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청계천 8가

청계천 8가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틈 없는 인파로 가득찬

땀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 솟은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부부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흙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흙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칠흙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마태우스 > 군가산점에 대한 의문들

* 제가 잘못 생각한 게 있으면 따끔하게 지적해 주시어요. 원래 맞으면서 배우는 거니깐요^^

-----------

 

 

 

 

 

 

 

국방부가 군가산점제도를 부활시키려 노력 중이라는 기사가 인터넷에 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 밑에 댓글을 달았는데, 한두번 나온 것도 아닐진대 그게 기사화될 때마다 그토록 게시판을 도배하는 열성을 보이는 분들이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가산점이 당연하다는 주장이 압승을 했다. 놀라운 것은 가장 추천을 많이 받은, 소위 베스트 댓글을 쓴 이가 여성이라는 것. 의외라고 생각해서 클릭을 했지만, 글 내용을 보니 이해가 갔다.

“여자들은 한가롭게 명품 얘기나 하는데, 군대에서 고생하는 남자들에게 가산점을 주는 건 당연하다.”

난리가 났다. ‘너무 멋지다’ ‘다른 여자들도 본받아야 한다’ ‘사랑해요 누님’...

댓글들을 읽으면서 이 현상에 대해 몇가지 의문을 가졌기에, 거기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첫째, 왜 공무원만일까?

군 복무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게 당연한 일이라면, 그게 왜 꼭 공무원 시험에만 국한되어야 하는지 난 의문이다. 취업을 하는 사람들 중 공무원이 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텐데 말이다. 군복무를 시킨 주체가 국가이니 공무원에만 적용시켜야 한다고 할지 몰라도, 공무원이나 사기업이나 잘 먹고 잘 살자고 있는 존재 아닌가? 그래서 묻는다. “왜 국가에게 사기업에도 가산점을 줘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가?”


둘째, 병역은 선택이 아닌 의무니까 가산점을 줘야 한다고 주장을 하던데, 이것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 국민의 의무 중 납세의 의무라는 게 있다. 국방의 의무가 그렇듯 세금도 내고 싶은 사람이 없고, 의무를 안하기 위해 수를 쓰다가 걸리는 사람이 많은 것도 공통점이다. 국방에는 ‘신성한’이란  형용사가 붙지만, 세금에는 그런 호칭조차 붙지 않으며, 돈을 버는 한 평생 지속된다는 점에서 세금이야말로 더 고되고 힘든 의무일 수 있다(군대 2년 갔다오면 세금면제를 해주겠다고 해보자. 군대, 미어터질 거다). 군가산점이 당연하다면 세금을 낸 사람 혹은 그 자녀에게 가산점을 줘야 마땅하고, 많이 낼수록 가산점은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엄청난 반발에 시달릴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돈이 많은 사람만 공무원을 해야 하냐는. 이렇게 묻겠다. “그렇다면 남자만 공무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한 것인가?”


셋째, 왜 장애인 문제를 외면하는가. 가산점에 대해 최초로 헌법 소원을 낸 주체가 몇 명의 여성과 장애인들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군가산점은 남녀문제일 뿐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산점 찬성론자들은 교묘하게도 문제를 남녀대결로만 몰고 간다. 그런 태도는 분명 비겁하며, 본질을 흐리는 행위다.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보기 힘든 사회라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나라 사람 중 장애인의 비율은 대략 5-10%에 달한다. 그들의 생계를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 고용 특별법이라는 걸 만들어 종업원 수가 어느 정도 이상 되는 기업에서 일정 비율 이상의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을 경우 1인당 얼마의 벌금을 매달 물리고 있다. 그런데, 안내견 광고를 비롯해서 장애인을 생각하는 척 홍보를 해대는 어느 기업에선-몇 년 전 통계라 지금은 바뀌었을지 모르지만-단 한명의 장애인도 고용하지 않았었다(차라리 1인당 20만원의 벌금을 내는 게 낫다는 그들의 생각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어서, 장애인의 주무부서인 복지부에서조차 0.5%의 할당률을 채우지 못한 상태이다). 이러니 장애인들이 취업할 길은 시험 성적만 가지고 당락을 결정하는 공무원 뿐이지만, 그놈의 군 가산점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묻겠다. “장애인은 공무원이 되면 안되는가?”


네 번째, 혜택은 꼭 취업시 가산점을 주는 것이어야 하는가?

