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달력을 펼치는 순간부터가 내겐 겨울의 시작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겨울이다. 집안에 칩거하기 시작한 후로는 더욱 겨울이 애틋하다. 내 집을 찾아온, 귀한 손님 같은, 온전한 내 겨울. 쌀쌀함을 넘어 시린 아침 공기, 바람, 떨어져 죽은 낙엽에 마음이 설렌다. 나는 어쩌면 겨울 중독자일지도.
난로는 겨울의 로망이다. 11월이 되는 첫날, 난로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그 위에 물주전자를 올려 낮이고 밤이고 물을 끓인다. 징~ 혹은 윙~ 신호를 보내며 끓기 시작하는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흩어졌던 마음의 갈레가 하나로 모여들고, 책을 읽고, 잠을 자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다. 살아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든다.
종일 생강을 씻어 까고 얇게 썰어 설탕에 잰다. 그리고 밤늦도록 난로 위에서 다리고 또 다린다. 온 집안에 생강냄새가 스며든다. 일부는 열어놓은 창문으로 빠져나간다. 생강이라면 치를 떨던 시절도 있었다. 생강냄새에 길들여지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처음엔 다들 싫어하는 생강 맛이 좋아지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제법 통통한 알타리무 다섯 개를 깨끗이 씻어 물김치를 담그고, 보통 무 두 개로 깍두기를 담갔다. 찌개를 끓이거나 반찬을 만드는 요리 보다, 김치 담그는 일이 훨씬 가치 있게 느껴지는 건 나만 일까. 한 끼의 식사로 소비되어 사라지는 모든 요리는 지치고 화가 난다. 반면 저장, 보관하여 먹는 음식을 완성했을 땐, 스스로가 기특해진다. 옆집에서 호박죽을 끓여왔는데 보기보다, 생각보다 맛있어 놀랐다. 사실, 첫 번째 끓여왔을 땐 숟갈도 안대고 버렸다. 죽 종류, 어디선가 가져온 정체불명의 죽을 먹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두 번째는 솔직히 죄송해서 미안해서 먹어봤다. 수제비를 떠 넣은 호박죽인데, 달달한 것이 입에 찰싹 달라붙어 놀랐다. 비법을 물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집 안 곳곳에 굴러다니는 호박이 과연 내 손에서 먹음직한 죽이 될 수 있을 런지는 두고 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