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블 이야기
헬렌 맥도널드 지음, 공경희 옮김 / 판미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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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아마도. 솔직히 말하자면 저자 헬렌 맥도널드(이하 헬렌)가 아버지를 잃은 상실의 아픔으로 괴로워할 때는 기대했던 참매의 이야기가 좀처럼 나오지 않아 책장을 넘기는 손이 무뎌졌다. 하지만 그와 함께 그녀가 어릴 적부터 동경해오던 참매를 데려오기로 결정하고, 정말로 참매와 대면하기까지의 과정이 지리하면서도 한켠으론 자그마한 흥분이 채워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이야기, 그녀의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그녀가 어릴 적 보았던 매잡이와 매에 대한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섞이면서도 명확한 하나의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헬렌은 메이블과 만난다.

     어린 참매 메이블. 그렇다. 내가 사랑에 빠져버린 대상이 바로 메이블이다. 힘겹게 헬렌의 감정선을 따라잡기 위해 분투하던 나는 그녀가 메이블과 만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와 똑같은, 아니 유사한 감정 상태에 들어설 수 있었다. 최소한 메이블에 대한 감정에 한해선 정말로 그랬다.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맹금류에 대한 동경을 품고 커왔기 때문이리라. 비록 그녀가 세상의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메이블과 만나게 된 것이었을지라도. 어느 순간 그녀가 깨닫듯, 메이블은 그녀에게 도구가 아닌 그 존재 자체로 존재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메이블을 길들이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T.H. 화이트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참매 고스를 길들이는 과정을 담은 글 '참매'를 그녀의 시선으로 재해석하고 다시 그려낸다. 그녀가 도피 혹은 극복하고자 하는 현실과, 참매 메이블을 중심으로 메이블과 같은 시선으로 보는 야생의 세계, 그리고 화이트와 고스가 존재하는-그녀가 가고 싶지 않은 방향의 과거. 화이트가 고스를 길들이겠노라며 했던 대부분의 행동을 헬렌은 비판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한다. 결국 화이트는 고스를 길들이는데에 실패하고 고스는 화이트를 떠나버린다. 그럴 줄 알았다는 조소의 시선과 함께 그녀가 읽은 모든 동물이 나오는 글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 동물이 죽지 않았다는 안도함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감상이 아마 그녀가 화이트의 글을 그녀의 지침서 혹은 반면교사로 삼은 이유가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메이블과의 도피적인 삶을 살아나가면서 조금씩 그녀가 겪었던 거대한 상실을 빋아들이기 시작한다. 메이블은 그녀의 생각대로 성장해나가고, 그녀는 초조함과 과한 우려를 벗어낸다. 하지만 직장을 잃고 살던 집을 떠나야 하고, 아버지의 추도문을 써야하고....아버지의 부재라는 긴 터널을 아직 다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그녀는 줄 없이 메이블을 날려야하는 또 하나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직면하게 된다. 그녀가 참매를 길들이는 매잡이로서의 삶이 단계적으로 그녀의 또 다른 현재, 화이트와 고스라는 과거와 끊임없이 교차되며 펼쳐진다.

     처음엔 헬렌의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져나가는 문장들이 당혹스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메이블과 그녀가 만나고 그 둘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그녀의 것이 아닌 과거와 그녀가 피하고 싶어하는 현재를 나란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독특힌 경험의 글읽기를 하게 된 것 깉달까. 글을 읽는 내내 그녀의 김정선을 따르다보니 어느새 메이블과 사랑에 빠져버린 것 같다.


***


그리고 후기의 마지막 문단 덕분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담담한 문장들 사이로 어쩐지 헬렌의 눈물도 보인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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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메르세데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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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킹의 첫번째 탐정 소설이란 광고 문구를 봤을 때 기대했던 주인공은, 뭐랄까 세련된 날카로움이 묻어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혹은 신경질적인 독설가라든가. 어쨌든 소파에 파묻혀 자살을 생각하며 아버지의 38구경 M&P를 만지작거리는 무기력한 전직 형사일 줄 몰랐던 것만은 확실하다. 의외였고, 즐거웠다. 


