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읽기를 막 끝냈을 즈음, 마침 비디오로 출시된 영화를 우연찮게 보게 되어서 그 감동과 여운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이 길고도 길었다. 평면적 소설의 아쉬움이 입체적 영상으로 살아나는 기이한 경험이랄지, 방금 읽은 장면이 책에서 걸어 나온 듯 재현되는 영화를 보는 행운에 내내 가슴이 설레고 기분은 고조됐다.


이것은 물론 소설이다. 영리하지만 아버지의 실직으로 피폐해진 가족을 위해 하녀가 되는 열여섯 살의 그리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지극히 일상적 이야기다. 그리트가 하녀 일을 하게 된 집 주인님은 보통의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사물과 인물을 보고 재배치하는 재능을 갖고 태어난 화가다. 그리고 우연찮게 그림과 그림을 그리고 보는 방식에 대한 대화를 통해 교감을 나누게 된다. 대수롭지 않지만 한편으로 비밀스런 사건들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그리트가 느끼는 것은 특별함에 대한 자부심이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손등이 트고 갈라져 피가 날 정도의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겁내지 않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게 만드는 무언가를 주인님인 화가는 그리트에게만 보고 알 권리를 준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그리트가 가졌던 재능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가리켜 보여준 이는 화가다.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한 것은 그들이 정말 사랑을 하는 가였다. 영화에서 배우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분명하게 눈짓과 손짓으로 보여준다. 가까이 있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갈망이 화가에게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화가의 감정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지나칠 만큼 냉정하고 메말랐다. 그것이 마치 예술가의 특권인 냥 자신이나 가족에게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물며 하녀라는 신분의 그리트에게 그 이상 무엇을 할 수가 있으랴. 그리트를 그리게 된 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였으니. 아니, 처음부터 화가는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권리가 없었다. 생계의 수단으로서 그려진 그림은 대개가 청탁이다. 부유하고 호색적인 늙은 상인이 그리트를 탐내 취하려하자 ‘그림’으로 거래를 하는 것처럼.   


소설의 절정은 역시 그리트가 진주귀고리를 하게 된 경위다. 아내의 보석함에서 귀고리를 훔쳐 소녀의 귀에 걸어주는 화가의 행위는 광기에 가깝다. 하녀의 신분인 그리트에 대한 집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행위이기도 하다. 생살을 뚫어 피가 흐르는 귓불에 진주귀고리를 걸어주고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 찰나이면서도 영원인 그 때가 바로 시작임과 동시에 끝이 된 사랑이었음을 아니까.


육체가 아닌 정신의 간음을 목격한 아내의 히스테리와 고통을 영화는 생생히 보여준다. 남편의 시선을 따라서 혹은 그리트의 몸짓을 따라서 모멸감을 느끼고 파르르 떠는 아내의 모습은 병적일 만치 추하다. 연민에 앞서 그녀의 무지와 둔감함을 탓한다. 아이를 낳는 것만으로 남편을 잡아두려는 몸부림이 처절하다 못해 미련하다. 이런 극적인 장치가 없이 이방인인 그리트가 그토록 청초하고 우아하게 보이진 않았을 테지만.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리트는 푸줏간집 아들과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고 잘 살았다. 진주 귀고리가 화가의 유언으로 그리트에게 남겨지지만, 그녀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금화 이십 길더와 맞바꾼다. 귀고리를 품에 안고 감상에 젖는 로망은 없다. 그리트의 올곧음은 그 중의 십오 길더로 화가가 남편에게 진 빚을 청산할 정도이다. 남겨진 오 길더가 그리트의 몫이 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생애 한번 뿐인 격렬한 욕망의 증거로써.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4-10-0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고싶은 영화네요.
너무 리뷰를 잘 쓰셔서......
이 리뷰 놓쳤다가 자명한산책님이 퍼놓으신 것 보고 뒤늦게 읽습니다.
추천합니다.^^

순심이 2004-10-06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관에서 저녁 시간에만 상영해주는 걸, 친구가 보자고 해서 내키지 않는 걸음을 했다가 반해버렸습니다. 저는 책은 아직 읽지 못하고, 영화만 보았는데 참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영화 내내 흐르는 야릇한 분위기에, 다 본 후에도 한동안 정신이 멍하더군요. 리뷰 추천하고 갑니다^^

겨울 2004-10-06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하다 보니, 책과 영화가 섞인 묘한 리뷰가 되었어요. 추천 감사합니다.

리본여왕 2004-10-08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이 동감합니다.
비록 영화를 보려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다 읽기 전에 영화는 간판을 내려버렸지만
아주 오랜시간 그리트가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겨울 2004-10-08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를 보려고 지인에게서 책을 빌려서 읽었어요. 하룻만에 책을 읽고 나니 바로 비디오로 출시가 되더군요. 행복했죠.

clear2fly 2004-10-09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이 좋아 씨네 큐브로 달려가 영화를 보았죠, 영화 감상에 퍽 도움됐어요, 서평이 없었으면 부분적으로 부족감을 느꼈을거예요...

픽팍 2004-11-1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책은 안 봤는데 확실히 서평 잘 쓰시네용

제가 모르고 지나쳤던 부분을 알 수 있었답니다.

확실히 영화는 좋았어요

조조여서 졸린 눈으로 봤지만, 전혀 졸리지 않을 만큼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