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와 잔치, 아이들의 웃음, 사랑,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에는 어린이 노예노동과 인권 유린의 슬픈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캐나다 언론인인 저자가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은 ‘카카오를 따는 손과 판형 초콜릿을 집는 손 사이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먼 거리’다.

가장 먼저 남아메리카 대륙의 마야제국 시절. 당시 시장의 가격표는 이런 식이었다. ‘노예는 100개, 매춘은 10개, 칠면조는 200개, 짐꾼의 일당은 100개.’ 상행위를 위한 단위 ‘개’는 다름 아닌 카카오 원두를 뜻했다. 카카오가 당시 법정 화폐였던 것이다. 색을 칠한 점토나 돌로 카카오 원두를 위조하는 일마저 번창했다. 3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카카오를 두고 펼쳐지는 인간의 탐욕을 암시하는 전조였다.

현대의 초콜릿은 거의 아프리카에서 온다. 원산지는 중남미지만 오늘날 세계 카카오의 절반 가까이는 코트디부아르의 무더운 정글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밋밋한 맛을 가진 카카오 원두는 정글에서 발효되고 말려진 뒤 갈린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설탕과 바닐라 등이 첨가돼 매혹적인 맛의 초콜릿으로 바뀐다. 이 마법과 같은 과정에는 카카오 원두를 발효시킬 때만큼이나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저자는 대표적인 카카오 생산지인 코트디부아르의 시니코송 마을을 찾아 족장과 마을 사람들을 만난 장면을 인상 깊게 소개한다. “만약 카카오를 기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그건 재앙이죠. 이건 우리의 생명이오.” 마을 사람들이 답했다. “카카오는 여기서 어디로 가나요?” “산페드로 항구로 가오. 그 다음에는 유럽과 아메리카로 가지요.” 이건 족장만 답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이 카카오 열매로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까?” 이 질문에는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신들의 음식’이라는 카카오를 주로 생산하는 마을에서 아이들은 학교 대신 카카오 농장으로 출근한다. 학교는 물론이고 병원, 전기, 전화 같은 시설은 전혀 없다. 유럽에서 흔한 판형 초콜릿 가격이 500서아프리카프랑(약 0.76유로·약 1160원)이라고 말해주자 아이들의 눈이 커진다. 아이들의 사흘 치 일당보다 많다. 큼직한 닭 한 마리나 쌀 한 자루를 살 수 있는 ‘거금’을 서양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오는 길에 군것질거리로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운다는 말에 아이들은 더 놀란다.  


20세기 후반 코트디부아르는 카카오의 주요 생산국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환금성이 좋은 작물인 카카오를 기르면서도 국민들은 지옥과 연옥을 오가고 있다. 카카오를 노리기는 정부나 반군 모두 마찬가지여서 카카오 생산지를 확보하려는 전쟁으로 고통받고, 세금이나 ‘통행세’ 같은 명목으로 자신들의 몫을 빼앗겼다. 세계인을 중독시킨 초콜릿의 힘은 다국적 제과회사들이 코트디부아르에 직접 진출해 코코아를 생산하게까지 만들었다. 이해관계자가 많은 석유만큼이나 초콜릿을 둘러싼 세계의 탐욕도 그만큼 크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카카오 농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가난의 수렁에 빠져갔고, 더 저렴하게 원두를 생산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인류가 처음 카카오를 재배할 때의 사회악인 ‘노예제’에까지 손을 뻗치게 됐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카카오 생산을 위해 아이들이 굶다시피 일을 하며 밤중에 자물쇠로 잠긴 합숙소에서 잠을 잔다. 수시로 매를 맞아 등과 어깨에는 끔찍한 상처가 많다. 2002년 8월에는 코트디부아르 인근 국가인 말리에서 국경 밖으로 어린이 수십 명을 이송하려던 남자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아이 한 명당 3만 서아프리카프랑(약 7만 원)을 주는 어린이 인신매매를 감행하다 적발된 것이다. 