     이야기는 한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심각한 경제난을 반영하듯, 취업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부터 몰려든 사람들. 심지어 젖먹이를 안고 구직을 위해 밤샘을 마다않는 젊은 여성까지 길게 줄을 서고 박람회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 곳으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돌진한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대기줄과 차에 들이박히고 만 사람들. 아이와 젊은 엄마도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은퇴한 전직 형사 호지스는 현역 기간 중에 미처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위에 언급한 '메르세데스 사건'이었다. 범인이 트릴로니 부인의 메르세데스 벤츠를 이용해 박람회장으로 돌진, 여덟명을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 그러한 사실 관계 외에 범인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아 그저 '미스터 메르세데스'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호지스에게 한 통의 펀지를 보내면서 이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길고 긴 장문의 편지를 통해 그는 호지스를 조롱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하도록 유도한다. 사실 그의 목적은 늘 무기력하게 총을 만지작거리며 언제 삶을 마감할지 고민하던 호지스가 정말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끝내게끔 만드는 것이었지만, 호지스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기대와 달리 생기를 찾고 그를 추적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잡은 첫번째 단서ㅡ범인이 직접 보낸 장문의 편지를 손에 쥐고서. 그는 전 파트너, 메르세데스 벤츠의 주인이었던 트릴로니 부인의 여동생 등을 만나고, 그를 쫒는다. 물론 이야기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방향에서도 진행된다.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시작하는 탐정소설은 어느 정도 자신의 패를 까놓고 시작하는 느낌이라 어지간해선 만족스럽지 않은데, 타고난 이야기꾼 스티븐 킹이지 않은가. 이야기는 줄곧 흥미롭게 진행된다. 범인의 평범하지만은 않았던 과거사를 이야기하지만, 동정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이야기는 뛰어난 천재가 악랄한 범죄자를 잡는 내용은 아니다. 어쩐지 현실에서도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이 구르고 다치면서 나쁜 범죄자를 쫒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래서 더 흥미롭고,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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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굴 - 영화 [퇴마 : 무녀굴]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7
신진오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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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녀굴. 이 소설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축축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굴'이라는 단어가 내게 그런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혹은 '무녀'가 그러했거나. 어느 쪽이 되었든 공포, 호러 소설엔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아울러 이 작품 전체를 매우 압축적으로 잘 담아낸 제목이라는 건 틀림없다. 읽기 전부터도 그러할 것 같단 느낌을 받았지만, 다 읽고나서도 역시 참 잘 지어진 제목이구나, 싶다.  직관적이면서도 신비로운 그런. 


    이야기는 젊은 남녀로 이뤄진 산악자전거 동호회의 하이킹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된다. 물론 그들은 제주 김녕사굴. 일명 사굴으로도 불리는 그 곳을 찾는다. 애초에 정해진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마치 운명처럼. 그리고 그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빠진 채 실종 되어 버린다. 정체 모를 방울소리와 함께. 하지만 사실 그들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다. 시간도, 장소도 그들에게서 훌쩍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남자, 진명이 이 글을 이끌어 나갈 인물이자 퇴마사이니까. 진명은 대학 선배인 주열의 장례식장을 찾고, 그 곳에서 주열의 부인이자,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인 금주를 처음 만나게 된다. 물론 금주의 진명에 대한 첫인상은 별로였다. '그는 마치 백혈병 환자 같은 창백한 피부에 병적인 우울함이 감도는 인상을 지니고' 있는데다 '펑크밴드들이 할 만한 금속 귀찌'에 '산스크리트어로 음자가 새겨진 반지'를 양 손가락에 끼고 있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p.27)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들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연이은 죽음과 미스터리한 일들이 결국 금주를 진명에게로 이끌고, 그즈음 앞서 실종됐던 산악자전거 동호회 회원 중 한 명인 희진이 발견된다. 진명은 희진의 치료에도 참가하게 되는데, 전혀 상관 없어 보이던, 제각각 존재하던 사건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즈음부터다. 개인적으로 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큰 하나의 줄기를 만들어내는 타입의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이 작품도 그런 전개 방식을 택하고 있어 읽는 내내 단서 하나 놓칠새라 긴장감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산악자전거 동호회의 단체실종, 주열의 죽음과 금주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하나하나만 놓고 보아도 흥미로운 사건들이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꼼꼼하게 맞아 들어간다. 거기에 토속신앙과 뼈아픈 현대사의 비극까지 얽혀 들어가면서 마지막까지 참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결말까지도 말이다. 흔히들 이영도의 작품을 한국형 판타지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작품은 한국형 스릴러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이 이야기를 그대로 영화에서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제주 김녕사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상상하기가 오싹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했는데 그만큼 영상화에 어울리는 묘사와 내용이 많았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