애당초 여성단체와 장애인들이 주장한 것은 가산점 찬성론자들의 말처럼 군복무 남성에게 혜택을 전혀 주지 말자는 게 아니었다. 1-2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은 여성과 장애인이 공무원이 되는 걸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진입장벽이 되므로, 가산점 대신 호봉 산정시 복무기간만큼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식으로 혜택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헌재가 가산점을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도 그런 취지에서였으리라.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취업시 가산점을 주는 대신 2호봉 쯤 높은 연봉을 주는 건 군복무 혜택이 아니니?”


사실 난 이 의문들에 대한 답을 대략은 짐작하고 있다. 많은 분들이 지적하신대로 군가산점 문제의 근본 원인은 군대생활이 너무도 힘든 데서 기인한다. 즉, 제대 후 상당 기간 꿈에 나올 정도로 고달픈 군생활을 어떻게든 보상받고 싶은거다. 징집의 주체가 국가라는 걸 잘 앍고 있지만, 군대에 가지 않으면서 군인들을 적대시하는 듯한 여성들이 얄미워서 그들에게 분노를 투사하는 거다. 군가산점 논쟁이 나올 때마다 수천, 수만의 댓글이 달리고, 여자도 군대가라는 주장이 난무할 뿐 아니라, 예비역을 비하했다는 이유로 모 대학 웹진(월장이라고 한다)이 폭격을 당한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런 식으로 울분을 해소하는 게 전혀 도움이 안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게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거다. 생각해 보시라. 당신은 정말 당신의 누이, 애인이 군대에 가는 걸 원하는가?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다. 군대를 지금처럼 의무로 가게 할 게 아니라,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이 경우 재원 조달을 어찌할 것인지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겠지만, 비용 때문에 그게 불가능하다면 재원조달을 어찌할 것인지 군대를 조금 덜 힘들게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첨단무기가 지배하는 현대전에서 쪽수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면 병력을 감축하고 그럼으로써 복무기간을 줄인다든지, 내무반 대신 2인1조로 방을 쓰게 해 상사가 개입할 소지를 줄이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군대가 꼭 필요한 것이라면 가산점을 가지고 여성과 소모전을 벌이기보다는 복무 환경이 좋은 군대를 만들어 달라고 국가에게 요구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릴케 현상 > 교육비 공포가 피임을 부른다

교육비 공포가 피임을 부른다

성차별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자 대학입시전쟁과도 깊이 연관된 출산파업… 엘리트층의 명문대 출신 독식을 제어하도록 ‘경쟁의 병목현상’ 뚫어줘야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일제 말기에 일제는 “낳아라! 불려라! 길러라!”라는 표어를 내걸고 10명 이상의 자녀를 낳은 가정에 대한 표창식을 거행하며 출산을 장려했다. 해방 뒤 이승만 정권도 다산 여성에 대한 표창을 계속했다.

‘3·3·35운동’에서 ‘1·2·30운동’까지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1962년부터 가족계획 사업을 국가 시책으로 실시했다. 국가 시책으로서의 가족계획 사업 채택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이어 한국이 세 번째였다. 가족계획 사업은 전국의 모든 군에 보건소가 설치된 65년부터 본격화됐다. 이른바 ‘3·3·35운동’이 벌어졌다. “3명의 아이를 3살 터울로 35살 이전에 낳자”라거나 “3살 터울 셋만 낳고 35살 단산하자”는 구호를 내건 운동이었다.

1970년대 가족계획의 목표는 둘로 줄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루 앞선 가족계획 십년 앞선 생활 안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와 같은 구호들이 외쳐졌다. 80년대는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었다.


△ 2006년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아이는 1.08명으로 세계 최저를 기록했다. 저출산 재앙은 아이 낳기가 두려운 우리의 모순된 현실의 반영이다. 서울의 한 병원 신생아실 풍경.

그러한 구호 뒤에 숨은 치열한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했다. 정관수술 받으면 예비군 훈련 면제해준다고 유혹하던 것도 눈물겨웠지만, 자식에 대해 다다익선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일도 눈물겨웠다. 소현숙이 쓴 <너무 많이 낳아 창피합니다: 가족계획>이라는 글에 따르면, “가족계획 사업 초기만 하더라도 마을에 들어간 가족계획 지도요원들은 마을 할아버지들이 지팡이를 들고 쫓아나와 도망나오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렇게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편이나 시부모 몰래 피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73년까지만 해도 남편 몰래 피임한 여성들이 57.4%나 되며, 시부모가 모르는 경우가 55.4%나 된다.”