이 책은 카카오를 둘러싼 부패구조에 관심을 가졌던 언론인 기 앙드레 키에페르의 활동에도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다. 캐나다와 프랑스 국적을 가졌던 키에페르는 농민들을 위해 시장가격을 지원하는 데 쓰여야 할 기금이 무기 구매에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러나 코트디부아르 정권은 농민들의 안전을 위한 일이라며 이를 정당화했다. 키에페르는 결국 2004년 코트디부아르에서 납치돼 살해됐다. 카카오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냈고 이를 폭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아울러 카카오가 목도했을 인류의 역사도 책은 세세하게 전한다. 초콜릿이 유럽에 소개될 당시는 특권층이 마시던 음료였고, 초콜릿 음료가 유럽 사교계의 강장 음료로 부상하던 때는 사회구조와 인권 등에 관한 혁명적인 이론들이 탄생하던 시기와 일치했다.

세계적인 초콜릿 제조업체인 허시키세스는 1940년대 초콜릿 바를 미국 군인들의 전투식량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해 번성했고, 유기농 초콜릿을 포함한 유기농 식품의 뒤에는 이미 거대 기업들이 주인으로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곁들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음식’이 아닌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밝힌다.

“나는 초콜릿이 뭔지 모르는 시니코송의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먹는 대부분의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 초콜릿이 어디서 오는지, 누가 카카오 열매를 따는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모른다고 말해주었다. 시니코송 아이들은 내가 바깥 사람들에게 그걸 알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2011.2.12,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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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으로 예술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에 유익하다. …그것은 결코 우리 생활 밖에 있는 여분의 어떤 것이 아니다.”

저자는 20세기 초 활동한 미국 화가다. 보수적인 미국 화단의 틀을 깨고 ‘8인 그룹’을 결성해 독립 전시회를 개최한 인물이자 미국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미술교사이기도 했던 저자가 생전에 남긴 기고문과 강연문, 비평문 등을 엮어 미국에서 1923년 출간됐던 책을 국내 초역했다. 책은 그림 그리기에 대한 전문적 조언부터 예술가의 자질과 태도, 예술의 가치와 의미 등 예술 전반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짧은 글을 모았지만 저자 고유의 예술관이 일관되게 녹아 있다.

“표현하는 것보다 살펴보는 것이 더 어렵다. 예술의 가치는 예술가가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사물을 깊숙이 꿰뚫어보는 능력에 달려 있다.”