     부천에 사는 나는 늘 여름이 오면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이하 부천영화제)를 즐길 생각에 일찌감치 들뜨곤 한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여름엔 장르문학, 호러공포영화다. 그런 내가 영화제를 마무리할 작품으로 골랐던 건 폐막작이기도 한 '퇴마 : 무녀굴' 이었다. 그리고 영화제를 기다리며 나는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인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고. 물론 지금은 원작소설도, 영화도 모두 감상을 마친 상태다. 비록 이 글에선 영화보단 소설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말았지만. 사실 영화와 이 소설은 많이 다르면서도 닮았다. 만약 영화만을 보게 될 예비감상자가 있다면 꼭 원작 소설도 읽어봤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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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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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렬한 셜로키언이 아니라 하더라도, 만약 아서 코난 도일의 '마지막 사건'을 읽은 사람이라면 셜록 홈즈가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이 다소 갑작스럽고 의문스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난 그랬었다. 하지만 어째설까, 모리어티 교수의 죽음에 대해선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셜록 홈즈와 마찬가지로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는데도ㅡ애초에 모리어티 교수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지만. 물론 지금 앤터니 호로비츠의 이 소설, 셜록 홈즈 -모리어티의 죽음- 을 읽고 나니 이 흥미로운 단편을 보는 또 하나의 방향을 알아낸 기분이 든다. 그리고 전혀 인지하고 있지 않았던 또 다른 등장인물 '애설니 존스' 역시 새롭게 내 머릿 속에 기억될 셜록 홈즈 속 인물이 되었고. 

     이 소설은 바로 그 내가 놓쳤던 모리어티 교수의 죽음이란 또 하나의 사건에서부터 출발한다. 미국의 탐정 사무소 핑거턴 소속의 프레더릭 체이스가 왓슨 역할을 하는 화자다. 그는 모리어티의 죽음을 쫓아 라이헨바흐 부근의 마이링겐의 경찰서에서 그의 사체를 확인하기 위해 현지 경찰과 옥신각신하다 역시 같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에서 온 애설니 존스 경감과 만나게 된다. 물론 '4개의 서명'에서 등장했던 애설니 경감이 바로 새로운 홈즈의 롤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고. 사실 프레더릭 체이스는 미국에서 악명 높은 범죄자 클래런스 데버루가 모리어티와 손을 잡고 유럽에서 세력을 넓혀 나가려고 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스위스까지 오게 된 것인데, 정작 모리어티가 죽어버려 그 실마리를 놓친 상태였다. 이 때 나타난 애설니 경감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모리어티의 사체 속에 숨겨진 편지를 발견하고 그 속에 숨겨진 암호를 해결해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리어티의 죽음을 날조해, 클래런스 데버루 일당을 소탕하기로 결의한다. 

     이후의 무대는 런던으로 옮겨지고, 모리어티 교수가 가지고 있던 암호문 속 장소, 카페 로열을 시작으로 런던에 깊숙하게 침투해있던 클래런스 데버루의 흔적들을 추적하게 된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확실히 이 작가의 전작 '실크 하우스의 비밀'처럼 아서 코난 도일의 그것을 제법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헛다리를 짚는 왓슨과 정답을 말해주지 않는 홈즈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프레더릭과 애설니 경감의 관계 속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 모리어티의 죽음을 계기로 만나게 된 이 두 사람이 극악무도한 범죄자 클래런스 데버루를 옭아매나가는 과정은 흥미롭다. 하나씩 하나씩 거리를 좁혀 나가는 과정에서도 긴장감이 떨어지기는 커녕 점점 더 의구심이 커져나간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직접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의 쾌감...! 사실 이 때의 애설니 경감의 모습은 홈즈를 유난히 떠올리게 했다.  