그런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출산력은 1960년을 정점으로 해서 빠른 속도로 감소하다가 80년대 후반엔 재생산 수준 이하로까지 떨어졌다. 90년대 들어선 더욱 낮아졌다. 60년대 초 3%였던 인구증가율은 90년대에 이르러 1% 미만으로 감소했으며 출산율로는 1.6명으로까지 떨어졌다.

이런 출산율 감소의 주요 원인은 산업화로 대변되는 사회구조 변동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선 자녀의 교육 문제가 출산을 억제하는 최대 요인으로 등장했다. 2004년 12월 전북여성정치발전센터가 전주에 거주하는 20~40대 여성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교육비 무서워 자녀 못 낳는다”고 답한 사람이 42.1%로 나타났다.

2005년 3월28일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가 출산억제 기관에서 출산장려 기관으로의 변신을 선언하면서 ‘1·2·30운동’을 시작했다. 결혼 뒤 1년 내에 임신을 해서 2명의 자녀를 30살 이전에 낳아 잘 기르자는 의미였다.


△ 전국적으로 뿌려진 1960~80년대가족계획 포스터들.

2005년 8월24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4년 출생·사망 통계 결과’에 따르면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아이(합계출산율)는 1.16명으로 전년보다 0.03명이 더 줄었다. 1.16명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인 미국(2.04명·2003년), 영국(1.79명·2004년), 일본(1.29명·2004년) 등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언론은 이를 ‘1.16 쇼크’라 부르면서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특정 도의 인구 감소는 ‘재앙’ 아닌가

<중앙일보>는 “이러다가 우리는 17년 뒤부터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웃돌아 절대 인구 수가 감소하는 이른바 ‘죽음에 이르는 사회’를 맞게 된다”고 했고, <조선일보>는 “답답하고 한심스러운 것은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유사 이래의 재난 사태’라 할 인구의 감소를 눈앞에 두고 이 정부가 딴전만 부리고 있는 것이다”고 했다.

2006년 5월8일엔 ‘1.08 쇼크’가 찾아왔다. 통계청이 발표한 합계 출산율이 1.08로 세계 최저를 기록한 것이다. 언론은 또 한 번 ‘재앙의 도래’를 선언하고 나섰다. <중앙일보>는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면서 “서두르지 않으면 나라가 저출산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고 했고, <조선일보>는 ‘비상 상황’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가다간 경제는 주저앉고 복지는 부도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저출산 재앙’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그건 극소수고, 다른 언론과 대부분의 지식인들도 ‘1.08 쇼크’에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나라의 인구 감소가 ‘재앙’이라면, 특정 도(道)의 인구 감소는 ‘재앙’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여러 도가 해당될 것이나, 가장 대표적인 전라북도의 경우를 살펴보자. 1966년 전북의 인구는 252만 명이었다. 당시 한국 인구는 2900만 명이었다. 그간의 인구증가율을 따진다면, 전북 인구는 오늘날 417만 명이 되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얼마인가? 178만 명이다! 다른 도들처럼 무슨 광역시가 떨어져나가 그런 게 아니다. 전북엔 광역시가 없다. 먹고살 길이 없어 무작정 다른 지역, 특히 수도권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 1973년 한 호텔에서 ‘낳는 것은 여자가, 안 낳는 것은 남자가’라는 가족계획 세미나 광경이다. 애를 낳지 말라는 국가주의적 구호는 30년이 지난 오늘 애를 더 낳자는 구호로 변했다.(사진/ 연합)

우리 언론이 지방 인구 준다고 걱정해준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국제경쟁력을 앞세워 수도권 규제를 풀지 않는다고 아우성치면서 정부 욕하기에만 바빴다. 무슨 대안을 제시하면서 욕한 것도 아니었다. 맹목적인 폭격이었다. 그런 폭격 받다가 헷가닥한 건지는 몰라도 노무현 정권은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기록될 뻔했던 ‘지방 살리기’ 프로젝트를 스스로 다 망쳐놨다. 노 정권의 업적은 정반대로 수도권 신도시 개발과 수도권 공장 신·증설 허용이 될지도 모른다. 수도권에 국내 대기업 공장 신·증설이 허용되는 것은 10년 만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거룩한 업적인가.

