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렇게 전화에다 푸르르 성질을 부리고 나면 한동안은 뜨악하다. 안면몰수 할 만큼 뻔뻔하지도 못하고 직접 마주보고는 전에 했던 말들 반복은 더더욱 할 수 없다. 그저 시간이 흘러 기억도 가물거리고 감정도 퇴색하기를 바랄밖에. 화를 자주 내지는 않지만 한번 화를 냈다하면 서릿발이 뚝뚝 떨어지는데 당하는 입장이 어떨지 상상이 안 간다. 주변에선 무섭다는 표현을 쓴다. 인간이 야비하거나 비겁한 것 보다야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게 낫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타고나기를 무던하게 태어난 성정의 그녀라서 다행이다. 만일 내가 다른 누군가로부터 그렇게 호된 질책을 당했다면 어땠을까. 전혀 쿨 하지 못한 나로선 정말 상상이 안 간다. 현재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무진장 조심스럽다. 가급적 건드리지 말자는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데. 글쎄다. 가끔은 그게 더 화가 난다.


2. 부쩍 빨간색의 옷을 사달라고 조르는 할머니. 결국 근처 교회에서 하는 바자회를 따라갔다가 아주 짙은 빨강의 니트 셔츠를 샀다. 처음엔 이걸 과연 입을 수가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잘 어울려 놀랐다. 할머니도 비록 입으로는 투덜투덜 하시지만 싫지는 않으신 것 같은데 좋으면서도 약간 싫은 척 하는 이유는 뭘까. 원하던 걸 얻었지만 민망해서? 아이가 된 듯 원하는 건 반드시 가져야 한다. 감정의 표현이 직접적이다. 특히 싫은 건 무조건 싫다고 한다. 죽어도 싫다는 말을 근래 들어 자주 듣는다. 한편에선 웃음도 나고 어이도 없지만 그것도 또한 할머니의 긴 인생길의 구비려니 생각한다. 나이 드는 것과 늙음의 면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상당한 적응기간이 필요한 의외성이다. 비하 섞인 말, 추한 것과는 아주 다른.

 

3. 5월도 벌써 절반이 훌쩍 지났다. 비온 뒤의 단단한 땅에서 고추와 토마토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 주렁주렁 열릴 오이를 상상하며 심었던 두 포기의 오이는 벌써 시들어 죽었다. 너무 단순했다. 비록 성장은 부실할지언정 고추 모종이 말라 죽은 적은 없기에 방심했다. 다행히 토마토는 살아났다. 하나만 심은 게 조금 후회가 될 정도다. 시골에서 공수해온 상추도 두 포기 심었다. 목련나무 그늘 아래 심었다. 정작 심고 싶은 것은 부추였기에 살 테면 살아보라는 고약한 심보가 발동했다. 모종을 파는 곳에서 아주머니가 그러셨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과 지극한 정성, 관심이라고. 맞는 말이다. 작년 심었던 경험을 살려 고추를 심는 일은 수월했다. 죽을까 살까 걱정도 덜했다. 여간해선 죽을 일이 없다는 것을 터득한 까닭이다.


4. 마당 가장자리를 따라 무성했던 풀을 뽑으라는 할머니와 그냥 두고 보자는 나와의 실랑이는 채송화를 비롯한 이름 모를 꽃들을 잔뜩 가져오신 엄마의 중재로 모조리 뽑히는 운명에 처했다. 평소 풀이든 꽃이든 살아만 다오, 했는데 할머니의 사고로는 이해불능이란다. 사람 사는 데에 잡초라니 있을 수가 없다나. 우울한 잿빛 시멘트 바닥이나 시커먼 흙 보다야 파릇파릇한 풀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라는 반론은 코웃음만 살 뿐이었다. 어찌됐든 채송화든 무슨 꽃이든 무성히 피어나 쓸쓸한 마당을 메워 준다면야 불만은 없다. 그러나 좁쌀 알갱이 같은 꽃을 바글바글 피우던 잡초가 그리운 것은 어쩌나. 논농사 밭농사를 지으시는 엄마 입장에서야 죽여도 죽지 않는 잡초가 불구대천의 원수일지 몰라도 언제부턴가 공공근로라는 미명아래 거리에서 잡초는 씨가 말라버렸기에 솔직히 도시에서 앞으로는 풀을 만나기란 아파트 단지의 손바닥만 한 화단이 아니고는 불가하다. 왜 굳이 이름난 꽃이 아니면 안 되나. 풀이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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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5-18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몽님, 오랜만에 글을 봅니다. 저도 오랜만에 들어오구요. 잘 지내셨죠. 이렇게 글이 올라와 기쁜 마음으로 읽고 갑니다. 주말 잘 보내시구요.

겨울 2007-05-18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정말 반갑습니다. 오늘 날씨 변덕스럽지요? 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 불더니 급기야 비가 내리네요.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