예술은 단지 아름다운 대상을 그대로 본떠 그리는 데서 탄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물질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아름다움을 포착해낼 줄 아는 사람이 곧 예술가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을 그려도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정한 예술의 즐거움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표현하는 기법을 발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렘브란트를 예로 든다. 렘브란트는 신사든 거지든 구분하지 않고 대상이 가진 나름의 아름다움을 화폭 위에 표현해낸 화가였다. 나아가 저자는 “예술이란 결국 이 세상 전역에서 발견되는 ‘질서에 주목하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질서란 어떤 사물에든 내재돼 있는 위대함과 경이를 가리킨다. 예술가가 이 질서를 발견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제한적 자유가 필요하다.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그 나무에게 맞는 방식으로 마음껏 자랄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는 ‘기이한 문명’ 속에 살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공포와 피상성(皮相性)으로 겹겹이 싸여 있어 아름다움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위대함은 어디에서나 존재하고, 누구에게서나 발견된다. 그런데 문명은 이 위대함을 질식시키느라 바쁘다.” 저자는 미술계의 기존 질서나 수상제도 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관점을 취한다. 작품은 예술가 고유의 것이며 객관적 자료로 측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예술의 탄생은 어떤 것일까. “세상에는 계시의 순간들이 있다.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으로 전화(轉化)되면서 전체의 의미를 슬쩍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고 위대한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 그로 인해 거대한 깨달음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그것을 일상의 차원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들어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기호(記號)를 사용하여 이런 순간들을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이런 희망 때문에 예술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곧 예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한다. 대가들의 창조적 작업을 통해 사람들은 사물의 또 다른 측면, 겉으로 보이지 않는 현상의 아래, 혹은 진짜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예술은 또 다른 존재를 향해 다가가는 신호등, 더 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신호등”이라고 규정한다.(2010.12.25, 이새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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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당근과 채찍-행동주의 심리학의 용어로는 보상과 처벌-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의 행동을 교정한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이라는 당근을 주어 달래거나 숙제를 하지 않는 아이에게 벌이라는 채찍을 줌으로써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당근과 채찍은 사회집단 그리고 개인들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데 매우 유용하며 그렇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고전적인 경제학에서는 이 당근과 채찍을 주로 경제적 관점에서만 다뤄왔다. 예를 들면 2만 원은 만 원에 비해 두 배의 경제적 가치가 있으므로 사람들은 당연히 2만 원을 선택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경제적 가치만을 기준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6개월 뒤에 사과를 한 개 받을래, 아니면 그 다음날에 사과를 두 개 받을래' 하고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6개월에서 하루를 더 기다려 사과를 두 개 받겠다고 대답한다. 사과 한 개보다는 두 개가 두 배의 경제적 가치가 있으므로 이는 고전적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사과를 하나 받을래 아니면 내일 사과를 두 개 받을래' 하고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늘 사과를 하나 받겠다고 대답한다. 경제적 가치만을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하루를 더 기다려서 두 배의 가치가 있는 사과 두 개를 받아야 함에도, 사람들은 오늘 사과를 하나 받는 것을 선택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좀 단순하게 대답하자면 사람은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심리적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즉 분명히 사과 두 개는 한 개에 비해 두 배의 경제적 가치가 있지만, 내일의 당근은 오늘의 당근에 비해 심리적 만족도가 낮으므로 사람들은 오늘의 당근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먼 미래에는 사과 2개를 원하면서도 오늘 당장은 1개의 사과를 원하는 '동태적으로 비일관된 선호(time-inconsistent)' 현상이나 경제적 가치가 똑같음에도 손실을 이익보다 2배나 더 크게 보는 '손실회피 경향(loss aversion)' 등은 경제적 관점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경제적 관점만을 근거로 당근과 채찍을 사용한다면 실패를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근과 채찍>(이종호·김인수 옮김, 리더스북 펴냄)의 저자 이언 에어즈는 심리학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당근과 채찍 전략을 정교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그는 누군가가 체중을 감량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단순히 100만 원을 벌금으로 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100만 원을 그 사람이 싫어하는 안티단체에 기부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경제적으로는 똑같은 100만 원의 손실이더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에게는 자기 돈 100만 원을 보수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벌금 100만 원보다 훨씬 더 큰 심리적 손실, 채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당근과 채찍 전략을 정교화 시킨 것 중 하나가 '약속실천계약'-자기결박계약(hand-tying contract)-이다. 약속실천계약의 핵심은 미래에 할 선택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데 있다.

"경제적 유인은 전적으로 사람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문제지만 약속실천계약은 전적으로 선택의 폭을 없애거나 줄이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CEO에게 스톡옵션을 부여하는 것은 일종의 유인계약이지만 흡연을 할 경우 친구에게 5000달러를 주는 것은 일종의 약속실천계약이다."

 
'너무 좋아서 거절할 수 없는 당근과 너무 나빠서 받아들일 수 없는 채찍'을 통해 미래의 선택범위를 축소시킨다면 잘못된 행동을 할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이지만, 금연에 성공하면 100만원을 받게 되지만 실패할 경우에는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단체에 500만원을 기부하도록 약속한다면 금연성공률은 가파르게 높아지지 않겠는가.

저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듯이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심리적 가치까지 고려하는 정교한 당근과 채찍 전략은 사람들의 행동을 교정하는데 커다란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잘 짜여 있더라도 당근과 채찍이라는 행동교정수단을 사용할 때에는 특정한 당근과 채찍이 인간심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사람은 당근과 채찍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해내고 이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이다. 문제풀이에서 정답을 맞추는 대가로 돈을 주게 되면 수행정도가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돈을 위해 문제풀이를 한다고 느끼게 되어 흥미를 잃기 때문이다. 또한 벌금 제도를 도입하자 지각이 오히려 늘어났다는 보고도 있는데, 그것은 지각을 해도 돈을 내면 그만이므로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근과 채찍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데, 이런 점을 면밀히 고려하지 못하면 원치 않았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또한 행동주의 심리학에 기초한 당근과 채찍은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당근과 채찍으로 단순한 인간행동은 변화시킬 수 있지만 인간심리를 변화시키기란 매우 어렵다.

"병에 입을 대고 우유를 마시지 않겠다는 단순한 약속을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내에게 말하는 태도를 바꾸고 싶다. 이런 문제들은 명확하지 않다."

