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컴퓨터가 계속 말썽이었다. 말로만 듣던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질 않나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해킹까지 당했다는 경고가 뜨기 시작하더니 무지막지하게 느려지는 속도에는 인내심도 바닥이 나서 부랴부랴 안철수연구소에 가서 보안클리닉에 가입하고 A/S를 받았다.

무려 한달 이상을 질질 끌던 작업을 단칼에 해치우자 몇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듯 기분이 홀가분하다. 별로 중요할 것 없는 용도에 사용한다고 가볍게 여긴 잘못도 있고 정작 중요한 일을 미루는 성격 탓도 있으니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는 오늘로 깨끗이 잊어야지. 새롭게 포맷된 컴퓨터에 적응하려면 시간은 좀 필요할 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기분은 좋다.

봄단장을 한다고 서랍장을 비우고 옷장에 걸린 옷들을 정리하듯이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자리잡은 컴퓨터가 나도 청소가 필요하다고 떼를 쓴 것도 같고, 무지막지하게 부려먹기만 하고 제대로 밥도 안주고 닦아주질 않았으니 투정을 부릴 만도 했다. 적잖게 돈이야 나갔지만 부드럽게 돌아가는 하드웨어 소리도 듣기에 좋고, 기타장치 어쩌구 하면서 벙어리가 됐던 스피커 소리도 낭랑한 것이 이사람 저사람 붙잡고 자랑이라도 하고픈 심정이다.

오랜만에 벅스뮤직에 들러 슬픈 음악만 쫙 뽑아서 틀어놓고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봄 밤의 꽃이 피고 지는 소리, 잎이 돋아 색을 입히는 소리, 낮동안 죽은 듯 움츠리고 있다가 어둠을 틈타 생동하는 만물이 나들이를 하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행복하니? 응, 어쩌면.

시골에서 걸려온 전화는 다니러 갔던 동생의 차에 작은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 좁은 시골길에서 운전미숙으로 도랑으로 빠졌단다. 사람이 안 다치고 다른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웃고 말자고 위로아닌 위로를 건네니 동생도 그러기로 했다고 한다. 모난 데가 없이 착하기만 해서 이 세상을 어찌 사나 싶었던 동생은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았어도 여전하다. 입만 열면 모질고 독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겪다가 도무지 남의 흉을 보거나 탓을 하는 법이 없는 동생을 보면 절로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끼는데 간혹 어리숙해서 사기를 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만 빼면 세상을 사는 가장 기본이 되는 미덕을 보여주는 존재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살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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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a 2004-04-1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퓨터 고장나는 것 만큼 짜증스러운 일도 없지만, 컴퓨터 새로 고치고 포맷하는 것만큼 개운한 일도 없는 것 같아요^^

겨울 2004-04-16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렇더군요. 겉모양은 달란진 게 없는데도 보면 볼수록 기분이 상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