나라의 인구 감소하는 게 ‘재앙’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방 인구 감소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한다. 그게 정상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할 일이다. 또 하나 주목할 건 출산율이 감소하는 이유다. 그 이유도 규명하지 않은 채, 출산율 감소를 부추길 정책을 고집하면서 출산율 감소를 재앙으로 보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희진은 “저출산의 주원인은 가임 적령기 여성이 결혼 자체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평균 출산 연령이 서른 살에 육박하는 29.7살이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여성(41.5%)이 남성(19.9%)보다 두 배 이상 부정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여성 출산 독려는 ‘불가능한 임무’

“이제까지 한국이 과도한 군사비 지출에도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사회복지 비용을 전혀 부담하지 않고 이를 가족 내 여성의 성역할 노동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여성들은 더는 이러한 이중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현모양처’와 ‘커리어우먼’ 사이에서 분열과 고통을 감수하지 않는다. 저출산은 그간의 성차별에 대한 여성들의 조용하지만 격렬한 저항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던진 부메랑인 것이다. 저출산은 전통적인 여성 억압의 기제였던 출산을 저항의 무기로 삼은 여성들의 정치적 선택이다.”

이어 정희진은 “여성의 출산을 독려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대책이기 이전에, ‘불가능한 임무’다. 국민과 노동자의 개념을 바꾸고 인종적, 성적, 연령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이다”고 말했다.

동의한다. 다만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작게는 사교육비, 크게는 대학입시 전쟁의 문제다. 앞서 거론한 전북여성정치발전센터 조사 외에도 여러 조사 결과 사교육비 부담 문제가 출산율 저하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네 성적에 잠이 오냐?” “쟤 깨워라” “30분 더 공부하면 남편 직업이(마누라 몸매가) 달라진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마누라가 바뀐다”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 “끝없는 연습만이 살길이다. 10시간: 서울대, 8시간: 연대, 7시간: 이대”

일부 고교 교실의 급훈들이다. 지난 3월 교육부가 비교육적이라며 전국 시·도 교육청에서 장학지도를 통해 해당 학교장들이 재검토할 수 있도록 당부해달라며 예시한 것들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비교육적 급훈들이야말로 대학입시 전쟁의 진실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이즈음 사이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죽음의 트라이앵글: 누가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가’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2008년 대입이 내신-수능-대학별 고사로 이뤄진 ‘최악의 삼각형’이라고 주장하면서 “친구를 짓밟고 적으로 만드는 것이 창의적 인재인가”라고 물었다. 그 동영상을 만든 학생들은 “우리 가슴속의 분노와 피해의식, 그 모든 것은 바로 당신들이 키웠다”면서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다.


△ 대학입시를 목표로 하는 사교육비 부담은 출산율 저하의 주범이다. 묻지마 교육비 투자를 불러온 입시 전쟁의 해법 없인 출산율 저하에 대한 해법도 없다.(사진/연합)

이 동영상이 말한 ‘당신들’은 정부·학교·학원·대학 등이었지만, 기성세대는 누구도 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 2003년 대학입시 전쟁으로 인해 자살을 하는 어린 학생들이 속출했으며, 그 연령대가 초등학교 5학년 학생으로까지 내려갔을 때, 언론은 자살 사건들을 개탄하듯이 보도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한국형 약육강식 시스템을 사실상 옹호했다.

대입 입시 전쟁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걸 정상적인 ‘경쟁’의 수준으로 완화하는 방법은 이미 나와 있다. 그건 부모의 책임으로 간주되는, 10대 후반에 한 번 치르는 입시전쟁으로 평생을 결정하게 만드는 기존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엘리트층의 대부분이 지금처럼 서너 개 또는 대여섯 개 대학 출신이 독식하는 한, 그 그룹에 끼고자 하는 전쟁은 사라지지 않게 돼 있다.