약속실천계약으로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더라도 또다시 다른 중독에 빠지는 '중독전이(addiction transfer)' 현상, 어떤 약속실천계약이 종료되는 순간 그 효력이 상실되는 교정효과의 단기성 등은 당근과 채찍이 단순한 행동은 바꿀 수 있지만 그 행동의 원인이 되는 심리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걸 보여준다. 따라서 근본적인 사람의 변화,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당근과 채찍이라는 수단 이상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약속실천장치를 지속적으로 정교화 하고 영구화하면 이런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인생의 너무 많은 면에서 보상금을 주어 어떤 일을 장려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그 여부가 궁금하다. 극단적인 경우 자신의 모든 행동을 완벽하게 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모든 상황에서 엄격하게 계산하고 확인하는 끔찍한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약속실천장치는 적절히 활용되기만 하면 사람들에게 더 많은 행복을 주는데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보상이나 약속실천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 역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어쨌거나 당근과 채찍을 위주로 움직이는 세상은 분명 각박한 곳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태형 심리학자·<불안 증폭 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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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정 기자/2011.1.28) 

 

 

 

고도로 문명이 발전했던 마야제국(BC 2600~AD 900)이 왜 붕괴했을까. 학자들은 가뭄, 식량 부족, 바이러스 확산, 인구 증가, 전쟁 등을 원인으로 꼽아왔다. 그런데 저자는 “모든 것이 맞지만,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말한다. 선행하는 어떤 원인이 있었기에 마야인들은 기후변화나 바이러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멸망을 자초할 정도의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근본 원인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에서 찾을 수 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사회의 복잡성이 커지는 데 비해 인간의 뇌는 그것을 감당할 만큼 빠르게 진화하지 못해 간극이 생긴다. 저자는 이를 ‘인식한계점’이라고 부른다. 역사를 살펴보면 문명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진보를 둔화시키는 어떤 장애에 봉착한다. 장애는 두 단계로 나타난다. 먼저 정체에 빠지고, 이어 믿음이 지식을 대체한다. 다시 마야의 가뭄을 살펴보면 마야인은 강우량이 적은 해에 재배할 작물의 종류를 정하고 공공용수 사용량을 규제하는 등 물 보존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강우량이 계속 감소하는데도 보존 외에 근본적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이어 두번째 단계로 진입하면서 어린아이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해결책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런 붕괴 과정은 과연 고대문명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현대사회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현재 지구는 천연자원 고갈, 기후변화, 빈부격차, 환경파괴 등 여러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도 이것이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나머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데다 설사 해결방법을 발견하고도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즉 인식한계점에 이른 것이다.

저자는 현대문명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밈(meme)이란 개념으로 정리한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정의한 밈은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정보, 생각, 느낌, 행동, 상식, 전통, 학설, 편견 등을 뜻한다. ‘가위를 들고 뛰지 말라’, ‘식사한 지 1시간이 지난 뒤 수영하라’ 등이 밈의 사례다. 밈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기도 하고, 동시대에 유행성 바이러스처럼 퍼지기도 한다.

문명 정체의 조짐이 나타나는 우리 시대의 ‘슈퍼밈’은 불합리한 반대, 책임의 개인화, 거짓 상관관계, 사일로(분리용기)식 사고, 극단의 경제학 등 다섯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불합리한 반대는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다.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미국 시위대에게 어떤 철수계획을 선호하는지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그런 건 모른다”는 반응을 보인다. 탄소배출 문제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휘발유값을 올리거나 소형차를 사도록 강제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저자는 “무조건 싫다고만 하는 태도는 무엇인가에 조정당할 가능성을 높인다”고 말한다.

책임의 개인화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모두 나타난다. 알카에다 요원의 여객기 폭파 시도, 자동차 산업의 붕괴, 복잡한 파생상품으로 인한 금융위기 등은 시스템의 문제임에도 불구, 그것을 고치기보다 여론에 편승해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난다. 비만, 우울, 중독 등의 문제를 개인의 무절제나 의지박약으로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짓 상관관계란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다. 정확한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대신 추측, 의견, 학설 등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지구 온난화가 심해지는 시기에 권총 소지자가 늘면 지구 온난화가 권총 소지를 불러온다는 식이다. 포도주와 심장병, 백신과 자폐증,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세계적 불황, 교사 봉급과 공교육 등 일견 상관있어 보이는 문제도 뚜렷한 인과관계를 찾기 어렵다.