     이 소설은 셜록 홈즈 재단으로부터 공식 인증을 받은 앤터니 호로비츠의 두번째 장편이다. 아서 코난 도일은 장편보다 단편 소설 속에서 셜록 홈즈를 더 많이 그려냈고 그 중 장편 소설은 고작 4편 뿐이다. 단편보다 장편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두툼한 장편 소설인 앤터니 호로비츠의 글들이 더욱 반갑다. 원작의 비워져 있는 공간을 촘촘하게 채워나가는 느낌이 드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닐 거라 믿는다. 다음 작품이 더더욱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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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오프 밀리언셀러 클럽 139
데이비드 발다치 엮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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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이 책을 집어 든 누군가가 자타공인 영미 스릴러 소설의 엄청난 팬이라면, 이 책의 시도는 상상만 해도 흥분되는, 혹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런 엄청난 하나의 '사건'이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와 데니스 루헤인의 패트릭 켄지가, 리 차일드의 잭 리처와 조셉 핀더의 닉 헬러가 하나의 글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함께 사건을 해결하다니. 팬이 쓰는 팬픽션이 아닌, 진짜 그들의 부모인 작가들이 의견 교환을 하며 써내려간 콜라보레이션 작품들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니. 영미 스릴러 문학의 팬이 아닌 이들도 쉽게 와닿게끔 부연 설명을 하자면 그런거다. 아서 코난 도일과 모리스 르블랑이 펜 끝을 맞대고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이 함께 등장하는 글을 발표한 셈이랄까. ㅡ모리스 르블랑이 발표한 작품 속 헐록 숌즈만 생각해봐도 이러한 협업은 오래 전부터 다들 꿈은 꾸지만 쉽게 이루어지기 힘든 그런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나 역시 약간 들뜬 마음으로 책을 받아들고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곧 책을 읽기 전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한편으론 나 같은 편식쟁이 독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안내서가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만약 내가 페이스 오프에 등장하는 모든 작가의 작품을 다 읽었더라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열배, 아니 백배 혹은 수천배쯤 더 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작품을 통해 접하고, 좋아하거나 응원하는 소설 속 캐릭터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해당 작품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을 때 훨씬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등장인물은 낯설지만 짧게는 23페이지, 길게는 거의 백여페이지에 육박하는 다양한 사건과 모험들을 읽어내려가면서 작가들의 문장과 나는 아직 모르던 캐릭터들의 매력을 발견해나가는 재미를 느꼈다. 예를 들면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이라든가, 더글라스 프레스턴과 링컨 차일드의 펜더개스트 같은. 아, 그 펜더개스트와 짝을 이뤘던 R. L. 스타인의 슬래피도 물론 인상적이었고, 린우드 바클레이의 글렌 가버, 아니 글렌의 딸인 켈리에게 반해버렸다. 마지막 책장을 넘긴 후에 서둘러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그들의 작품을 검색하고, 심사숙고 끝에 몇 개의 소설을 장바구니에 넣은 걸 보면 확실히 이 책은 나 같이 얕고 편식이 심한 독자의 훌륭한 지침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게 맞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 속 캐릭터들이 함께 움직이는 이야기를 읽는 것도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었지만, 역시 각 작품 속으로 들어가기 전 한 페이지 남짓, 해당 작가들이 어떻게 이 협업을 받아들이고 진행했는지 써놓은 부분을 읽을 수 있다는 즐거움도 있다는 얘기를 빼먹을 순 없을 듯 하다. 원래 독자들은 그런 소소한 뒷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달려드는 법이니까. 특히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존 레스크로아트와 T 제퍼슨 파커의 '침묵의 사냥'의 기원이었다. 그 설명에 따르면 두 작가는 본인들이 실제로 함께 낚시를 하며 겪은 이야기 속에 자신들의 캐릭터, 와이어트 헌트와 조 트로나를 던져 넣고, '스릴러 선집이니까 주인공들이 위기에 처하는 모험'을 덮어 씌웠다. (p.392) 이런 에피소드들을 통해 뭐랄까, 작은 포장마자에 앉아서 서로 자신의 캐릭터들을 내세우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작가들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면 독자의 지나친 망상일까. 물론 작가들은 실제론 주로 이메일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나갔지만 말이다. 

     사실 난 좀처럼 단편집을 읽지 못하는 편이다. 이야기에 푹 빠져들 무렵 끝이 나버리는 느낌이 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란 생각도 들고. 하지만 페이스 오프는 그런 불안감 없이 읽을 수 있었던 작품집이었다. 내가 아직 읽지 못한 수십, 수백개의 작품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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