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김재규에 관한 기사가 실린 잡지를 읽고 잠을 못이룬 적이 있다. 그의 사진, 재판 과정, 최후 변론, 교수형 직후의 얼굴 표정이 어떻더라는 짧은 얘기였는데 가슴이 쿵쿵 뛰고 심장이 조여드는 듯 아파서 놀랐었다. 조만간 그의 존재가 우리 현대사에서 낱낱이 드러나기를 바랬는데 이제 때가 되었는지 TV에서 다뤄졌다. 그러나 생각보다 짧다. 수박 겉핥기처럼 지나가는 얘기로는 그의 결단과 비참한 죽음이 설명되지 않는다. 패배자를 기록하지 않는 역사의 교훈일까. 그가 박정희 대통령의 수족이었다는 멍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대통령을 쏘았다고 하여도 결코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박정희와 차지철의 죽음만으로 유신시대는 막을 내리고 자유와 민주주의가 도래하리라 믿었다면 그는 어찌할 수 없는 몽상가였던 것이다. 뼛속까지 올곧은 군인정신으로 똘똘 뭉쳤기 때문일까. 권력이 탐이 나지 않았다는 말은 진실이지만 그렇게 무방비로 놓여진 권력이 혼란의 와중에 박정희보다 더한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그는 분명 역사에서 증명되지 못한 한 획을 그었다. 아직은 누구도 어떤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그져 조심스럽게 그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나를 모색 중이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하여 장준하에 이르는 숨겨진 얘기가 의미하는 바는 서글플 뿐이다. 그의 훼손된 묘비명을 쓰다듬는 퇴직한 장병의 회한만이 뇌리에 맴도는 2004년도 4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