사일로식 사고의 사례는 미 우주항공국(나사)이 개발한 태양에너지 집광판이다. 접시안테나 같은 간단한 장치로 얼마든지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 이는 10년이 넘도록 에너지부에서 퇴짜를 맞았다. 나사의 업무는 우주개발이라는 이유에서다. 에너지부는 이미 청정기술 벤처자본가들과 함께 태양열 발전보다 못한 대체에너지 개발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극단의 경제학은 모든 일에 ‘경제’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저자는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재정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마리화나 유통을 합법화하고 이에 과세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일화를 든다. 이 아이디어는 결국 폐기됐는데, 그 이유는 주민의 건강이나 사회적 폐해가 아니라 합법화하면 마리화나 가격이 폭락해 증세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다.

슈퍼밈은 복잡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전형적 현상이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 너무 많은 지식이 필요하고, 시스템이 복잡해 고치는 게 어려우니까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거짓 원인을 믿는 것은 혼란 상태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동물적 반응이다. 돈이란 잣대 역시 그것이 확실하다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믿음’을 무조건 폄훼하지는 않는다. 보행자 신호가 켜지면 차가 멈춘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교통체계가 유지되듯이 믿음이 지식과 질서를 낳는다. 문제는 균형인데, 시계추가 지식보다 믿음으로 너무 기울어졌다.
 

그러나 저자는 문명 붕괴의 징후를 제시하는 것과 함께, 희망과 대안을 보여준다.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마야인과 달리 우리가 문제를 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부터 패턴을 발견했다. 또 붕괴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기 때문에 다양한 해결책을 시도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는 통찰력이 있다는 점이다.

통찰은 ‘유레카’(알았다)라는 외침,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소방관 왜그 닷지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불을 피하기 위해 자기 주변에 작은불을 놓아 위험을 피한 것, 미국 FBI가 전설적인 사기범 프랭크 애버그네일을 감옥에서 썩히는 대신 사기범을 잡는 요원으로 활용한 것 등이다. 특히 모범적 사례는 무하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이다. 빈민대출이라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반대, 개인화된 가난의 책임, 가난한 사람은 대출을 안 갚는다는 거짓 상관관계, 금융기관과 지역사회라는 사일로, 사람보다 수익을 우선하는 금융관행 등 다섯 가지 슈퍼밈을 보기좋게 뛰어넘었다.

이 책은 다양한 실례를 인용하면서 현대문명의 위기를 설득력 있게 경고한다. 통찰력을 높이기 위해 두뇌훈련, 운동, 휴식, 식사와 수면을 권유하는 대목에서는 자기계발서의 한 대목을 추려놓은 듯한 느낌도 준다. 저자는 캘리포니아대를 졸업한 뒤 실리콘밸리를 거쳐 애플컴퓨터, 휴렛패커드, 스리엠, GE 등과 함께 일했으며 인간진화, 글로벌시장, 신기술 등 최신 조류를 연구하는 사회생물학자다. 리처드 도킨스와 에드먼드 윌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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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문명 발달 정도가 인간에 대한 '척도'로 작용… '非유럽 문명화'야망 불러
서구의 우월주의 思考는 16~17C '과학혁명'서 비롯


  

 

 

 

 <이덕환 서강대 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아프리카 감비아 강어귀의 '어리석은' 원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것은 영국 지질학자 윌리엄 스미스의 흰 피부색이나 기독교가 아니라, 그가 가져온 주행거리계(計)에 붙어 있는 작은 바퀴였다. 낯선 이방인이 기묘하게 생긴 바퀴로 자신들에게 마술을 걸려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사(戰士)들은 소들을 멀리 물리고, 아녀자들을 숲에 숨기고 나서야 겨우 이방인을 '잔인하게 갈가리 찢어버릴 것'처럼 해변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바퀴에 대한 두려움은 감출 수가 없었다.
 

