한 봉지씩 주셨고, 먹고 싶은 굴뚝같은 욕망과 싸워 아꼈다가, 집에 돌아와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자랑하던 위대하고 위대했던 시절, 어떤 상처도 그늘진 기억도 없이 순수했던 날들이 있어 행복하지만 지금은 때때로 후회를 한다. 덜 착하고 덜 순수했더라면 이라는 가정의 유혹 때문이다. 학교를 다닌 그 시절은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박정희와 전두환이 어떤 대통령인지를 인지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얼마 후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선생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회의하고 경멸까지 한 것도 그 즈음일 것이다. 무사안일의 주의자들에 대한 쓰디쓴 비판은 기억 속에서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우는 것에서 시작했다. 나는 송두리째 그들을 매장했다. 그리고 남은 것이 시골 초등학교의 몇몇 풍경과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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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3-13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송두리째 그들을 매장했다."
저도 한때 그랬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