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배 식물 가운데도 알뜰한 것과 헤픈 것이 있다. 절약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낭비가 심한 것도 있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긍지를 갖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다른 식물에 기생하려는 것도 있다. 그 종이나 생명력이 고루하고 평범하다 못해 활기가 없는 식물이 있는 반면 어떤 것은 마치 위풍당당한 신사 같다. 그들 가운데도 좋은 이웃과 나쁜 이웃이 있다. 다정한 것이 있는가 하면 혐오스러운 것도 있다. 어떤 식물은 제멋대로 무한정 거칠게 피어나 당당히 살다 죽는 반면 볼품없는 존재 때문에 손해 보며 내내 굶주리고 창백한 모습으로 힘겹게 생명을 유지해 가는 식물도 있다. 어떤 식물은 열매를 맺고 증식하면서 믿기지 않을 만큼 풍성하게 성장해 가며, 어떤 식물은 애써 돌봐야만 겨우 씨라도 남긴다. (p. 15)
어떤 책을 빠른 속도로 완독하게 만드는 배경에는 일단 끝없이 샘솟는 흥미와 호기심이 있다. 저 책은 받자마자 열 페이지 쯤 읽고 책꽂이에 고이 꽂아두었을 것이다. 정원 일의 즐거움 같은 거 나는 몰라라 하던 때다. 하지만 사람이나 식물이나 어쩌면 이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 시인이자 소설가인 작가의 눈에만 저리 보이는 건 아닐 께다.
엊그제. 시골에서 올라오신 아버지(아, 어색하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아빠 소리를 졸업하지 못했다)로부터 한 박스 가득한 꽃모종을 받았다. 채송화를 비롯한 3가지(국화와 기타)인데 이미 몇 주 전에 새끼 손가락만한 모종을 받아 군데군데 심었고, 강한 놈들은 살아남았지만 태생이 약한 것들은 말라 죽었다. 그 날, 밤이 어둑하도록 부지런히 마당을 누비며 심고 또 심었지만 절반도 못 심어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평소 잡초가 무성했거나 날 법한 곳, 흙이 있는 공간을 샅샅이 뒤져 뒤죽박죽으로 흙 파서 심고 다독이고 눌러주고 물을 주었다. 아직 한 번도 꽃을 키워보질 못해서 어떤 식으로 어떻게 자랄 것인지 무슨 꽃이 필건지 감이 안 잡히니 심는 것도 수월치가 않았다. 제일 독종인 채송화는 역시 그늘이건 양지건 심자마자 꼿꼿이 고개를 들지만, 맨드라미나 국화 등은 하루가 지나도 고개를 드는 게 힘겨워 보인다. 싱싱한 채로 밤늦게 심은 것들은 그래도 잘 살 것 같은데, 뒤늦게 뿌리를 묻어 준 것들은 만 하루가 지난 지금도 줄기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있다. 그 녀석들에게 꼭 필요한 어떤 조건이 있을 터인데,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열심히 물을 주는 것 말고는 해줄 일도 없다. 살거나 죽거나 너희들의 운명이니까 알아서들 해라. 경험은 없지만 관심은 넘칠 정도이니 그 힘으로 살아주기를.
평소 감나무 밑은 거의 쓰레기장 수준이었다. 마당을 쓸면 자연스레 그 쪽으로 쓸어 부치고, 감잎이며 꼭지도 일단은 거기로 모았다가 한꺼번에 자루에 담게 된다. 그러다보니 치운다고 치워도 그 장소는 늘 지저분하고 어수선하고 음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번에 남아도는 꽃모종들을 감나무 밑에 오밀조밀 심어 버렸다. 햇빛이 전혀 안 들어 뭘 심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채송화는 생명력이 무진장 강해서 절대 죽는 법이 없다는 말에 그리 됐다. 아마도 7월이 되면 어둠침침했던 감나무 아래와 마당 곳곳의 돌 틈 사이사이로 채송화 꽃이 만발할 것이다. 꽃을 심어놓으니 하루 몇 시간은 물주고, 풀 뽑고, 흙을 다독이는 일로 소일한다. 오래된 나뭇잎들이며 묵은 쓰레기들도 제거해 주고, 마당으로 흘러내린 흙들도 끌어올린다. 그것들은 소소하지만, 저절로 마음이 움직여 하는 일의 즐거움을 배우는 계기가 된다.
아주 이따금,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어느 한 순간, 땅 위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우리 인간만이 이 같은 사물의 순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사물의 불멸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번뿐인 인생인 양 자기만의 것, 별나고 특별한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기이하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p. 17)
버릴 게 없는 주옥 같은 글들. 헷세의 글은 이십여 년 만에 읽는다. 한때는 그의 책만을 끌어안고 살았는데. 인생의 한 구비를 넘어서고 읽는 그의 글은 부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