보수언론이여, 진정한 국가주의자가 돼라

따라서 기존 학벌의 ‘경로 의존’에 변화를 주는 게 필요하다. 기존 명문대들의 정원을 대폭 줄여 소수 정예주의로 가게 하면서 그들의 엘리트층 독식을 제어하고, 수십 개 대학 출신이 엘리트층 다수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한다면, 지금과 같은 경쟁의 병목 현상은 크게 완화될 수 있다. 일단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다시 한 번 경쟁을 해볼 수 있고 대학 졸업 뒤에도 경쟁이 가능하게끔 하자는 것이다. 자녀의 생존경쟁 책임을 부모가 지지 않게끔 해주자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보자면 지금과 같은 ‘고교 평준화’ 정책은 올바른 대안이 아니다. ‘고교 평준화’ 철폐는 더더욱 아니다. 엘리트층의 명문대 출신 독식은 이미 오랜 ‘경로’로 설정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경로를 바꿔주지 않는 한 그 어떤 입시정책 변화도 하나 마나 한 짓이다. 그럼에도 그런 하나 마나 한 짓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이유는 입시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은 물론 정부 밖에서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들조차 기존 경로의 기득권자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예 그런 문제의식이 없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로 변경 주장이 무조건적인 학벌 타파로 오해받은 측면도 있다. 진정 변화를 이뤄내고자 한다면, 교육운동가들도 학벌 타파는 불가능한 목표라는 걸 인정하고 경쟁의 병목 현상을 뚫어주자는 현실적인 목표로 이동하면 좋겠다.

보수언론에도 당부하고 싶다. 비판이 아닌 호소를 하고 싶다. 담론상으론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한국에선 국가주의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과연 한국에 진정한 국가주의자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보수언론이 부디 진정한 국가주의에 충실해주면 좋겠다. 진정 국가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앞뒤가 맞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면, ‘출산율 재앙’의 주요 원인이 대학 입시 전쟁에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기존 대학 입시 전쟁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더욱 가열찬 전쟁을 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일만큼은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보수언론이 대학 입시 문제를 다룬 지면을 보라. ‘평등주의’니 ‘포퓰리즘’이니 ‘하향 평준화’니 운운하는 이데올로기 공세가 난무한다. 입만 열었다 하면 그 소리인지라 신물이 날 지경이다. 보수언론이 원하는 대로 대학 입시 정책이 이루어진다면, 출산율은 더욱 감소할 것이다. 자신들이 믿는 어떤 ‘재앙’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이 믿는 또 다른 ‘재앙’을 자초하는 그런 어리석은 게임을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보수언론이 진보 진영을 향해 쏟아내는 독설 중엔 타당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비극은 그런 독설이 자기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역설 같지만, 이는 그들이 진정한 국가주의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야는 국가에까지 뻗어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협소한 당파적 범주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총장은 서울대만 생각할 것인가

서울대 총장도 마찬가지다. 서울대 총장쯤 되면 대한민국 교육 전체를 생각하는 발언을 할 법도 한데 여태까지 그런 총장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서울대 기득권 지키기에만 일로매진했다. 서울대가 잘되면 무조건 한국이 잘된다는 그들의 신앙은 자기 재벌그룹이 잘되면 그게 곧 한국이 잘되는 거라는 재벌 총수들의 신앙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국가주의자의 씨가 마른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국가주의자는 없는데 국가주의 비판이 난무하는 한국의 모습은 보기에 처량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왜 우리에겐 만엽집 같은 책이 없을까?
만요슈 - 고대 일본을 읽는 백과사전 e시대의 절대사상 7
구정호 지음 / 살림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만엽집 같은 책을 접할 때 순수하게 감상할 수 없음은 비참한 일이다.

아무리 우리 역사와 전통이 우수하다고 주입식교육을 받아도 세뇌되지를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아 영광스러운 무엇이 보이는가. 모든 광신이 비롯되는 지점이 거기다. 우리의 지나친 애국심, 지나친 기독교 믿음. 의심스러운 것을 믿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할 때 광신이 될 수밖에 없다. 미치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다. 우리의 이 모든 열등감이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름 의식있다는 사람들은 지적하지만, 동시에 역식민사관의 공격을 매일 받고 있어도 우리에 대한 자긍심은 생길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2. 몇 년 전 교토와 나라의 그 분위기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라 역에서 동대사(도다이지)를 가는 길목에 이름은 잊었지만 작은 못이 하나 있다. 가이드북은 그 못이 만엽집에도 나오는 오래된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고 있었다. 오, 고딩 때 향가를 배우면서 언급되던 그 만엽집.

 

3.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도이장가를 합쳐 26수의 향가를 가진 우리와  20권 4,516수의 와카가 수록된 만요슈를 가진 일본. '이러한 현실에서 과거의 역사적 상황만을 내세워 만요슈의 노래가 향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학문적 자세가 결여된 태도다.' (p.8)

 

4. 

(1) 형성시기 : 7세기 중반~8세기 후반, 천황과 귀족의 작품이 대다수 그러나 농민, 병사의 노래까지 수록. 