뛰어난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술을 앞세워 '바깥세상'에 대한 대탐험에 나섰던 유럽인들을 우쭐하게 만든 것은 기후나 지리적 특성, 문화적 차이, 인종이나 민족적 우월감이 아니었다. 19세기까지도 유럽인들에게는 '인종'과 '민족'에 대한 인식은 분명하지 않았다. 유럽인들에게 정말로 우월감을 느끼게 해준 것은 자연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능력을 제공해 준 과학적 사고와 기술혁신이었다. 미국 역사학자 마이클 에이더스가 수많은 탐험가, 선교사, 식민지 행정가, 문학가, 철학자들이 남긴 방대한 기록을 분석한 결과를 적은 책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에 따르면 그렇다.

아프리카 인도 중국등 비(非)유럽 지역으로 탐험에 나선 유럽인들이 당초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종교·사회·정치조직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과의 문화적 비교에 필요한 척도는 그런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척도에서 유럽인들이 처음부터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이 만난 '무지한 야만인'들의 모습은 혼란스럽고 우스꽝스러웠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배에 남아 있던 다른 신사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여흥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점차 자신들이 그들과 문화적·물질적·정신적으로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바로 과학적 사고와 기술혁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종이, 무기, 철도, 선박, 장거리 항해용 기구, 증기기관에서 수학, 천문학, 의학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는 '기계'가 인간의 수준을 평가하는 유일하고 현실적인 척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의 정복, 시간과 공간 지각에 대한 인식, 노동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나는 엄청난 격차도 모두 근원적으로는 자신들만 가지고 있는 기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런 평가 척도에 따르면, 아프리카는 자신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고, 인도와 중국도 오랜 침체기를 거치면서 실망스러운 수준으로 뒤떨어져 버렸다. 과학과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서양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계몽주의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강력한 제국주의로 정점에 이르게 된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후진적이고 미신에 사로잡힌 비서양 세계의 사람들을 '문명화'시켜 효율적이고 호혜적인 전 지구적 정치경제 질서를 만들어내는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믿기 시작했다. 서양의 기계를 이용해서 아시아의 '쇠퇴한' 문명을 되살리고, 아프리카의 '미개한' 인종을 향상시켜야 했다. 강력한 식민지 교육을 비롯한 유럽의 문명화 노력도 기계를 척도로 새롭게 평가됐다.

기계에 의존한 유럽인들의 비교 척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세계의 패권 구도가 바뀌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이 유럽인들의 자신감에 상처를 주었고, 기계화된 대량살상은 '문명화 사명'의 허구성을 드러냈다. 유럽의 뒤를 이은 미국이 과학과 기술을 기반으로 내놓은 '근대화' 패러다임도 역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전통을 가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적정한 기술의 탐색이 필요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인간을 평가하는 새로운 척도를 제공한 과학과 기술은 17세기의 '과학혁명'을 통해 등장했다. 혁명은 특정한 한 가지 방식을 폐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과학사의 권위자인 미국 코넬대 피터 디어 교수는 '과학혁명: 유럽의 지식과 야망, 1500~1700'에서 이 시기 유럽에서 일어난 거대한 지적·문화적 전환의 핵심은 자연에 대한 의문을 '왜'에서 '어떻게'로 변환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자연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통한 '관조적 삶'이 자연을 실용적 목적으로 통제하고 활용하는 '실천적 삶'으로 전환됐다.

코페르니쿠스·케플러·갈릴레이로 이어지는 16세기의 변화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라기보다 '과학적 르네상스'에 불과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새로운 천문학이 프톨레마이오스의 고대 천문학이 남긴 유산을 계승한 것이라고 밝혔다. 과학은 여전히 신학과 철학에 종속되어 있었고, 신(神)의 의도를 이해하고, 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다.

하지만 17세기의 과학혁명은 이와 달랐다. 과거 전통을 복원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철학은 잘못 구상된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경험'을 통해 자연에 대한 본질적 지식의 수준을 넘어 실제로 인류 복지 증진에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가치를 가진 조작적 지식을 찾아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변화된 과학이 실용적인 기술과 손을 잡으면서 현대의 물질문명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런 기술에 의한 진보가 이제 진지한 성찰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기술의 진보가 반드시 인간의 정신적·윤리적 진보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공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첨단기술의 미래를 살펴본 '기술의 영혼'(에도아르도 본치넬리 지음, 김현주 옮김, 바이북스, 2011)도 함께 읽어볼 만하다. (20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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