(2) 와카의 가체 : 장가, 단가(57577), 세도카(577577), 붓소쿠세키카, 렌가

(3) 와카의 분류 : 조카(사랑노래), 소몬(장례노래), 반카(의례가)

(4) 일본 문학사의 구분 : 상대(794 헤이안 천도까지, 고지키, 니혼쇼키, 만요슈)      중고(1192 가마쿠라 막부 개설까지, 고킨와카슈, 겐지모노가타리)      중세(1603 에도 막부 개설까지, 군기모노가타리, 노, 교겐)     근세(1868 메이지유신까지, 하이카이)      근대(현재까지)

 

5. 만요슈의 의미, 만요슈의 표기(읽는 법), 일본문학의 발전과 관련한 만요슈의 역사 등이 쉽게 소개되어 있음.

 

6. 몇 가지 맘에 와 닿는 와카를 소개한다.

다만 만요슈를 시집처럼 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 당시 그들에겐 노래였을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에겐 몇 가지를 빼고는 거의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저자는 만요슈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고대 일본을 알 수 있는 백과사전 내지는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하고 싶다는데, 그 만큼 지금에 와서는 시집이 아니라 민속자료집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는 뜻이리라. 그래도 일본문학을 배우고 일본운문의 전통을 알고 싶은 사람은 꼭 한 번 읽어 볼 만 할 것이다.

권두가(1-1)

천황이 지은 노래

바구니 바구니 들고 호미 들고 호미 들고서 이 언덕에서 나물 뜯는 아가씨 집을 고하라 이름 고하라 성스러운 야마토 이 나라는 내가 다스리로다 내가 다스리로다 내가 먼저 고할까 집과 이름을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온 듯하다 새하얀 빛의 빨래 말리고 있는 아메노 가구야마(1-28)

당신이 바로 패랭이면 좋겠네 나 아침마다 그 꽃 손에 들고서 항상 그리워하리(3-408)

산다는 것이 근심과 염치없다 생각하지만 도망갈 수 없다네 새처럼 날 수 없기에(5-893)

고개를 들어 초승달 바라보니 한 번 보았던 그 임의 가는 눈썹 생각이 나는구나(7-994)

내 집 뜨락의 오얏꽃 송이일까 떨어지는 건 잔설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일까(19-4140)

 끝 노래(20-4516)

3년 정월 초하루 이나바 지방의 현청에서 지방 관리들과 함께한 연회에서 지은 노래 한 수 - 제사(제목)

새로운 해가 처음 시작되는 날 초춘인 오늘 내리는 이 눈처럼 좋은 일 쌓이거라

위 한 수는 수령인 오토모 스쿠네 야카모치의 작 -좌주

 

 7.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이 비참함은 어떻게 극복할 수가 있을까.

여기는 이백이 뱃놀이를 하던 곳, 저기는 소동파가 xx를 읊던 곳, 여긴 루쉰이 xx를 썼던 건물,

여기는 만요슈 x권 x번째에 나오는 연못, 저기는 만요슈에서 천황이 나들이 하던 곳.

왜 우리에겐 그런 향기가 주어지지 않았지, 1000년 뒤 우리 후손은 가질 수 있는 행운이 따를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년이 2017-08-03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십년도 지난 포스팅이지만, 저 역시 동감합니다. 어디선가 ‘수이전‘ 원전이 뚝 발견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출처 : 국경을넘어 > 격물치지
주자학과 양명학
시마다 겐지 지음, 김석근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이전에 전공을 공부하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일본어 공부하기 위해서 샀던 책이다. 문고판으로 나왔던 것이 이제는 판형이 좀 더 큼직하게 변형되었다.  암파문고의 원본을 번역본과 대조해 보면서 띠엄띠엄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책은 주자학과 양명학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등장하는 지 잘 보여준다. 주자학이 태어나게 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것을 딛고 양명학이 어떻게 나오는 지 잘 나타나 있다. 관념적으로 흐르는 철학책이 아니라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서 제일 인상적인 곳은 양명의 대나무 실험 장면이다. 양명이 친구와 함께 격물치지에 도전하는 장면이다.

격물치지는 사서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주희는 “세상의 모든 사물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할 것 없이 모두 그 이치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사물(物)을 끝까지 연구하면(格) 그 이치(知)를 환히 알 수 있게(致) 된다”라고 했다.

광적인 주자학의 신봉자 왕양명은 한번 도전하였다. 그는 말한다. “격물[사물에 대한 연구]은 주자의 학설에 의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누구라도 말하는데, 주자의 학설을 실제 행해 본 사람이 있을까? 나는 실제로 해 보았다“


그는 이어서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천하의 사물을 격(格;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선 화단의 대나무를 격물한 것이다. 같이 격물을 시작한 친구는 3일 만에 노이로제 증상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격물을 시작한 지 7일 만에 드디어 병이 나고 말았다. 결국 성인이라는 경지는 되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하면서 탄식을 한다. 친구와 함께 대나무를 뚫어지게 처다보고 있는 왕양명을 생각해 보라. 대나무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속에 담긴 만물의 이치를 알려고 했던  그의 시도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는 격물치지를 다르게 해석한다. ‘격’을 정(正)이라 해석했다. 그리고 물(物)이라는 것은 맞닥뜨린 사태이며 사람의 의지가 지향하는 곳이다. 즉 ‘물’이란 의지가 있는 곳이다. 격물은 (마음 속에 있는) 사물(物)을 바로 잡는(格) 것이란 의미가 된다. 요약하면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바로 잡는 것이 격물이다. 지(知)는 마음 속에 선험적으로 지니고 있는 지혜인 ‘양지(良知)’이며 결코 외연적인 지식의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양명의 격물치지는 ‘행동과 마음을 바로 잡아 마음속의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하늘의 보살핌에 의해 뜻하지 않게 양지의 학을 깨닫게 되었고, 이로써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까지 확신했다. 그 때문에 백성이 고통과 죄악에 빠짐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심이 아팠다. 그래서 나 자신의 어리석음도 잊어버리고 양지의 학으로 백성을 구제하고 싶었다. 이런 나의 행동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비웃고 헐뜯으면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미친 사람이니 얼빠진 사람이고 한다. 부모, 형제가 깊은 골짜기에서 떨어지려는 것을 보게 되면 소리 지르며 맨발로 달려가 벼랑 끝에 매달려 ….  사대부라는 자들은 그 옆에서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담소하면서 손짓하며 말하기를 ‘예의범절을 잊어버리고 의관도 갖추지 않고 저렇게  보기 흉하게 허둥대며 소란을 피우는가. 필시 미친 사람이거나 얼빠진 사람일 것'이라고 말한다"며 사대부들에게 일격을 가한다.


양명의 사상이라는 것이 결국은 ‘실천’이 빠져 있는 사대부 사회의 허위 의식의 고발이었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죽은 후 양명학은 좌파와 우파로 분열되었다. 좌파는 사회적 통념과 권위에 도전하여 기성 도덕을 극단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양명학 좌파는 이론이나 실천적인 면에서 과격주의자(래디컬리스트-이 부분을 보면 어수갑씨의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가 생각난다. 어수갑씨의 삶은 공지영씨가 쓴 소설 <별들의 들판>에) 였다.

 

 

그리고 유교의 반역자라고 하는 이지(이탁오)가 등장한 것이다. 그의 사상은 <분서>에 잘 나타난다. “ 사람들은 내가 아직 동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꾸짖는다. 그러나 동심은 진심이다. 만약 동심을 옳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곧 진심을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진심이란 거짓의 반대 개념이다. 동심이란 거짓과는 무관한 순수한 진실이며 최초의 한 가지 생각의 본심이다. … 만약 배우는 사람이 도리어 책을  많이 읽고 의리를 안 탓으로 동심을 저해한다면 이는 그릇된 것이다. 무릇 학자들이 책을 많이 읽고 도리를 알아서 오히려 동심을 저해하고 있을 따름이니 … ” 그 역시 사대부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물론 여기서 동심(童心)은 양명이 말한 양지의 다른 표현이다.

 

사대부들의 박해를 받아 추종자들과 함께 피신 생활하던 그는 1602년 2월에 체포되었고 3월 16일 베이징의 옥중에서 자살하였다. 이지가 죽은 것은 중국의 루소라 불리는 황종희(<명이대방록>의 저자. 박노자가 유교적 사회주의라면서 언급한 적이 있다)가 태어기 8년 전이다. 때는 명이 망하기 42년 전이었다. 그의 저작들은 모두 소각되었고 다음 대인 청조에 들어서도 그의 저술은 금서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양명학이 얼마나 과격했는(?) 지는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1에서도 잘 나타난다. 보수와 수구는 된장과 똥 만큼이나 다르다고 한 그 글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